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중국의 위상이 높아지고 동아시아 내에서의 영향력이 더욱 커지면서 중국과의 관계는 그 어느 때보다도 우리의 정치·경제적 현실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변수가 되었다. 정당한 한중 관계를 수립하기 위해서는 공존과 호혜의 이념을 지향한 과거 한중 교류의 역사적 경험을 반추하고 그 기억을 되살리고자 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 책은 근대 시기 호혜적 관계 속에서 서로를 이해하려고 했던 한중 교류의 역사적 흔적을 추적한 연구서이다. 이육사, 김태준, 루쉰(魯迅), 장아이링(張愛玲), 신언준, 류수인, 최승희, 후스(胡適)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했던 한중의 지식인들이 문학과 예술, 학문을 매개로 교류하면서 어떤 사상적 영향을 주고받았는지 세밀하게 분석함으로써 다른 정치·문화적 환경에서 이룩된 한국과 중국의 ‘근대 경험’을 비교하고 근대 한중 교류의 기원을 탐색하고 있다.
일제 치하에서 주권을 상실한 한국은 주체적으로 중국과 교류할 수 없었다. 그 결과 이 시기 양국의 교류는 주로 비공식적이고 개인적인 차원에서 매우 제한적으로 이루어졌다. 이 책은 현장 답사를 비롯해 당시의 신문·잡지, 경찰 신문조서, 일기 등 한국과 중국의 다양한 자료를 활용하여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근대 시기 한중 교류의 구체적인 사실(史實)을 실증적으로 밝혀내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학술적 의의를 지닌다. 예컨대 이 책에서는 그동안 미비했던 이육사의 전기적 사실을 보충하고 이육사가 중국 현대문학에 관심을 갖게 된 객관적인 조건을 확인하기 위해 그가 베이징의 ‘중국대학’에 유학했다는 사실을 실증적으로 고찰하고 있다. 중국대학은 중국 공산당이 집권한 후인 1949년에 폐교되어 관련 자료가 거의 남아 있지 않은데, 저자는 중국대학 졸업생들을 인터뷰하고 일본 경찰에 의해 작성된 이육사의 신문조서 등 관련 자료를 면밀히 분석함으로써 지금까지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았던 이육사의 중국대학 유학 시기와 그가 재학했던 당시의 캠퍼스 위치를 새롭게 밝혀내고 있다.
더불어 이 책에서는 이육사와 루쉰의 문학, 김태준과 후스의 문학사 서술 관점, 장아이링과 최승희의 예술관 등을 비교 고찰함으로써 근대 한중 지식인들의 사상적·예술적 연관성 및 공통성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한국의 독립을 위해 힘썼던 이육사와 류수인의 중국에서의 활동을 탐색하는 과정에서 일제 치하 한국의 정체성과 당시 전개되던 독립운동의 실상을 파악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주목할 만하다.
▣ 책 내용
이 책은 총 4부 8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먼저 1부에서는 이육사가 중국 현대문학에 관심을 갖고 이를 한국에 소개한 계기가 된 베이징의 ‘중국대학(中國大學)’ 유학과 관련된 사실을 다루고 있다. 이를 위해 중국대학 졸업생들을 인터뷰하고 경찰 신문조서 등의 실증적 자료를 분석함으로써 이육사가 1926-1927년에 중국대학에 유학했으며 베이징의 시단에 위치한 정왕부(鄭王府) 캠퍼스에 다녔다는 사실을 새롭게 밝혀내고 있다. 또한 한국 문인으로서는 최초로 중국의 문호 루쉰과 대면하는 기회를 가졌던 이육사가 루쉰과 만난 장소를 실증하고, 이육사가 문학의 예술성과 실천성을 동시에 추구했다는 점에서 그의 문학과 루쉰의 문학 및 중국 현대문학이 관련성이 있음을 고찰한다.
2부에서는 경성제국대학 중국어문학과 재학 시절 졸업논문 자료를 수집하러 베이징에 다녀온 김태준이 중국 신문학에 자극을 받아 이를 매개로 근대학문을 시작하게 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또한 김태준과 경성제국대학 중국어문학과 교수였던 카라시마 타케시(辛島驍)의 호혜적 학문적 교류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살펴보고, 김태준의 조선소설사 연구와 루쉰 및 일본의 중문학자 시오노야 아쯔시(鹽谷溫)의 중국소설사 연구의 비교를 통해 김태준이 이들과 학문적 성과를 공유하면서 동아시아적 시각에서 학문 연구를 진행하고자 했음을 논증한다. 이와 더불어 김태준의 『조선한문학사』와 후스(胡適)의 『백화문학사』를 비교함으로써 김태준의 학문적 독자성을 입증하고 전통 한문학으로부터 독립해 ‘조선문학’의 정체성을 드러내고자 했던 그의 학문적 입장을 고찰한다.
3부에서는 ‘화이관(華夷觀)’ 등의 전통 관념에서 벗어나 근대 민족국가 관념에 의거해 한국을 이해하려고 했던 루쉰의 ‘조선’에 대한 인식을 살펴본다. 또한 1920년대 경성제국대학 중국어 담당 교수로 서울에 체류하면서 균형 잡힌 시각으로 한중 관계를 다루고 일제 치하 조선의 현실을 객관적으로 소개했던 웨이젠공(魏建功), 베이징에 칩거하던 한국의 독립운동가를 소설로 형상화한 타이징농(臺靜農) 등 루쉰의 제자들을 통해 공존과 호혜의 이념에 입각한 한중 지식인들의 교류를 조명한다.
4부에서는 중국의 대표적인 여류작가 장아이링과 한국의 무용수 최승희가 상하이에서 만나 좌담회를 가졌던 사실을 당시 중국 잡지에 소개된 글을 통해 밝혀내고, 좌담회 내용을 토대로 장아이링과 최승희 모두 전통문화를 바탕으로 하여 각기 문학과 무용에서 자국의 정서와 양식을 현대화해 표현하고자 했다는 공통점이 있었음을 설명한다. 또한 김일성 사망 소식을 알리는 신문을 들고 찍은 장아이링의 사진과 한국전쟁을 다룬 그녀의 장편소설 『적지지련』을 분석해 냉전체제의 이념을 극복하고 초월하고자 했던 장아이링의 심화된 문학적 주제를 새롭게 조명하고 있다.
이 외에 책의 말미에는 보론을 실어 1884년에 창간된 중국의 그림신문 『점석재화보』에 수록된 조선 관련 자료를 바탕으로 당시 조선의 사회 상황은 어떠했는지, 중국이 조선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지 살펴본다. 이와 더불어 이육사, 김태준, 루쉰, 장아이링의 전기적 사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고자 각각의 연보도 함께 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