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험으로 밝힌 염불선 수행의 이론과 실제
이 책의 저자인 덕산 스님(청원 혜은사 주지)은 청화(1924~2003) 스님 이후 염불선으로 득력(得力)한 선지식으로, 간화선 수행이 어려운 출·재가 수행자들이 염불선으로 정진할 경후, 빨리 진여자성인 본래면목과 계합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 있다. 오랜 지병으로 참선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염불로 선(禪)을 체험한 덕산 스님은 간화선에 절망하거나 반신반의하며 수행하는 공부인들이 염불선으로 본래면목을 깨닫기를 간곡히 바라고 있다. 그동안 《염불선》《달마는 서쪽에서 오지 않았다》《자유인의 길 직지심경》등을 출간한 것도 오랜 전통을 가진 염불선을 되살리고 보급하고자 하는 원력에서 나온 불사라 할 수 있다.
특히, 이번에 나온 《염불하는 이것이 무엇인가?》의 경우, 조계종 원로의장 종산 대종사께서 “진여자성에 마음을 두고 하는 염불은 선(禪)과 다름없다” 하시며, 이 책이 나온 후 원로회의 의원스님들께 모두 책을 나눠주실 것을 덕산 스님께 당부하시는 등 염불선의 필요성에 공감하고 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더 이상 염불선이 간화선을 표방하는 조계종 수행법과 배치되는 방편이 아닌, 훌륭한 보조 수행법으로 인정받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덕산 스님은 염불과 참선의 장점을 결합한 염불선의 장점을 이렇게 설명한다.
“기존의 정토염불로는 자성을 깨닫기 힘든 것이 사실입니다. 또 간화선에서 ‘무(無)자’나 ‘이뭣고?’ 화두를 들어도 의심이 잘 되지 않아 득력하는 것이 무척 힘든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지속적인 염불정근으로 업을 녹이며 공부의 맛을 느낀 후 ‘염불하는 이것이 무엇인가(念佛者是誰)?’ 하는 의심을 챙기면 훨씬 수월하게 득력할 수 있습니다. 염불(주력)하는 그 놈을 의심하면 조사선과 다르지 않은 대신, 기존의 간화선 보다 빨리 화두 의심에 들 수 있는 장점이 있습니다. 화두에 의심이 잘 들지 않는 참선 수행자들이 염불선을 닦으면 큰 이익이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덕산 스님의 구도와 공(空)의 증득
1982년, 출가 후, 절집안의 살림과 수행을 병행하는 입장이 되면서 초발심 때의 간절한 구도심이 조금씩 퇴색되어 가고 있음을 느낄 무렵이었습니다. ‘모든 마군으로써 수행을 도와주는 벗을 삼으라.’는 부처님의 가르침처럼 뜻하지 않게 다가온 어려움을 극복하고자 다시 한번 발심할 수 있는 계기가 있었습니다. 관세음보살입상을 모시면서 무리하게 사채 빚을 얻었던 것이 매월 이자를 갚아나가는 데 큰 부담으로 다가왔던 것입니다.
수행자의 입장으로 금전에 대한 압박은 실로 적지 않은 것이었기에 그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방편으로 하루 삼분정근의 정진을 시작했습니다. 정진을 시작한지 일주일 정도 되었을까. 정진 중에 크고 밝고 둥근 달 가운데 관세음보살님과 함께 관세음보살님을 옹호하는 수많은 불·보살님의 모습이 선명하게 현전(現前)하셨습니다. 의식이 분명한 상태에서 불·보살님을 친견한 그때의 벅찬 환희심이란 형언할 수 없을 만큼 큰 것이었습니다. 물론 불·보살님을 형상으로 보았다는 것은 참 모습을 본 것이 아니기에 대수롭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 당시 나는 그 일을 계기로 더욱 무섭게 정진할 수 있는 용맹심이 솟았습니다.
정진에 대한 확신과 하면 된다는 자신감은 대웅전 불사를 발원하는 새로운 원력으로 이어졌습니다. 출가 전부터 지병인 신장염으로 고생하였기에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 종종 있었지만, 그 어떤 고통도 정진을 중단할 이유가 되지 않았습니다.
