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기술규제인가?
표준과 규제는 친구다
필자는 다년간 표준개발자로 활동하다가 국가기술표준원에 들어가 기술규제를 접하면서 표준의 역할 및 의미를 다른 시각에서 이해하게 되었다. 표준은 표준 자체로도 의미가 크지만 표준이 규제의 영역으로 들어가면 그 영향력이 훨씬 더 커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표준만 개발하던 사람이 규제를 배우게 되면서 이 두 영역이 분리하기 어려운 친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규제는 늘어나게 되어있다
환경과 안전에 대한 국민적 요구사항이 늘어남에 따라 자발적이던 비자발적이던 규제가 늘어나고 있고 이와 관련된 산업이 지속적으로 규모가 커지고 있다. 실제로 TBT 통보문이나 입법 발의 건수 등 여러 통계자료에서도 뒷받침되고 있다.
인증은 필요악이다
얼마만큼 안전해야 하는가? 수요자는 당연히 충분히 안전해야 한다고 요구할 것이고, 공급자는 당연히 충분히 안전하다고 주장할 것이다. 이런 수요자와 공급자를 둘 다 만족시키기 위해 제3의 중재자가 자연스럽게 등장하게 된다. 이것이 인증이다. 수요자는 인증제품을 믿게 되고 공급자는 공급제품의 안전성을 보증받게 된다. 그러나 공짜 중재는 없다.
규제 합리화가 필요하다
수요자와 공급자 외에 중재자가 한 명 늘어 총 3명이 되었다. 이 세 명이 사이좋게 지내려면 누군가가 규칙을 정하고 이 규칙을 지키지 않으면 처벌까지 집행하는 더 강력한 힘을 가진 누군가가 필요하다. 이것이 정부다. 이렇게해서 결국 정부까지 끼어들어 총 4명이 되었다. 원래 정부는 심판이므로 앞의 세명과 이해관계가 없었다. 이해관계가 없어야 하는게 원칙이다. 그러나 산업 발달 초기에 민간의 역할을 정부가 임시로 맡게되었고 차츰 민간으로 이양하는 과도기에서 여러 문제점들이 발생하였다. 선수와 심판이 혼재되는 상황이 그것이다. 이 책은, 선수는 선수의 역할을, 심판은 심판의 역할을, 즉, 각자 자기 역할을 자기 본분에 맞게 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게 목적이다. 선수와 심판이 서로를 인정하는 합리적 행동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하는 지를 다양한 사례를 통해 알아본다.
기술규제 독립 선언이 필요하다
필자가 초등학교 시절에 옥수수빵과 우유를 맛있게 먹은 기억이 난다. 이 빵과 우유가 미국 구호물자라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 우리가 배고플 때 도움을 준 국가들에게 감사를 표한다. 필자가 품질경영시스템의 대표적인 국가 표준인 KS Q ISO9001를 많이 참조하였다. 우리나라의 KS 표준 체계가 일본 표준 체계를 많이 참조하였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 우리의 표준 인프라 구축에 도움을 준 국가들에게 감사를 표한다.
기술규제의 틀인 적합성평가의 기본 표준을 살펴보면서 ‘Recognition’도 ‘인정’으로 사용하고, ‘Accreditation’도 인정으로 사용하는 것을 보고 한자권 국가의 용어를 비교해 보니, 기술규제 분야에 합리적 용어 사용이 필요하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현재의 대한민국은 더 이상 도움을 받는 국가라고 보기 어렵다. 오히려 도움을 주는 나라다. 대한민국의 합리적 독립이 필요하다.
기술규제 거버넌스를 정립해야 한다
산업발달 초기는 수출을 장려하기 위해 좋은 품질의 제품을 만들 필요가 있었다. KS 표준이 그 역할을 했다. 아직도 그 역할은 중요하다. 산업이 고도화 되고 대한민국이 개발도상국을 벗어남에 따라 산업진흥과 함께 시스템과 제도의 중요성이 높아졌다. 품질은 기본이 되었고 안전과 환경에 대한 요구사항이 늘어났다. 이는 결국 규제로 만들어지고 있다. 비약적으로 말하자면 표준의 시대는 가고 규제의 시대가 온 것이다.
