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인간과 사회의 가능성 추구 《소유냐 삶이냐》
에리히 프롬은 신프로이트파, 프로이트 좌파라 불리는 사회심리학자로서, 20세기 정신분석학의 새로운 조류를 대표한다. 그는 프로이트의 자아심리학을 사회심리학으로 확대하여 현대의 부조리와 병폐를 분석 비판하고, 인간의 소외현상을 극복하고자 ‘인간화된 사회’를 제시했다.
《소유냐 삶이냐》는 프롬의 사상세계에 관한 입문서로 적절한 책이다. 저자는 의식적으로 전문적인 학문적 자료를 피하면서 일목요연하고 읽기 쉽게끔, 그가 이전 저술들에서 엄밀하고 장황하게 파고들었던 사유의 과정을 일목요연하게 요약하고 있다. 나아가서 새로운 시각에서 간결한 형태로 자신의 고백의 다양한 단편(斷片)들을 종합하고 있다.
저자의 서술에 따르면 소유적 실존양식은 현대 문명의 화(禍)를 대표하며, 존재적 실존양식은 소외되지 않는 충만한 삶의 가능성을 대표한다. 현대사회는 존재 또는 존재욕구의 유형으로 규정되어 있고, 사회적 행동은 사유재산의 성격으로 규정된다. 이에 맞서는 존재적 양식을 위한 전제들은 무엇보다도 독자성, 자유, 그리고 비판적 이성이다. 소유에 의해서 규정되지 않고 존재에 의해서 규정된 인간은 참 자아에 이르게 되며, 순전히 바쁘다거나 일에 매달린다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내면의 능동성을 전개한다. 그는 자신의 인간적 능력을 진실로 생산적으로 적용할 수 있다. 이런 인간에게는 소유는 결코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에게 사랑은 모든 것이다.
남자와 여자 관계 그 근원 탐구 《사랑한다는 것》
프롬은 《사랑한다는 것》을 출간한 이후에 두 가지 사건으로 흔들렸다. 하나는 아내가 유방암에 걸려, 암을 남몰래 삶을 위협하는 역학을 따르는 병으로 인식한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당시 첨예화하는 냉전과 핵 군비 증강이었다. 특히 1960년대 초 쿠바사태는 프롬이 갖고 있는 인간의 일차적 사랑의 능력에 대한 믿음을 뒤흔들어놓았다. 그의 절망은 당시 쓴 편지에 잘 드러난다.
“인류 다수가 삶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이 전쟁의 위험에 그토록 수동적이라는 생각이 갑작스레 떠올랐습니다.”
나치로부터 달아난 프롬은 이제 핵전쟁에서 도피해야 하는 상황을 맞았다. 그러나 핵전쟁의 오염을 전이하는 암세포처럼 인식한 프롬은 다양한 방식으로 사랑의 능력의 집단적 상실에 대한 저항에 나섰다. 《사랑한다는 것》은 그 첫걸음이라고 할 수 있는 대표작이다.
생명의 철학, 처연한 자유의 외침 《자유에서의 도피》
《자유에서의 도피》에서 그는 나치즘의 분석에 주안을 두면서 현대사회에 있어서 ‘자유’의 문제, 메커니즘에 의한 자기소외(自己疎外)의 요인을 밝혔다. 프롬이 미국으로 망명한 후 쓴 저서로, 1941년 출간되었다. 파시즘의 대두 원인을 사회?경제적 측면뿐만 아니라 사회심리학적 측면에서 분석하여 주목을 받았다. 인간이나 어떤 사회계층이 정치·경제적 위기상황에 놓여 있을 때 발생하는 ‘권위주의적 성격’을 마조히즘·사디즘적 측면에서 해명하였다. 그는 파시즘운동에 대하여, 히틀러의 권위에 복종하여 그 희생이 되는 데에서 기쁨을 느끼고, 또 한편으로는 자신보다 열등한 사람, 예를 들면 유대인을 멸시, 학대하여 욕구불만과 열등감을 해소하려는 심리와 행동의 표현이라고 하였다. 개성의 상실로 획일화되어가는 현대사회를 향해서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오직 사랑에서 구원을, 인도주의자 에리히 프롬
프롬이 1967년 미국 잡지 《맥콜스》에 기고한 ‘우리가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라는 글은 인간의 사랑하는 능력을 삼을 사랑하고 살아 있는 것에 이끌리는 특수한 능력(Biophilia)으로 입증하려는 노력이 잘 드러나 있다. “삶이 본질상 성장 과정이고, 완전해지는 과정이며, 통제와 폭력 수단으로는 사랑받을 수 없다면 삶에 대한 사랑은 모든 종류의 사랑의 핵심이다. 사랑은 인간, 동물, 식물 안의 생명에 대한 사랑이다. 삶에 대한 사랑은 추상적인 것과는 아주 거리가 멀고, 모든 종류의 사랑에 포함되어 있는 아주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핵심이다. 자기가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삶을 사랑하지 않는 자는 타인을 원하고 집착할 수는 있지만,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프롬은 부처와 예수,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칼 마르크스, 슈바이처를 비롯한 많은 선인들을 존경하고 그들을 인생의 스승으로 삼았다. 이들 스승에 대한 프롬의 존경과 사랑은 한 인간에 대한 총체적인 신뢰라는 것을 우리로 하여금 새삼 생각하게 해 준다. 그것은 우리가 일직이 알고 있었지만 지금은 거의 잊고 만 것이다. 그것은 곧 인간 전체에 대한 신뢰로 연결되는 것으로, 거기까지 우리를 이끄는 것이 프롬이 지닌 매력이며 그것이 바로 그의 위대함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