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혁명이 온 유럽의 옛 체제를 파괴로 이끌어간다고 주장한 에드먼드 버크의 「프랑스 혁명 성찰」과 프랑스군 점령하의 베를린에서 나라와 민족의 자부심을 절절한 호소한 요한 피히테의 연설 「독일 국민에게 고함」을 한 권에 담았다.
보수주의의 고전으로 꼽히는 「프랑스 혁명 성찰」은 에드먼드 버크가 영국의 프랑스혁명 지지자들을 비판하고, 동시에 영국에 대한 그 영향으로부터 지배층을 사상적으로 무장시킬 의도로 자신의 정치적 경험과 변설, 수사의 힘을 모두 쏟아 쓴 글이다. 정치인식에 깊게 뒷받침된 이념으로서 강한 논리성과 설득력을 갖춘 그의 글은 점차 유럽 근대 정치사상사의 고전으로서 부동의 지위를 차지하게 된다.
요한 피히테의 연설 「독일 국민에게 고함」은 프랑스문화에 대한 독일인·독일문화의 우수성을 설명하고 이것을 국민들에게 알려 국민정신을 함양하는 것이 당시 독일을 재건하는 지름길이라고 역설하는 명연설이었다. 그의 주장에 들어 있는 민주주의적·공화주의적 요소 때문에 이 강연 내용을 담은 책의 재발간이 금지되었지만, 칸트의 순수이성·실천이성과 결합하여 지식학 또는 칸트체계를 완성한 그의 철학 사상이 그대로 담긴 연설은 오늘날에도 명연설로 꼽히고 있다.
에드먼드 버크「프랑스혁명 성찰」
버크는 「프랑스혁명 성찰(1790)」에서, 건설적인 이상들에 대한 공감을 결했기 때문에 프랑스혁명이 보다 결실 있고 영속적인 가능성들을 보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그는 ‘인간의 권리’와 민중통치라는 혁명의 개념들을 집중 겨냥하여 추상적이고 단순한 수의 지배에 바탕을 둔 민주주의가 세습귀족들의 책임 있는 리더십에 의해 통제되고 지도되지 않을 때 일으킬 위험들을 역설한다.
나아가 그는 혁명가들의 합리주의적·이상주의적인 기질 전체에 도전한다. 단순히 사회질서를 무너뜨리고 있다는 이유만은 아니었다. 그는 혁명의 도덕적 열기와 정치 재건이라는 거창한 투기적 계획들이 전통 가치들을 평가절하하고 애써 얻은 사회의 물질적·정신적 자원들을 무분별하게 파괴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응하여 그는 영국 헌법의 모범과 가치를 내세운다. 영국 헌법은 전통적인 지혜와 관례, 시효에 의해 얻게되는 권리를 존중하며, 신분과 재산의 계층구조를 수용, 모든 인간적인 공헌의 근본적인 불완전성을 인정한다고 그는 웅변한다.
보수주의의 고전-프랑스혁명 성찰!
버크는 프랑스혁명이 온 유럽의 옛 체제를 파괴로 이끌어간다고 보고 「프랑스혁명 성찰」을 집필한다. 그는 영국의 프랑스혁명 지지자들을 비판하고, 동시에 영국에 대한 그 영향으로부터 지배층을 사상적으로 무장시킬 의도로 자신의 정치적 경험과 변설, 수사의 힘을 모두 쏟아 이 책을 쓴다. 버크는 이 책에서 민주주의는 모두를 수평화하여 사회의 좋은 풍습을 파괴한다고 하고, 사회는 여러 신분을 포함한 ‘다양성 중 통일’이라야 하며, 세습왕정·귀족, 국교인 그리스도교는 없어서는 안되는 것이며, 영국 전통체제는 이 모두를 갖춘 ‘모든 학문·기예·미덕’의 완전체제, 곧 문명사회라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 때문에 「프랑스혁명 성찰」은 혁명 지지자들로부터 강한 반론을 불러와 이후 양자간에 뜨거운 논쟁을 불러온다.