실제로 규제 안에는 표준 기반의 기술기준이 포함되어 있으며 이를 준수하기 위한 법적 장치인 인증과 적합성평가 도사리고 있다. 기술규제는 표준, 품질, 인증, 적합성평가, 무역을 모두 포함하는 거대한 우산이다. 무역전쟁에 관세보다 기술규제가 훨씬 많이 동원되는 것이 현실이다. 트럼프 시대에 다자간 협상인 WTO의 역할이 제한적이 되었고, 양자간 협상이 중요하게 대두되는데, 이 국가간 협상 테이블에는 표준이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TBT 중심의 기술규제가 올라간다. 이러한 현실에서 국가인프라의 컨트롤 타워를 기술규제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이 책은 어떻게 구성되었는가?
이 책은 답을 제시한다고 보기 어렵다. 오히려 질문을 많이 던진다. 필자는 3년동안 산업통상자원부 국가기술표준원의 기술규제대응국에 있으면서 해답을 찾았다기보다 질문만 잔뜩안고 나왔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3년간 같이 일했던 최고의 기술규제 전문가들과 함께 그 질문을 공유하고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는 실마리들을 많이 발견했다. 이 책은 그런 실마리를 찾을 수 있는 질문을 공유하고자 한다.
이 책의 특징 중에 하나는 정부가 운영하고 있는 규제에 대해서 보다 나은 규제를 만들 수 있는 대안을 제시하고자 한다. 대안을 제시하기 위해서는 그 규제의 정책적 목적을 얼마나 잘 시행하고 있는지에 대한 평가가 필요하다. 이 평가는 정책평가와는 다른 관점이다. 기술규제 만이 가지고 있는 적합성 평가의 관점에서 살펴본다.
기술규제는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가능하면 우리 역사에서 기술규제를 어떻게 적용하였는지 조선왕조실록에서 근거를 찾아 유사점을 고찰하였고 해당 부분을 인용하여 현 시대에 맞게 해석하려고 노력하였다.
기술규제는 행정규제의 하나로써 주로 정부 주도로 시행하는 정책에 포함된다. 기술규제의 세부 내용은 표준, 적합성평가, 인증, 품질, 무역 등과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이들이 기술규제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이 책에서 설명하고 있다.
이 책은 총 3부, 10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 1부 기술규제와 국가 품질 인프라의 기초 (1장~5장)에서는 기술규제, 표준, 적합성평가, 인증, 품질의 개념을 정의하고 이들이 상호작용하며 국가 품질 인프라를 형성하는 원리를 다룬다. 또한 역사적 사례와 현대적 변화를 통해 자발적 표준이 강제적 규제로 전환되는 위계 체계와 디지털 시대의 품질 다변화를 설명한다.
제 2부 글로벌 무역 환경과 기술규제 영향평가 (6장~8장)에서는 무역기술장벽(TBT)의 확산 속에서 WTO TBT 협정의 핵심 원칙을 짚어보고, 국가 간 규제 충돌에 대응하는 기업의 전략을 제시한다. 또한, 신설·강화되는 규제의 부작용을 막기 위한 사전영향평가와, 현실과 맞지 않는 기존 규제를 주기적으로 정비·폐지하는 사후영향평가 제도를 설명한다.
제 3부 글로벌 규제 대응 실무와 미래 전략 (9장~10장)에서는 EU AI법 등 글로벌 규제 동향을 분석하고, 문제 파악과 비용·편익 분석을 통해 규제 리스크를 진단·설계하는 실무 워크숍 과정을 다룬다. 또한, 공급망 실사지침(CSDDD) 등 기후·인권·데이터 주권이 얽힌 복합 규제 시대에 대응하기 위한 국가 차원의 거버넌스와 미래 안보 전략을 제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