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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뽑기 상세페이지

황제뽑기작품 소개

<황제뽑기>

〔자치통감행간읽기〕그 두 번째 이야기!

시대의 권력자, 꼭두각시 황제를 뽑다!

2000년을 아우르는 권력의 이동 경로!
정치적 배경 없는 혈혈단신 고아를 찾아라. - 전한 중신 곽광
권력을 위해서라면 아들 황제도 죽여라. - 북위 호 태후
오직 힘 있는 자만이 천하를 지배하리라. - 제나라 창업자 소도성
우리를 무시하지 마라. 황제라도 죽일 수 있다. - 당나라 환관 소자명

권력의 소용돌이 속에서 꼭두각시 황제의 처절한 울부짖음!
세세생생(世世生生) 다시는 황제 집안에서 태어나지 않기를 바란다. - 남조 송 황제 유준

황제제도의 허점을 간파하여 황제를 조종한 사람들의 이야기
그럴듯한 명분 속에 자신의 이익을 위해 황제를 뽑는 사람들의 이야기

동아시아의 2000년 역사 속에서 황제가 없었던 시대는 단 한 차례도 없었다. 그리고 공식적으로 황제의 무소불위의 권력이 축소된 일도 없었다. 그러나 황제 뒤에서 실제로 정치를 움직인 세력은 끊임없이 변하고 있었다. 절대 권력은 황제에서 황제로 전달된 것이 아니다. 황제를 조종하는 실세들 사이에서 이동되었다. 이 역사를 통해 오늘날 정치를 이끄는 세력들의 생각과 목표를 짐작할 수 있다.


출판사 서평

동아시아 2000년 역사 속에서
황제 위에 군림하는 세력을 집중 파헤친다!

1. 절대불변의 시스템- 황제제도
황제제도는 동아시아 정치제도 가운데 가장 중요한 제도라고 할 수 있다. 역대 왕조를 거치면서 많은 정치제도가 바뀌었다고 하지만 전체적으로 황제제도는 청말(淸末) 신해혁명이 일어나기까지 계속되었다.
그 후 서양의 입헌제도를 수용하고 황제는 사라졌지만 서양의 선거제도를 통해 대통령이라 불리는 최고 통치자를 뽑는다고 해도 정서적으로는 황제적, 제왕적 분위기가 아직도 온존(溫存)한다고 할 만큼 황제제도가 끼친 영향은 오늘날까지도 대단하다.
황제는 사람들의 생사여탈을 쥐고 흔들 수 있는 절대권을 가진 사람이다. 그래서 동아시아에서는 그 막강한 권력을 성인(聖人)이 갖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황제를 성인으로 만들기에 노력해 왔다. 이른 바 ‘제왕학(帝王學)’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면서 발전시켜 온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막대한 권력을 가진 황제가 온전히 그 권력을 스스로 운영할 수 있을 때에만 성인군주(聖人君主)도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표면이 아니라 황제의 뒤를 들여다보면 황제 본인이 절대권을 행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가 황제를 조종하여 그 권력을 행사하는 경우가 너무 많았다. 따라서 어떻게 보면 성인군주론은 허울 좋은 수식일 뿐 실제로 황제의 정치에 적용되기는 어려웠다.
이러한 사실을 구체적으로 접근해 본다면 황제제도의 허구성을 발견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당시 황제를 조종하는 메커니즘을 이해한다면, 과거 황제제도에서 황제를 조종했던 방법이 오늘날의 현대 사회제도 속에서는 어떤 방법이 동원되는 지를 살펴보는 기회를 제공한다.