점차 정진에 힘이 붙기 시작했고, 잠자는 시간 외에는 항상 염불선이 이어지고 있음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 무렵 곡성 성륜사 조실로 계시던 청화 큰스님을 친견하여 가르침을 듣는 인연이 있었는데, 나의 평소 수행방법인 염불선에 대해 다시 한번 확신과 자신감을 얻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또한 성철 스님의 “자나 깨나 한결같은 오매일여(寤寐一如)가 되어야 한다.”는 가르침을 떠올리면서 오매일여 진여불성(眞如佛性)자리를 놓치지 않으려는 몸부림으로 입술은 점점 타들어가고 피가 마르는 듯 했지만, 의식만큼은 날로 소소영영(昭昭靈靈)해지고 있었습니다.
1992년 4월 2일 관세음보살 입상을 조성하고 점안법회를 봉행하던 날, 혜은사에는 스님과 신도들을 환희심에 젖게 하는 신비로운 현상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양력으로 5월이었던 이 날은 구름 한점 없이 유난히 햇살이 따가웠는데, 정수리에 얼음물을 적신 수건을 얹어야 할 정도였습니다. 이 날 법회의 증명법사는 무려 40여년에 걸친 장좌불와(長坐不臥)와 묵언수행으로 이름을 떨친 청화 큰스님이었습니다. 놀라운 일은 큰스님이 사좌좌에 올라 법문을 내리려는 순간에 일어났습니다. 관세음보살상의 머리 위로 갑자기 구름이 모이더니 무지개처럼 오색 영롱한 반원형의 띠가 빛을 비추기 시작한 것입니다.
야단법석에 모인 300여명의 사부대중은 환희심에 술렁이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청화 큰스님은 법문을 마치지 못한 채 30여분이 지나서야 혜은사를 떠났는데, 이때까지 찬란한 오색 띠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청화 큰스님이 혜은사를 떠나면서 남긴 말씀은 “앞으로 이 도량에 큰 불사가 이뤄질 것”이라는 예시였는데, 큰스님의 말씀대로 혜은사는 날로 면모를 달리하고 있습니다.
3,000일 정진 중이었던 1999년 10월, 정진에 가속도가 붙어 정진 그 자체로 행복했고, 병고에 시달리던 몸도 많이 가벼워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진정 나는 누구인가?’ 하는 답답증이 가슴 한 구석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음을 어쩌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정진 중에 갑자기 머리가 텅 비워지면서 우주가 환히 밝아지고 말과 생각이 끊긴 자리를 또렷이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우주와 내가 하나 된 그 자리에 이름을 체험하게 된 것입니다. 가슴 벅찬 환희심! 충만한 법열(法悅)! 우주를 다 얻은 것 같은 기분이었습니다. 그저 한없는 눈물이 흘러 내렸습니다. 어찌, 그 상황을 언어와 문자로써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한없는 눈물을 흘리며, 서산 스님의 오도송 가운데, ‘닭 우는 소리를 듣는 순간, 장부(丈夫)의 할 일 다 마쳤네.’ 라는 말씀을 떠올리며 소리쳤습니다.
“다시는 천하의 노스님의 혀 끝에 속지 않으리.”
이 자리를 확인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 동안 몸부림쳤는가 생각하니 분한 마음도 들었지만, 이 때의 환희심은 세상에 나온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로부터 20여일간 나는 자유로운 경지를 느끼며 지냈습니다. 그 일이 있은 이후,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알았고, 경전이나 어록을 봐도 모두 그 자리임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이제 남은 생은 마하반야바라밀을 성취하여 구경열반(究竟涅槃)에 이를 수 있도록 더욱 큰 정진을 이어가면서, 한편으론 부처님의 크신 은혜를 조금이나마 갚아 보고자 신도교육에 힘쓰고 싶습니다. 있다, 없다 입을 떼면 그르칠 것이요. 입을 떼지 않으면 불은(佛恩)을 저버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1부 ‘덕산 스님의 염불선 수행기’ 중에서-
현대인에게 적합한 염불선의 구체적인 행법 소개
청화 스님이 염불선의 역사적, 이론적 근거를 밝혀 현대적인 염불선의 기초를 다졌다면, 덕산 스님은 그 토대 위에 구체적인 염불선 수행법을 제지한 점이 특징이다. 덕산 스님은 이 책에서 스님이나 재가자들이 자주 질문하는 수행법에 대해 구체적이면서도 명쾌한 답변을 하고 있다.
덕산 스님은 염불선 수행의 핵심 요체를 이렇게 밝히고 있다.
