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산(寒山)! 문수보살의 현신(現身)으로까지 알려진 이 위대한 시승(詩僧)은 도대체 누구인가? 그가 언제 태어나 언제 죽었는지, 성명이 무엇인지, 어디 출신인지―그의 신분에 관한 것들은 자세히 전해지지 않는다. 단지 천태산(天台山) 취병산(翠屛山)에서 오랫동안 은거했으며, 취병산이 한산이나 한암(寒巖)으로도 불렸기 때문에 스스로 한산 또는 한산자(寒山子)라고 했다는 사실만 전해질 뿐이다.
송본(宋本) 《한산자시집(寒山子詩集)》에 여구윤(閭丘胤)이 쓴 서문이 실려 있다. 그 서문을 보면 여구윤이 태주(台州) 자사로 부임한 지 삼 일만에 천태산 국청사(國淸寺)로 가 한산과 그의 막역한 친구 습득(拾得)을 만났다고 했다. 풍간(豊干) 선사한테서 그들이 현인이라는 말을 들었던 여구윤이 예를 올리자 그들은 여구윤을 꾸짖고는 절 밖으로 나가 버려서 쫓아가라고 영을 내렸지만, 한산은 한암으로 돌아가 굴 안으로 들어갔는데 굴이 저절로 닫혀 버렸고, 습득도 종적이 사라져 찾을 길이 없었다고 한다.
그 시집에는 《습득록(拾得錄)》도 게재되어 있다. 거기에서 “풍간 선사와 한산과 습득은 당나라 태종의 정관(貞觀) 때 있었으며, 차례로 국청사에 자취를 드러냈다.”고 했다. 정관은 당나라 태종 이세민이 627년부터 649년까지 사용했던 연호이므로, 한산은 이 시기에 살고 있던 인물임을 알 수 있다. 또, 한산이 자신의 시에서 친구들 태반이 황천객이 되었다고 탄식한 것으로 미루어 여구윤이 한산을 만났을 때는 한산도 이미 나이가 많이 들었을 것이다. 이 책에 여구윤의 《한산자시집서(寒山子詩集序)》를 수록해 두었으니, 한산과 그의 친구 습득에 대한 상세한 이야기는 그곳을 참고하기 바란다.
《한산자시집》은 어떻게 편찬되었는가? 이에 대해서도 여구윤의 《한산자시집서》를 보면 알 수 있는데,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여구윤이 국청사의] 도교 스님에게 그들(한산과 습득)의 지난날의 행장(行狀: 행적)을 찾도록 영을 내렸으나, 대나무와 나무와 석벽에 쓴 시, 아울러 마을의 농막이나 인가(人家)의 대청 벽에 써 놓은 문구(文句)가 삼백여 수, 그리고 습득이 토지당(土地堂: 토지 신을 모신 집) 벽에 쓴 게송뿐이었는데, [그것들을] 한데 모아 책을 만들었다.”
한산은 자신의 작품에서 자기가 쓴 시가 몇 수인지를 말했다. “오언시가 오백 편이요, 칠언시가 칠십구 편이요, 삼언시가 이십일 편이니, 모두 육백 편이다.” 그렇지만 여구윤이 승려 도교에게 영을 내려 모은 시는 313수뿐이었다. 거의 절반이 사라졌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한산자시집》은 그가 겪으면서 보고 느낀 시, 자연을 읊은 시, 풍속을 읊은 시, 유교와 관련된 시, 도교와 관련된 시, 불교에 관한 시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중에서 특히 불교에 대한 시가 절반 정도이다. 불교의 계율, 교학, 선정(禪定: 삼매), 오도(悟道: 도를 깨달음) 등을 다루었다. 그가 불도(佛道)를 닦아 깨달은 경지를 시로 표현한 작품들이야말로 한산시의 꽃 중의 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가장 핵심적인 시들이 오히려 독자들에게는 제일 난해한 작품이 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깨달음이 일반인들에게는 너무나 먼 경지여서 공감하기 어렵고 낯도 선 까닭이다. 하지만 관심이 있는 독자들이라면 이 선시들에게서 한산시의 백미를 맛볼 수 있을 것이다.
한산은 당나라 때의 몇 안 되는 백화시인(白話詩人)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의 시는 일반 사람들이나 시인들에게는 주목받지 못했다. 난해한 시가 많고, 당시에 서민들이 쓰던 일상어를 시어로 등장시키는 등 파격적인 경우들이 있어 도외시 당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교 사찰의 승려들은 그의 시를 인용하여 법을 설하기도 하고 선의 화두로 삼기도 했다.