2. ‘황제 만들기’가 아닌 ‘황제 뽑기’
‘황제 만들기’란 황제의 자격에 모자랄지라도 옆에서 잘 보필하여 성인군자로 만든다는 말인 반면, ‘황제 뽑기’란 내 마음에 들거나 혹은 이 사람이 황제가 되었을 때 자기의 실리(實利)를 계산하여 되도록 내게 많은 이익이 될 사람을 뽑는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물론 그 결정권자가 오늘날과 같이 국민이라면 국민들이 각자의 입장에서 자기에게 유리한 사람을 뽑으려고 하겠지만, 전통시대에는 힘 있는 소수의 권력자들이 자신들에게 유리할 사람을 뽑게 되어 있다. 그러한 점에서 본다면 권력의 이동은 눈에 보이는 황제에게서 황제에게로 이동되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황제를 뽑는 누군가들 사이에서 이동한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예컨대 동진의 강제의 비인 저(褚)씨는 강제가 죽은 뒤에 목제, 애제, 폐제 등 세 황제가 재위하는 동안 수렴청정의 방법으로 황제권을 사용하였다. 황제는 세 사람이 바뀌었지만 권력은 한 번도 저태후의 손을 떠난 일이 없는 경우이다. 따라서 전통시대의 정치를 이해하고자 한다면 표면상 드러난 사람들 보다는 오히려 눈에 보이지 않는 손으로 황제를 조종하거나 대신하는 세력을 찾아내는 것이 가장 핵심일 것이다.
그러나 제아무리 황제를 조종하는 숨은 권력자라도 공식적으로 절대권은 황제만이 가지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권력자는 만에 하나 자신의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는 황제를 선택하게 될까봐 심사숙고를 하게 된다. 즉 황제 선택의 전례에 비추어 원천적으로 자신의 뜻에 거역하지 않을 인물을 고르는데 고심한다. 그래서 자신의 실리를 위해 가차 없이 관례를 무시하고 무리하게 황제를 뽑기도 한다. 그리하여 점점 더 황제를 뽑는 일은 상상을 초월하여 벌어지는 것이다.

