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최초의 사이버공간 시창작 동인인 〈시인통신〉의 동인시집이 연작 시집으로 묶였다. 이 시집들은 혼란과 격변의 시기인 1990년대에 시를 쓰기 시작한 사이버문학 1세대들이 21세기를 10여 년 경과한 현재에 그들이 도달한 문학적 지점을 보여주는 앤솔로지이다. 이 시집들은 서정시 본연의 순수함을 잘 간직한 전통시에서부터 사이버문학 특유의 파격과 생경함이 두드러진 실험시들까지 폭넓은 문학적 스펙트럼을 보여 준다, 〈시인통신〉의 시집들은 사이버 공간을 매개로 한 우리나라 문학동인의 현주소를 가늠하는 지표가 될 것이다.
출판사 서평
아도르노는 아우슈비츠 이후를 서정시가 가능하지 않은 시대라고 했다. 이와는 조금 다른 맥락에서의 이야기이긴 하지만, 현대는 시 자체가 가능하지 않은 시대이다. 오늘의 현실이 아도르노의 시대보다 더 남루하기 때문이다. 아도르노가 인간의 잔혹성 앞에서 서정시의 무용론을 주장했다면, 이미지 중심의 영상매체 시대, 이진법의 바이트(byte)로 모든 것이 연산되는 오늘의 전자매체 시대는 시에 극도로 비우호적인 환경을 만들어냈다. 후기자본주의의 물신성이 위력을 떨치는 포스트모던 시대에 문자 텍스트를 기반으로 하는 전통적 예술 장르인 문학은 그 영역의 축소와 영향력의 감소를 강요받아왔다. 그리하여 오늘날은 책이 읽히지 않는 시대이며, 서사 문학이 대중과 유리되고, 서정 장르가 배척받는 시대이다.
그럼에도 시는 계속 씌어진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는 계속 씌어진다. 돈의 가치가 최우선적 가치로 내세워지는 물질 만능주의 시대에 현대인은 지속적으로 상처받으면서도 그 상처를 감싸줄 정서적 위안의 대상을 찾는다. 이런 점에서 인류의 오랜 벗인 시는 또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찾을 수 있는 위안의 등가물이다. 〈시인통신〉은 상처받은 현대인들을 위한 치유제로서 시의 가능성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이를 테면, 제2호 시집 언 강을 건넌 후에에서
우린 저수지 마주 보이는 언덕에 도착했다 낯선 새울움이 수면에 꽂히자 물결이 일었다…(중략)…저수지는 그렇게 속내를 보이지 않았다 저것 봐요 저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그리워한 적 있나요 저 심연에 그녀는 갑자기 흐느끼기 시작했다(「금광 저수지에 내리는 눈」 중에서)
라고 윤의섭 시인이 노래하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이다. 또 이기선 시인이 「겨울 나무」에서, ‘병이 나을 것 같지 않아 편지를 씁니다. ……까닭을 알 수 없는 기쁨 때문에 날이 밝기도 전에 잠에서 깨어나곤 합니다// 요즘도 쪽문은 열어둔 채 지내고 있습니다. 끝까지 꾸지 않은 꿈이 남아 있다고 그 말이 하고 싶었습니다.’(제4호 시집 「시냇물 주식회사」)라고 쓴 것은 각박하고 험난한 일상에서도 희망의 출구를 닫고 싶어하지 않는 강력한 소망의 표현이다. 이렇듯 〈시인통신〉의 시집들은 오늘의 희망을 노래한다. 그러나 〈시인통신〉의 시집들이 상처받은 이들을 위한 위안의 시들로 채워진 것은 아니다. 때로는 시의 본질에 대한 근원적이고 반성적인 성찰에 시인의 촉수가 가 닿기도 한다. 민정옥 시인이 ‘시쓰기’에 대해
황홀한 세계를 가로질러/ 환멸이 도착하네/ 음흉한 우체부가 내용물을 가로채고/ 다른 것을 집어넣었네/ 첫 발신음은/ 천상의 소리로 빛이 났으리/ 이런 게 아니었으리// 나는 환멸을 옆구리에 끼고/ 우체부를 찾아가는 사람이네/ 사물의 처음을 찾아가는 사람이네(「시쓰기에 대한 규정」 2․3연)
라고 진술한 것(특별시집 투명한 허기)이 바로 그것이다. 시인은 자신의 시작업을 ‘환멸 가득한’ ‘황홀한 세계’에서 ‘사물의 처음을 찾아가는’ 행위에 비유하고 있는데, 현실의 비의(秘意)를 탐색하는 이 행위를 지탱하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자기 모멸의 내적 모티프이다. 그래서 시인의 예민한 더듬이는 ‘황홀한 세계’와 ‘음흉한 우체부가 바꿔치기한 다른 것’ 사이에 놓여 있다.
시는 계속 진화한다
〈시인통신〉은 사이버공간을 매개한 우리나라 최초의 문학동인답게 다양한 형식적 실험을 추구해 왔다. 〈시인통신〉에서 활동한 일부 시인들은 시 장르의 외연을 확장시키기 위한 실험적 형식의 시들을 선보이기도 했다. 시나리오적 형식을 차용한 임수경 시인의 시(「어느 평범한 두 영혼의 약속」)라든가 드라마 기법을 작품 속으로 끌어온 이정란 시인의 시(「바다」) 등이 그러한데, 이들의 형식적 모색은 김경주 시인의 일련의 시작업보다 더 앞선 시기에 행해진 선구적 노력이라 할 수 있다. 순수한 형태로서의 전통시와 타 장르의 형식을 과감하게 채용한 실험시들이 절묘하게 조화된 〈시인통신〉의 시집들은 우리나라 사이버문학이 걸어온 과정을 잘 보여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