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냥꾼이 곰 사냥을 할 때는 어미 곰부터 쏘아야 한다. 어미 곰을 잡으면 새끼 곰은 자연히 따라오기 마련이다. 반면 새끼 곰부터 잡으려 하다가는 뒤쫓아 온 어미 곰에게 되레 잡아먹히는 수가 있다.
결 따라가면 이길 수 있다. 결 읽는 법부터 배워야 한다. 사냥꾼이 어미 곰과 새끼 곰 중에서 어미 곰을 먼저 쏘는 것이 결 따라가는 것이다. 이렇듯 모든 사물에 어미와 새끼가 있다. 이로써 결을 읽을 수 있다.
어떤 일을 할 때 맨 처음 할 일은 방향판단이다. 동서남북은 너무 많고 하나의 방향을 찾아야 한다. 새끼는 여럿이나 어미는 하나다. 여러 새끼에 헷갈리지 말고 하나의 어미를 찾음으로써 방향을 판단할 수 있다.
가만있는 것은 어미와 새끼로 구분하여 방향을 찾을 수 있고, 움직이는 것은 기승전결로 구분하여 방향을 찾을 수 있다. 무리가 들판에 흩어져 있으면 방향을 알 수 없지만 움직이면 전체가 한 방향으로 통일된다. 이때 어미가 앞서 가고 새끼가 따라간다. 기가 앞서 가고 결이 따라간다. 움직이면 기승전결이 드러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결을 읽을 수 있고 방향을 판단할 수 있다.
어린이에게 손가락 끝을 자기 쪽으로 향하게 한 채 손을 그리게 하면 그림을 그리면서 슬그머니 손을 옆으로 틀어버린다. 정면보다 측면이 그리기 쉽기 때문이다. 자기도 모르게 눈이 옆으로 돌아가 있다.
아시아인은 지난 5천 년 동안 눈으로 뻔히 보고도 소실점을 보지 못했다. 원근법을 찾지 못했다. 그냥 보이는 대로 보면 되는데 실제로는 그렇게 하지 못한다.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정면으로 직시하여 바라보지 못한 것이다. 눈과 피사체 사이에 어미와 새끼가 있다. 어미에게서 새끼를 떼놓았기 때문에 방향을 잃어버린 것이다. 훈련하여 눈 돌리지 않고 손 그리는 법을 터득해야 한다.
나무를 베면 나이테가 보인다. 나이테의 가운데 심이 있다. 심이 소실점이다. 나무는 심으로부터 사방으로 자란다. 심이 어미다. 기승전결의 기다. 심은 하나다. 어미는 하나다. 방향은 심으로부터 멀어지는 하나의 방향이 존재할 뿐이다.
우리는 방향이 좌우, 상하, 전후로 둘씩 있다고 착각한다. 혹은 동서남북, 사방팔방으로 무수히 많은 방향이 있다고 여긴다. 천만에. 이는 그림을 그리라고 했더니 눈을 옆으로 돌린 것이다. 어미에게서 새끼를 떼놓은 것이다. 관측자가 이동한 것이다. 그 경우 상대성이 적용되어 갈피를 잡지 못하게 된다.
방향은 하나뿐, 어미는 하나뿐, 심은 하나뿐, 기승전결의 기는 하나뿐이다. 반드시 하나의 소실점이 있고, 하나의 출발점이 있고, 하나의 센터, 하나의 축, 하나의 상부구조가 있다. 바로 그것을 찾아야 한다. 그 하나로부터 차차 전개하여 가는 것이 결 따라가는 것이다.
방향이 하나뿐이므로 마이너스는 있고 플러스는 없다. 영어에 ‘가다(go)’는 있고 ‘오다’는 없다. ‘come’은 오다가 아니라 ‘모이다’이며 ‘가다’의 뜻도 된다. ‘가다’와 ‘오다’가 평등한 대칭을 이룬다고 믿는다면 착각이다.
영어에 ‘주다(give)’는 있고 ‘받다’는 없다. accept(잡다), receive(잡다), get(갖다), take(당기다)를 ‘받다’로 번역하지만, 이는 잘못된 것이다. 엄마는 젖을 주고 아기는 젖을 받는다? 천만에. 아기는 젖을 ‘먹는다’가 맞다. ‘메일 보내기’는 있어도 ‘메일 받기’는 없다. ‘메일 읽기’가 맞다.
