
한 번 사는 인생, 교양 있는 삶을 위해
서점 주인이자 사회학자인 노명우와 함께 읽는 고전들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도 고전은 ‘언젠가 읽어야 할 책’이지만 아무래도 ‘선뜻 손이 가지 않는 책’이다. 두려움이 앞서는 고전의 깊은 바닷속을 안내하기 위해 나선 가이드는 서점 주인이자 사회학자인 노명우다. 이 책 《교양 고전 독서》에서 노명우는 엄정한 학자의 기준으로 선택한 고전 열두 권을, 손님들에게 책을 골라주는 푸근한 서점 주인의 말투로 소개하고 있다. 그래서 이 책에 담긴 고전 리스트는 진부하지 않고 글을 읽는 재미도 확실하다.
이 책은 개인적인 서평 모음집도, 두꺼운 고전들의 요약본도 아니다. 저자 노명우는 독자들이 고전을 직접 읽을 수 있도록, 본인의 완독 경험을 바탕으로 독자들에게 새로운 독서법을 제안하거나, 관련된 배경지식을 알려주거나, 책 속 핵심 키워드들을 귀띔해줄 뿐이다. 고전의 권위에 기죽지 말 것을 강조하는 성실한 가이드의 친절하고 흥미진진하고 위트 있는 조언을 따라가다보면 누구라도 고전을 스스로 펼쳐 들 용기가 생길 것이다.
이 책은 명확한 목표를 지향하는데, 바로 ‘교양’이다. 고전을 읽는 이유는 교양을 쌓기 위해서다. 노명우가 말하는 교양이란, 정보와 지식을 습득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것을 “능동적 사유의 소재로 삼아 성찰을 거쳐 인식의 성장을 이룸으로써 지혜에 도달”하는 과정이다. 그래서 ‘교양인’이란 “강한 호기심”을 갖추고, “지식을 공공선을 위해 기꺼이 사용”하고, “세계의 다양성을 수용”할 줄 알며, “타인을 설득하는 역량”을 가지고 “선하지 않은 권력에 지속적인 비판”을 할 수 있는 사람이다. 어느 때보다 교양이 필요한 시대, 어제보다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교양인이 되는 데 도움이 될 고전이라는 기준으로 최종 열두 권이 선택되었다.
본문 중에서
교양은 스스로 질문을 던지고,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과정입니다. 교육은 무엇을 위한 수단이지만, 교양은 그 자체가 목적입니다. 교육은 졸업과 함께 끝이 나는 과정이라면, 교양은 삶에서 지속적인 노력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프롤로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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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바보가 바보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전문지식을 파헤치는 게 아니라 전문지식의 깊지만 좁은 시야에서 벗어나 포괄적인 관점을 얻을 수 있는 교양의 습득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전문지식이 현미경으로 좁은 분야를 들여다본 결과라면, 교양은 현미경만 들여다보면 놓칠 수 있는 전문지식 사이의 상호 연결을 조망하는 눈을 제공합니다. 원자폭탄을 만들 수 있는 전문지식을 가지고 있지만, 자신의 지식으로 개발된 원자폭탄에 잠재되어 있는 재앙의 위험성을 교양의 관점에서 점검할 수 없는 사람은 때늦은 후회를 하지요. ─〈프롤로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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텍스트를 읽을 때 우리가 주목해야 할 단어는 ‘어떤’입니다. ‘어떤’은 예를 들면 이렇게 사용됩니다. “쾌락은 좋은 것입니까”라고 누가 질문을 했을 때 “그렇다” “아니다”라고 양자택일적으로 쉽게 말하는 사람은 쾌락을 총괄적으로 생각하는 겁니다. 쾌락에 대한 이데아적인 판단이 있는 거죠.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는 현실주의자입니다. 삶의 딜레마에 주목하는 사람입니다. 그렇기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총괄적인 결론을 내리지 않고 ‘어떤’ 쾌락은 좋을 수 있고 ‘어떤’ 쾌락은 나쁠 수도 있다고 대답합니다. ─1장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까요〉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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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의 인문학은 두 가지 뿌리로부터 성장한 나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 뿌리가 헬레니즘, 즉 그리스의 지적 전통이고 또 다른 뿌리가 기독교입니다. 헬레니즘의 대표작인 호메로스의 서사시는 워낙 오랜 기간 서양문화권에서 수용되면서 수많은 책에서 재해석되었기에 호메로스의 서사시에 대한 이해 없이 서양의 인문학을 깊이 이해하려면 장벽에 부딪히지요. ─2장 〈이 남자들은 대체 뭘 얻겠다고 싸우는 걸까요〉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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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븐 칼둔은 이슬람 문화 내부에서 이슬람 전통을 상식처럼 공유하고 있는 독자를 상대로 《무깟디마》를 썼습니다. 