수행으로 삼매에 들기 위해서는 대단한 발심이 아니면 참으로 힘듭니다. 죽음 직전의 막다른 골목에서 비로소 발심이 가능한데, 간절한 발심이 수행의 핵심입니다. 한 마디로 백척간두(百尺竿頭)에서 진일보(進一步)하는 절박한 심정이 아니면 힘찬 정진이 어렵습니다. 하지만, 힘든 고비를 넘기고 정진에 대한 확신과 하면 된다는 자신감이 생기면 염불정근에 대한 새로운 원력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염불선 수행자는 무엇보다 현생과 극락에서의 수행이 다르지 않다는 점을 바르게 알고 수행을 해야 합니다. 내가 본래 부처임을 조금도 의심하지 말고 지금까지 해오던 정토염불이 아닌, 내 안의 부처님을 마음에 두고 염불을 해야 합니다. ‘아미타불’ 또는 ‘지장’, ‘관음’을 입을 움직이지 않고 아주 빠른 속도로 염하되 우주의 주인인 ‘염불하는 그 놈’에 마음을 두고 정진해 나가는 것입니다. 특히 잠이 드는 순간까지도 염불을 놓치지 않는 것이 중요한데, 잠자리에 아주 편안한 자세로 누워서 눈을 지그시 감고 빠른 속도로 속으로 정진하면 스스로 삼매 체험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생각 이전의 자리를 관하며 아미타불이나 관세음·지장보살 기타 불·보살님의 명호를 염할 때, 만약 아미타불, 지장보살, 관세음보살 그 외 많은 불·보살 명호가 각기 다르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염불선이 아닙니다. 우주 현상계는 진여당체에서 다양한 인연에 의해 형상을 나투고, 이름이 붙은 것일 뿐 실은 하나에서 다양한 모습과 이름을 띠고 있는 것이기에 조금도 다르지 않은 하나의 자리입니다.
만약에 불·보살님이 각기 다르다 하면 이는 정도가 아니며 분별심을 내고 있는 것으로 선(禪)이라 할 수 없습니다. 물이 인연에 따라 다양한 이름과 모양을 나툰다 해도 본래는 물이듯이, 이 현상계도 다양한 이름과 형상을 띠고 있지만 본래 진여당체이기 때문에 의심하지 않고 한 분의 불·보살님의 명호를 염하면 됩니다. 다만 염불정진을 함에 있어 우리가 평상시에 하듯이 느리게 또는 소리 내서 한다면 염불선을 쉽게 느낄 수 없습니다. 진여당체에 마음을 두고 마음으로 아주 빠르게 끊어지지 않고 쉼 없는 정진을 통해서 선을 이룰 수 있습니다.
역대 선사들의 선정불이(禪淨不二)의 법문 제시
덕산 스님은 이 책에서 4조 도신대사, 6조 혜능대사, 보조 국사, 태고 선사, 서산 대사, 경허 선사 등 역대 선지식 23인의 염불선 법문을 제시해 수행자들의 발심을 돕고 있다. 선사들은 선(禪)과 염불(淨)이 둘이 아닌 선정불이(禪淨不二)의 법문을 통해 자력(自力)과 타력(他力)이 둘이 아닌 염불삼매와 일상·일행삼매를 밝히고 있다.
선사들의 법문에 따르면, ‘삼매’는 우주와 하나된 경지를 말한다. 모든 의문이 끊어진 경지, 다시 말해서 무명(無名) 무상(無相) 절일체(切一切)의 경지를 뜻한다. 삼매를 통해 유와 무를 떠난 자리, 나의 본래자리, 생각 이전의 자리, 선(禪)이자 부처자리를 체험할 수 있다. 우주의 근본 진여당체는 시·공간을 떠난 자리로서 역대 불·조사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자리이며 산천초목 삼라만상의 본래자리이기도 하다.
이러한 본래면목을 깨닫기 위해서는 일상삼매(一相三昧)와 일행삼매(一行三昧)를 함께 닦아야 한다.
‘일상삼매’란 천지 우주를 오로지 하나의 부처로 보는 이른바 실상관(實相觀)이다. 모든 존재의 뿌리를, 모든 존재를 하나로, 진공묘유(眞空妙有: 참으로 비었으되 묘하게 존재함)로, 아미타불의 무량광명(無量光明)으로 보는 삼매이다. 그리고 천지우주를 하나의 덩어리로 보는 그런 견해를 끊어짐 없이, 앞생각 뒷생각에 잡생각이 안 끼이도록 염불하거나 화두를 들고 염념상속(念念相續)으로 이어가는 것이 ‘일행삼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