‘받는다’는 개념은 인간의 편의일 뿐 자연의 법칙은 아니다. 자연에 투수는 있어도 포수는 없다. 능동은 있어도 수동은 없다. 어미는 있고 새끼는 없다. 새끼는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므로 어미의 소속에 포함되기 때문이다. 어미와 새끼를 통일시켜 하나의 기준으로 보는 것이 결 따라가는 것이다.
불어나 독일어는 사물을 암수로 구분하여 모든 단어에다 성별을 붙여놓았다. 해는 남자라 하고 달은 여자라 한다. 책상은 남자라 하고 자동차는 여자라 한다. 남태평양 정글의 부족민들은 모든 사물을 ‘쓸모 있는 것’과 ‘못 쓰는 것’으로 나누어 놓곤 한다. 역시 쓸데없는 분별이다.
결 따라가야 한다. 세상은 오직 에너지가 가는 한 방향으로 풀어야 한다. 새끼 곰이 아닌 어미 곰을 추적해야 한다. 방향성은 하나인데 양방향으로 접근하니 관측자가 이동하여 상대성이 작동함에 따라 뒤죽박죽이 되어버렸다.
화살은 있고 과녁은 없다. 자동차는 있고 주차장은 없다. 빛은 있고 그림자는 없다. 만약 있다면 곧 눈이 돌아간 것이며 어미에게서 새끼를 떼놓은 것이며 이는 사실의 왜곡이다. 과녁이 있는 게 아니라 화살이 과녁으로 쓰는 것이며, 주차장이 있는 게 아니라 자동차가 주차장으로 쓰는 거다.
진보는 있고 보수는 없다. 빛은 있고 그림자는 없다. 빛은 입자가 있으므로 에너지가 있다. 그림자는 입자가 없으므로 에너지도 없다. 진보는 분명한 방향성이 있으나 보수는 진보에 대해 상대적으로 기능할 뿐이다. 진보는 절대어, 보수는 상대어다. 상대어는 과학어가 아니므로 학문하는 이가 쓸 수 없는 단어다.
빠르기는 있어도 느리기는 없다. 길이는 있어도 짧이는 없다. 무게는 있어도 갑게는 없다. 크기는 있어도 작기는 없다. 밀대는 있어도 당길대는 없다. 있는 것을 있다고 하고 없는 것을 없다고 해야 한다.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보는 힘을 길러야 한다. 어미와 새끼를 분별하지 말고 통짜덩어리로 보아야 한다.
결 따라가면 이긴다. 결을 읽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 방향성은 하나인데 두 방향으로 착각하므로 헷갈려서 결을 못 읽는다. 사물에 성별은 없는데 쓸데없이 사물에다 성별을 가져다 붙이므로 헷갈려서 결을 읽지 못한다. 책상은 남자가 아니고 자동차는 여자가 아니다. 해는 남자가 아니고 달은 여자가 아니다.
이러한 자연의 사실을 철두철미하게 받아들일 자세가 되어 있는가? 있는 그대로의 진리를 받아들일 마음의 자세가 되어 있는가? 눈 돌리지 않고 정면으로 직시하여 손가락을 그릴 자신이 있는가? 만약 독자 여러분께 그러한 배짱이 있다면 필자의 계획에 참여하여 주기 바란다.
학문은 인류의 공동작업이다. 그 방법은 소통이요, 그 수단은 언어다. 그런데 인간의 언어가 자연의 사실과 맞지 않다. 인류는 첫 단추를 잘못 끼웠다. 사상과 이념을 논하기에 앞서 언어가 틀렸다. 틀린 언어로 논쟁하니 결론이 날 리가 없다. 누구도 이 사태를 수습하려 들지 않았다.
잘못임을 알았거든 바로잡아야 한다. 과감하게 ‘처음부터 다시!’를 외쳐야 한다. 필자는 인류의 학문하는 시스템 전반을 뒤집어엎어 버리고 처음부터 새로 시작하고자 한다. 기승전결의 기에 서고자 한다. 어미 곰부터 잡고자 한다. 언어부터 바로잡고 다시 시작하자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