「프랑스혁명 성찰」은 19세기 이후 유럽 지배층이 혁명의 충격에서 다시 일어나고, 또 혁명에 대한 환멸과 보수적 분위기가 확산되면서, 이 책은 보수주의와 낭만주의의 고전으로서 영국뿐만 아니라 프랑스, 독일, 미국에까지도 폭넓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또한 영국에서는 이 책이 개혁론자들조차 이를 지나칠 수 없게 된다. 왜냐하면 버크는「프랑스혁명 성찰」 안에서 19세기의 사상 상황을 날카롭게 내다보고 그것에 대한 처방까지도 제시했기 때문이다. 나아가 그의 주장은 정치인식에 깊게 뒷받침된 이념으로서 강한 논리성과 설득력도 갖추고 있다. 이후 이 책은 역사의 여러 단계를 거치며 저마다 다르게 이해되고, 점차 유럽 근대 정치사상사의 고전으로서 부동의 지위를 차지하게 된다.
영국 정치사상가 에드먼드 버크의 최대명저!
버크(Edmund Burke, 1729~1797)는 1765년 정계에 들어가 휘그당 지도자인 로킹엄경의 비서가 되고, 이듬해부터 1794년까지 하원의원을 지낸다. 버크는 주로 전제화 경향을 굳히는 조지3세와 측근에 대한 비판, 미국 식민지와 화해주장, 아일랜드 해방 등의 의회활동을 펼친다. 국왕과 궁정세력을 비판해 영국의 전통적 혼합정체와 정당정치의 의의를 주장한 「현대불만의 원인고찰(1770)」이나 선거구 유권자의 이익요구를 의원에 강요하는 데 반대하여 일반대표이론을 제창한 「브리스틀연설(1774)」은 그의 걸작이다.
피히테「독일 국민에게 고함」
피히테가 프랑스군 점령하의 베를린에서 감행한 「독일 국민에게 고함」은 나라와 민족의 자부심을 절절한 호소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에게 독일인이 아니더라도 민족이란 무엇인지, 나라 사랑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감동을 끓어오르게 한다.
그는 1807년 12월 13일부터 1808년 3월까지 베를린학사원 강당에선 매주 일요일 저녁, 총 14회 강연한다. 이 강연에서 그는 프랑스문화에 대한 독일인·독일문화의 우수성을 설명하고 이것을 국민들에게 알려 국민정신을 함양하는 것이 당시 독일을 재건하는 지름길이라고 역설한다. 그의 주장에 들어 있는 민주주의적·공화주의적 요소 때문에 이 강연 내용을 담은 책이 오랫동안 재판(再版)이 금지되지만, 예나의 패전에 이은 틸지트(지금의 소베츠크)의 굴욕적인 강화조약으로 나폴레옹의 지배하에 놓였던 당시의 프로이센 및 독일의 상황에서는 오히려 국민정신을 드높여 반격을 준비하는 데 정신적으로 커다란 힘이 된다.
독일 철학자 요한 고틀리프 피히테의 명연설!
그는 실재와 관념이라는 칸트의 이원론을 자아중심의 일원론으로 통일하여 단일한 형이상학적 체계를 세우려 한다. 모든 근원에 자아의 절대적 활동을 내세워 윤리적 색채가 강한 지식학 체계를 세우며, 여기서 자아란 자유로운 행위를 통하여 단적으캷 존재하는 주체를 말한다. 피히테는 실천적·능동적 자아에서 모든 이론적·실천적 근원성을 찾는 것으로부터 출발하여 능동적 자아의 절대화에 이르게 된다. 곧 그의 후기사상 중심이 자아에서 절대자로 옮겨간 것이다. 피히테 철학은 칸트의 순수이성·실천이성과 결합하여 지식학 또는 칸트체계를 완성하려 한 것으로, 흔히 주관적 관념론·실천적 관념론으로 불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