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조각을 지키기 위한 기록
기억을 잃는다는 것은 마음을 잃는다는 것. 마음을 잃는다는 것은 자신을 잊는다는 것
잠시 당신이 기억하고 있는 어제를 떠올려 보자.
어제의 날씨, 미처 처리하지 못했던 일, 버스 요금이 올랐다는 것, 누군가 대선에 출마하겠다고 선언한 것…. 누군가와의 적절한 대화를 위해 머릿속에 꾸역꾸역 집어넣은 기억들로 가득하진 않은가?
또 혹시 어제 맑았던 날씨 덕분에 하늘을 올려다보면 행복해졌다든지, 스쳐간 향수 냄새에 잊었던 누군가 생각나 마음 한쪽이 아려왔다든지…. 이런 어제의 당신 ‘마음’을 기억하고 있는가?
‘나의 기록’이 아닌 ‘타인의 기록’에만 골몰하는 우리에게 페페는 말한다. 매일 잊혀가는 내 기억의 조각을 찾는 것이 바쁘게 변해가는 세상 속에서, 내가 영원히 기록되는 방법이라고.
“기록장에 끊임없이 뭔가를 기록한다고 해서 다 기억한다고 생각하면 그건 착각이야. 네 감정, 그때의 심정이 어땠는지, 슬펐는지 기뻤는지를 기억하는 것, 그게 사람의 역사인 거야. 네가 말하는 세계사나 국사에도 저마다의 감정이 숨겨져 있는데, 네 기록장에는 전혀 그게 없어. 어쩌면 그녀가 너를 떠난 것은 그것 때문일지도 몰라. 네가 어떤 마음인지 느껴지지 않았단 거지.” _본문 중에서
“당신, 최초의 기억은 뭐예요?”
삶을 연구하는 문화집시 페페, 그녀가 말하는 최초의 기억은?
이 책에서 페페는 사람들에게 같은 질문을 던진다. “당신, 최초의 기억은 뭐예요?” 사람들은 처음 들어본 질문에 잠시 당황하다 점점 자신의 나이에서 숫자를 하나씩 빼가며 기억을 더듬는다. 어릴 때 길을 잃었던 기억, 동생이 태어나던 날의 기억, 집 앞 가게의 간판이 바뀌는 것을 아빠와 바라봤던 기억… 최초의 기억을 찾아낸 사람들은 잃어버렸던 자신을 찾은 것처럼 좋아한다. 자신을 돌아보고 싶지만 그럴 여유를 갖지 못했던 사람들이《마음이 기억하는 한 아무것도 사라지지 않는다》로 잃어버린 ‘기억 조각 찾기’를 시작한다. 매일 앞으로 늘려만 가던 우리 인생은 조금 더 깊어진다.
몇 살인지 기억나지 않지만 갓난아기만할 때, 시간이 참으로 기묘하게 흘러 아침인지 저녁인지 분간하지 못하던 때, 월요일 다음 금요일이라고 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았던 때, 팔다리를 겨우 움직일 때. 나는 아빠와 엄마가 밥을 먹던 밥상 옆에 누워 있었다.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을 것 같은 고요한 날이어서 조금 지겹다고 생각했다. 조작된 기억일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지금으로서는 이것이 나의 최초의 기억이다.
_본문 중에서
누구나 가지고 있을 최초의 기억, 가장 아름다웠던 기억, 수영장을 가득 채울 만큼의 눈물을 흘리고 싶었던 기억,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미안해지는 기억, 이 세상에 없는 누군가와의 기억…. 이런 이미 지난 일을 떠올리는데 마음에 잔잔한 파동이 오거나 눈이 시큰해지는 이유는 뭘까?
삶은 기억이라는 이름으로 마음속에 기록되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페페는 마음속에 기억을 담고 사는 우리에게 말한다. “자신을 기억하는 것을 멈추지 마세요. 아픈 기억도 슬픈 기억도 모두 소중한 기억, 소중한 삶입니다.”
익숙한 장소에서 기억의 조각들을 찾아내다
삶을 연구하는 문화집시 페페는 특별한 의미를 찾기 위해 떠나는 여행과, 일상의 경계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했다. 여행을 위한 여행이 아닌 나를 위한 여행이란 무엇일까. 그리고 꼭 여행을 통해서만 특별한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것일까. 일상에서 나를 찾을 수는 없을까. 그리고 하나의 결론을 내렸다. 일상과 여행은 다르지 않다는 것. 그녀는 말한다. 집을 나서는 모든 순간이 여행이라고. 그리고 내가 머무는 공간을 조금 다른 시각으로 본다면 여행에서도 찾을 수 없는 삶의 의미들을 찾을 수 있다고.
페페는 지겨워서 늘 떠나려 했던 공간들을 다시 떠올렸다. 집, 학교, 늘 가던 카페, 매일 아침 지친 몸을 이끌고 가는 수영장, 집을 나서는 순간부터 시작되는 길 위, 상처받고 또 상처받던 사람의 마음이라는 공간.
조금 다른 눈으로 바라본 익숙한 풍경 속엔 눈물겨운 추억과 어떤 여행지에서도 찾을 수 없던 감동이 있었다. 성년의 날 친구들과 놀다 늦은 밤 집에 돌아왔을 때 책상 위에 쓸쓸하게 놓인 장미꽃과 마루에서 잠든 부스스한 엄마의 뒷모습, 누군가와 헤어지고 상처받은 마음을 들키고 싶지 않아 몰래 수영장에서 눈물을 흘렸던 나, 그리고 ‘수영장 눈물’이라는 별명을 지어준 그녀. 《천사들의 합창》놀이를 하던 내 비밀 장소 옥상, 그리고 그 옥상을 나만큼 좋아했던 친구.
이 책에서 페페는 이 시대를 사는 우리 모두가 쉽게 지나쳤던 일상의 공간 속 진정한 삶의 모습을 찾아냈다. 1부 슬픔과 편안함이 함께 있는 공간: 집, 2부 낡은 사진첩의 한 페이지 같은 공간: 학교, 3부 낯선 사람들의 이야기가 공존하는 공간: 카페, 4부 한숨, 눈물 그리고 내일이라는 서글픈 희망이 담긴 공간: 수영장, 5부 사람은 누구나 여행자라고 속삭이던 공간: 길 위, 6부 우리의 마지막 쉼터: 사람의 마음. 이렇게 여섯 개의 공간을 담담하게 풀어냈다. 일상이 지겹다며 어디론가 떠날 기회만을 엿보는 우리에게 페페가 들려주는 일상 이야기로 우리는 우리의 풍경을 다시 돌아보게 된다. 그리고 그 풍경은 삶의 가장 특별한 부분으로 기록된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기록은 당신이 살아낸 삶 가운데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