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국가로 가장 성공한 베트남
그 애국지도자 호찌민이 늘 머리맡에 두고
읽고 또 읽은 다산 불후의 명저《목민심서》!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
위당 정인보는 다산 정약용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선생 한 사람에 대한 연구는 곧 한국사의 연구요, 한국 근대사상의 연구요, 조선 심혼의 연구이며 전 조선의 성쇠존멸(盛衰存滅)에 관한 연구이다.” 그는 다산의 사상이 한국 근대사상을 형성하는 기초임을 역설한 것이다.
다산은 궁벽한 강진 바닷가 농촌에서 18년 동안 귀양살이를 하며 《목민심서》등 수많은 저서를 남겼다. 1808년 봄, 다산초당으로 거처를 옮긴 뒤 쌓아올린 그의 학문체계는 유교적 정신세계를 전면적으로 이해하고, 이를 아울러서 제도, 법률, 정치, 경제, 국방에까지 이르고 있다. 이 현실적인 근대정신은 경학이나 국가의 통치 이념을 현실사회에 적응시키려는 그의 실학사상에서 나온 것이었다.
다산이 살았던 시대는 조선왕조가 봉건사회에서 근대사회로 옮아가는 과도기였다. 백성들은 연이은 전쟁으로 피폐해졌고 국가에서는 그런 농민에게서 더욱 가혹하게 온갖 세금을 거두어들였다. 다산은 모순과 비리의 늪에 빠진 시대를 고독하고 고통스럽게 살아간 불운한 선각자였다. 그는 권력의 착취와 빈곤 속에서 고통 받는 민중의 참담한 현실을 바라보고 분노했다. 그리고 그 해결책을 찾아 인간과 세계에 대한 새로운 전망을 제시하고, 합리적 제도개혁의 방법을 구체적으로 제안했다. 태풍 속에서 난파 직전인 배의 키를 잡고 승객을 구출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는 선장의 모습을 보여준 그는 한 시대를 살아가는 지식인의 책임과 사명을 다한 본보기가 되고 있다.
《목민심서》를 저술하다!
《목민심서》는 《흠흠신서》 《경세유표》와 더불어 ‘일표이서(一表二書)’라 불리는 정약용의 대표작으로 다산이 학문적으로 가장 원숙해 가던 때에 이루어진 저술이다. 목민관, 즉 수령이 지켜야 할 지침을 밝히면서 관리들의 폭정을 비판한 저작으로 조선 후기 사회경제의 실상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로서 그 가치가 매우 높다.
규장각, 홍문관 등 중앙관서에 몸담았던 다산이 사회 현실에 처음으로 눈을 뜨게 된 것은 서른세 살 경기도 암행어사 시절이었다. 다산은 이 때의 체험과 더불어, 공정과 성실을 다해 다섯 고을 백성을 다스렸던 아버지의 치세술에서 얻은 교훈을 바탕으로 뒷날 《목민심서》를 집필하게 된다.
그는 서문에서 “오늘날 백성을 다스리는 자들은 오직 거두어들이는 데만 급급하고 백성을 부양할 바는 알지 못한다. 이 때문에 백성들이 여위고 곤궁하고 병까지 들어 진구렁 속에 줄을 이어 그득한데도, 그들을 다스리는 자는 바야흐로 고운 옷과 맛있는 음식으로 자기만 살찌우고 있으니 어찌 슬프지 아니한가!” 개탄했다. 다산은 이 책에서 부패가 극에 달한 조선 후기 지방의 사회 상태와 정치실태를 민생문제 및 수령의 근본적인 직무와 결부시켜 아주 자세하게 밝히고 있다.
《목민심서》의 애민애국 다산정신
다산은 그의 저서를 통해 ‘인(仁)·의(義)·덕(德)’을 강하게 주장하고 있다. 그러한 ‘인’의 논의를 경제적인 논의로 전개시킨 것이 곧 《목민심서》이다. 다산은 《목민심서》의 첫머리에서, “다른 관직은 하겠다고 나서도 좋으나 목민의 관직만은 구해서는 안 된다”고까지 말했다. 이렇듯 첫머리에서부터 백성을 다스리는 일이 가장 어렵다는 점을 지적한 다산은 이 책 전체에서 목민관의 행동, 곧 정책집행 담당자로서 지녀야 할 윤리를 강조했다.