이 책을 이슬람에 대한 배경지식이 아주 부족한 21세기의 동아시아인이 읽으리라 예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제가 읽어보고 말씀드립니다만, 《무깟디마》는 결코 이론적으로 어려운 책이 아니에요. 어려움의 원인은 단순해요. 이슬람에 대한 배경지식 부족입니다. 고전은 대부분 현대의 독자와는 다른 문화적·역사적 배경 속에서 탄생한 책이니 배경지식 확보는 고전을 읽기 위해 필수불가결한 준비운동입니다. ─3장 〈낯선 세계 속으로 들어가봅니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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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증은 예증이다’라는 자신감이 필요해요. 예증은 부연설명입니다. 핵심은 예증에 있는 게 아닙니다. 학자마다 핵심 주장이 있습니다. 글 쓰는 사람은 지식을 총동원해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모든 사례를 써놓고 싶어합니다. 그래야 읽는 사람에게 훨씬 더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이건 작가의 관점입니다. 그런데 독자가 작가보다 사전지식과 배경지식이 부족하다면 독자는 독해에서 어려움을 겪습니다. 비코 같은 다독의 작가를 읽는 독자의 대다수는 비코보다 희박한 지식을 지니고 있습니다. 비코만큼 지식이 있는 사람이 지구상에 몇 명이나 있겠어요. 나만 못난 게 아닙니다. 비코가 박식한 거죠. ─5장 〈스스로 가르친 사람에게서 배웁니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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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작가의 번뜩이는 순발력으로 쓰이지 않습니다. 긴 호흡으로 생각에 생각이 더해진 결과가 모여 책으로 빚어집니다. 책 속에서 끊임없이 이어지는 문장은 사유의 나이테와도 같지요. 저는 책을 읽을 때 그 결과가 만들어진 과정, 즉 사유의 흔적에 주목합니다. 동일한 책을 처음 읽을 때는 책에 담긴 정보를 쫓아가기 급급하지만, 같은 책을 반복해서 읽다보면 자연스레 작가의 사유 과정에 눈을 뜨게 되지요. 반복 독서를 하면 낯선 타인이었던 작가와 어느 사이 거리감이 좁혀지고 독자는 작가의 편에 서게 됩니다. 저는 이 과정을 감정이입에 빗대어 사유이입思惟移入이라 하고 싶습니다. ─7장 〈우리가 가야 할 교양 넘치는 나라가 있습니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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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나를 돌아보게 합니다. 우리는 속물적 욕망을 충족하기에는 돈이 충분하지 않습니다.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평생 자괴감을 느끼며 살아야 할까요? 그런 의미에서 더 많은 돈을 벌어 욕망을 실현하라는 자기계발서와 달리 지라르의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은 지성의 힘으로 욕망의 체계에서 탈출구를 생각하게 하는 21세기형 수신서修身書라 생각합니다. 현대 생활에 가장 어려운 건 욕망을 다스리는 문제잖아요. 저는 지라르로부터 21세기 방식으로 나를 지키는 방법의 실마리를 찾았습니다. 좋은 책은 삶의 지혜와 이렇게 연결되지요. 문학이 전공이 아님에도 문학비평서를 교양독서로 읽은 덕택입니다. ─11장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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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의 《자본》은 자본을 분석하고 짐멜의 《돈의 철학》은 돈을 대상으로 삼습니다. 자본과 돈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돈이 있다고 모두 자본가는 아닙니다. 자본은 돈으로 구성되어 있지
만 돈의 규모가 임계치를 넘어서 임금노동자를 고용할 수 있는 정도가 되어야 자본이 되지요. 《자본》을 읽으면 나의 처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까요? 물론 《자본》으로 임금노동자의 처지를 설명할 수는 있지만 우리의 일상을 분석하는 게 목적이라면 소수의 사람만 갖고 있는 자본보다는 누구나 갖고 있는 돈에 대한 해석이 요긴합니다. 짐멜은 자본이 아니라 돈에 주목합니다. 대부분의 사람에겐 자본이 없지만 돈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12장 〈돈으로 할 수 있는 것과 돈이 있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