청나라 말기의 관리이자 민국(民國) 초기의 정치가 정덕전(程德全)은 당시 발간된 《한산자시집》의 발문에서 한산시를 이렇게 비유했다. “상나라 제기(祭器)와 같고 하나라 솥과 같은 크고 넓은 불구슬(붉은 구슬)이 천년 동안 숨겨졌다 갑자기 [세상에] 드러나니 형상이 기이하고 색채가 다양하여 감히 다가가 바라볼 수 없구나. 청신하고 의미심장하기는 맑은 물로 끓인 태초의 국을 맛보는 것과 같고, 매화꽃을 씹고 빙설(氷雪)을 마시는 것과 같아, 서늘함과 차가움이 사람의 폐부를 맑힌다. 그윽하고 아름답기는 한창 봄날에 꽃잎이 돌무더기에 떨어져 가파른 비탈로 달아나는 것과 같고, 가을에 바위에 선 나무들 잎이 지니 깎아지른 산의 골격이 나타나는 것과 같다. 아주 간략한 음절은 흙 북채로 질장구(흙 틀에 가죽을 댄 장구) 치는 소리와, 거문고·피리·쟁·비파 소리가 머물렀다 끊어졌다 하지만 다 같이 메아리치는 소리를 듣는 것과 같다. 질박하게 도리(道理)를 설명함은 노련한 늙은 농부가 살면서 농사일을 하는 것과 같다. 경지에 대한 출중한 묘사가 텅 빈 곳에서 뿜어져 나옴은 아침에 붉은 산에서 노닐 때 푸른 오동나무에 깃들지 않고 구천(九天: 가장 높은 하늘)에서 기침하고 침을 뱉으니 주옥(珠玉)이 다 쏟아지는 것과 같다.”
필자가 한산시를 처음 접한 때는 십수 년 전이다. 선(禪)에 관한 일화를 다룬 책을 읽다가 거기에 인용된 그의 시 몇 수에 마음이 사로잡힌 적이 있었다. 2011년부터 한시(漢詩)를 공부하기 시작하면서 한국과 중국의 유명한 한시들을 한 수 한 수 읽어 나가다가 문득 예전에 보았던 한산시가 생각나 한산시집을 구해 2013년 초여름부터 읽기 시작했다. 그때 구입한 책이 김재두 편역 《한산자시집》과 김달진 편역 《한산시》였다. 이 두 책을 서로 대조해가며 제1수부터 차례로 읽으면서 각 시의 원문과 번역문과 주석을 꼼꼼히 살피며 작품을 감상했다. 그런데 가끔 미흡하다고 느껴지는 곳이 있어 양에 차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나라에는 참고할 만한 번역서가 더는 없었다. 그래서 다시 영역본(英譯本)을 구입했다. Robert G. Henriks가 번역한 《The Poetry of HAN-SHAN》과 Red Pine이 번역한 《The Collected Songs 0f Cold Mountain》이었다.
이 네 권의 책을 일일이 대조하면서 번역하고 주석을 달고 필자 나름의 감상문을 써나갔다. 그러나 이 책들 중 어느 한 권만으로는 부족한 점이 너무 많다고 생각되었다. 한산은 자기 시에 역사적 사건, 고사(故事), 경전의 내용 등을 인용하거나 암시적으로 나타내는 일이 빈번했기 때문에, 그런 대목의 출전을 밝힌 주석이 없거나 불충분하면 엉뚱한 해석으로 변질되기 일쑤였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위에서 언급한 책은 모두 모자람을 면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달리 방법이 없는 터라 여러모로 아쉬움이 적지 않았지만 그냥 밀고 나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2014년 봄에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한산시는 당나라 때 창작된 작품이므로, 그 당시의 언어에 정통하고 인용한 대목들에 대해 상세히 주석을 달 수 있는 사람은 바로 중국의 학자일 것이다. 그런 사람이 저술한 책을 구할 수만 있다면 막히는 부분마다 물꼬를 틀 수 있을 텐데…….’ 그런 생각에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다행히도 ‘항초(項楚) 저 《한산시주(寒山詩注)》’라는 책이 발견되었다. 누군가가 고맙게도 책의 전부를 복사해서 온라인상에 올려놓았던 것이다. 반가운 마음에 이 책을 컴퓨터에 내려 받아 저장해 두고 그동안 번역한 시를 처음부터 다시 하나하나 점검해 나가기 시작했다. 이 주석서를 바탕으로 각 시를 해석하니 막힘없이 술술 풀려나갔다. 2015년 봄이 막 시작될 무렵에는 마침내 한산시 313수의 번역을 다 마칠 수 있었다. 번역에 크게 도움을 준 《한산시주》의 저자 항초 박사님께 이 기회를 빌려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