다산은 관료로서 국정에 참여할 때부터 이러한 정신문제에 대해서 퍽 고심했으며, 그의 문학작품 속에서도 뚜렷이 나타나 조선 현실에 대해 개탄하는 그의 정신을 엿볼 수 있다.
《목민심서》 각 조의 첫머리에는 지방 수령으로서 지켜야 할 원칙과 규범을 간단명료하게 지적하고, 그 다음에는 제시된 규범들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과 그것들의 역사적 연원을 다루었다. 그리고 그 아래에다 고금을 통하여 이름 있는 사업과 공적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덧붙였다. 다시 말해서 지방관리의 부임에서부터 해임에 이르기까지 전 기간을 통하여 반드시 지키고 집행해야 할 실무문제들을 조항으로 정하고 자신의 심오한 견식과 진취적 견해로써 진지하게 해설해 놓았다.
《목민심서》의 바탕에는 학정을 일삼는 목민관을 응징하며 일하는 백성을 동정하고 사랑하는 다산의 애민사상과, 나라의 부강을 염원하고 외래 침략자를 반대하는 애국사상이 흐르고 있다. 결국 《목민심서》에 나타난 다산의 행정원리는 지방관의 자리에 서서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백성의 편에 서서 관리들의 횡포와 부정부패를 폭로·경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실학의 집대성 다산 개혁사상
다산 정약용은 1801년(순조 1년)부터 18년간 전라도 강진에서 유배생활을 했다. 그는 이 기간 동안 학문연구에 매진했으며, 이를 자신의 실학적인 학문과 사상을 완성시키는 소중한 기회로 활용했다. 또한 많은 제자들을 거느리고 강의와 연구, 저술에 전념할 수 있었다.
다산은 조선사회의 여러 해체현상을 직시하고, 사회개혁을 위한 방향에 몰두했다. 그리고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의식을 가지고 그 문제점들을 찾아 나갔다. 나아가 그는 문제점의 근본 원인을 밝혀내려 했고, 이를 바탕으로 그 문제에 대한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개혁안을 마련하고자 힘썼다. 다산은 정조의 치세였던 자신의 젊은 시절에 한때 관직에 있으면서 직접 개혁정치를 실천하기도 했다. 그러나 생애의 대부분은 개혁 현장에서 멀리 떨어진 상태에서 보냈고, 오랜 귀양살이를 통해 그 무렵 사회의 피폐상을 정확히 파악할 수 있었다. 이로써 그는 이상적이며 참신한 개혁안들을 내놓을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개혁안을 직접 추진할 수는 없었다. 관직에 대한 경험 부족은 그의 개혁안에서 현장성이 떨어지는 문제점을 낳았다. 다시 말해 개혁의 목표와 개혁된 사회상에 대해서는 뚜렷이 제시하고 있지만, 개혁된 사회를 이루기 위한 구체적 방법이나 과정에 대해서는 별다른 대안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이렇듯 실천 가능성에 제한이 있었음에도 정약용은 18세기를 전후하여 조선 사회에서 강력히 제시되고 있던 개혁 의지를 집대성했고, 밀려들어오는 서세동점(西勢東漸) 시대에 개혁의 당위성을 뚜렷이 해주었던 인물이다. 그는 당대의 문제점을 밝혀내는 데 과감했으며, 그 해결을 위해 고뇌하던 청빈의 지식인이었다.
그는 역사관에 있어서도 독특한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백성들의 일상적 생산활동을 통해 과학기술이 발전된다는 관점을 확립했던 것이다. 그리고 역사적 사실의 객관적 이해를 위해 노력했고 그것이 도덕적 가치와는 무관하게 존재하고 있다고 파악했다. 비로소 그는 역사발전의 원동력이 백성에게 있음을 인식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정약용의 사상은 그 무렵 사회가 맞닥뜨려 있던 봉건적 질곡을 극복할 수 있는 뛰어난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오늘날까지도 실학사상의 집대성자이자 조선 후기 사회가 배출한 대표적 개혁사상가로 평가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