3. 황제를 뽑는 방법에는 왕도가 없다.
이《황제뽑기》에서는 전한시대부터 당나라 시대까지 숨은 권력자들의 황제 뽑기를 모아 두었다. 황제를 뽑는 사람들이 제일 먼저 내세우는 명분은 종묘와 사직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대외용 수사에 그칠 뿐 실제로는 자기의 권력을 영속적으로 유지하려는데 목표가 있었다.
맨 처음 전임 황제가 태자를 정하지 않았거나 혹은 정하지 못하고 죽었을 때 후임 황제를 뽑는 일은 중신(重臣)들의 몫이었다. 이들은 외척과 같은 정치적 배경이 없는 인물을 뽑으려고 무던히 노력했다. 여태후의 전력에 비추어 그것이 자기들의 권력을 최대한 보장 받는 방법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힘없는 사람일지라도 일단 황제가 된 다음에는 황제권을 적당히 발동하여 그 중신들을 몰아냈다. 그래서 중신들은 자기가 뽑은 황제에게 쫓겨났다. 그런 점에서 중신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들의 황제 뽑기는 실패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다음으로 후임 황제를 뽑은 세력은 황태후와 그 외척들이었다. 그들은 되도록 직접 정치를 할 수 없는 어린 황제를 뽑아 황태후가 황제의 모후로써 임정칭제하려고 했다. 황제가 아니면서 실제로 조정에 나아가서 정치를 주관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군사력이 없는 태후들의 이러한 행태는 궁궐 내의 정치행각이었다. 궁중 안에서 황제가 결정되는 상황이 계속되자 결국 궁궐의 사정을 제일 잘 아는 환관들이 황제를 뽑게 되는 지경에 이르게 되면서 왕조는 그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그리고 전·후한, 삼국시대를 거치면서 전·후한을 지배해 온 유교적 논리가 쇠퇴하고 사회를 통제하는 규범이 미약해지자 극도의 자유주의가 팽배해졌다. 바로 대분열의 시기로 일컬어지는 위진남북조시대의 도래였다. 이 시기에도 태자를 임명하는 제도는 있었다. 그러나 오로지 형식으로만 존재할 뿐, 그 속을 들여다보면 군사력을 가진 사람이 권력을 오로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당시 군사력을 배경으로 한 권력자는 어떤 명분으로 자기 말을 듣는 황제로 바꿀 수 있을지, 그리고 바꾼 다음에 바꾼 명분을 그럴 듯하게 만들려고 하는데 관심을 기울이기 급급했다. 그것은 군사력을 가지고 현임 황제의 내쫓는 것이며 그들의 쿠데타를 일으키는 명분이다.
하지만 이때 자신이 직접 황제 자리에 나가지는 않는다. 자기에게 황제 자리를 합법적으로 물려주거나 혹은 선양이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왕조를 건국할 수 있게 할 사람을 뽑는다. 황제가 되는 길에 징검다리를 먼저 만들어 스스로 황제가 되는 것의 정당성을 극대화시키는 것이다. 이 방법은 후한시대에 궁정 안에서의 음모만으로 황제 자리에 간다는 것이 한계에 이르렀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나타난 방법이었다.
그러나 무력 역시 한계가 드러났다. 자신의 후계자가 자신과 똑같은 군사력을 유지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후계자들은 군사력을 가진, 경우에 따라서는 삼촌이나 형제에 의해 무참히 죽는 비극이 끊임없이 발생했다. 즉 군사력으로 황제가 됨으로써 누구든지 힘이 있으면 황제 자리를 차지하라고 가르쳐 준 것과 다를 바 없었다.
그래서 후대에 군사력을 가지고 제왕이 된 사람들은 앞 다투어 무치(武治) 대신 문치(文治)를 채택했다. 오랜 무장 세력으로 송 왕조를 세운 조광윤, 명 태조 주원장도 역시 문치주의를 택했다. 우리나라에서도 고려 태조 왕건과 조선 태조 이성계 역시 무장에서 출발했지만 왕조를 일으킨 후에는 하나 같이 문치를 택했다. 이는 “비록 나는 무력으로 나라를 빼앗았지만, 너희들은 무력을 쓰지 말라.”라는 다른 표현일 뿐이었다. 즉 ‘나를 닮지는 말라’는 말이었다.
그 다음으로 당 왕조 시대에 오면서 중신도, 황태후도 황제 뽑기에 참여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군사력을 가진 사람도 불가능했다. 앞의 역사에서 이미 경험한 바에 의해, 비록 그들 모두 결과적으로 보면 황제 뽑기에 실패했고, 그러한 방법으로 황제 뽑기를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권력을 잡는 새로운 세력과 길이 나타났다.
이제 황제는 중신이나, 외척 혹은 무장 세력으로부터 자기의 자리를 지키기 위하여 자기의 하수인인 될 세력을 찾았다. 그것은 자신의 절대권에 도전하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판단되는 바로 환관이었다. 환관은 궁중에서 한낱 심부름을 하는 사람이어서 심부름만 할 뿐 절대로 정치적인 힘을 가지리라고 상상하지도 못하였다. 그래서 황제는 그들을 믿고, 그들은 정치적으로 이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환관은 항상 황제 곁에서 심부름을 하며 황제의 눈과 혀가 되었기 때문에 그들에게 일을 맡기기 시작했는데, 그렇게 해서 조금씩 권력을 맛보기 시작한 환관들은 점점 더 큰 힘을 요구하게 되었고, 결국 군사를 감독하는 직책까지 부여해주고 말았다.
권력에 눈을 뜬 환관들은 다시 황제의 절대권을 조정할 수 있을 만큼의 권력을 키웠고, 이제 그들의 입맛대로 천하를 움직이고자 했다. 그리하여 자신들의 말을 듣지 않는 황제는 죽였고, 후임 황제를 세우는데도 황제의 유서를 환관이 마음대로 고쳐 썼으며, 자신의 말을 따르지 않는 사람은 조정에 있을 수가 없게 조치했다.
환관의 발호는 명대(明代)까지 내려와 영락제가 남경을 공격하면서 환관의 도움을 받았다는 사실로 인해 환관이 크게 득세하였다. 그리하여 환관의 손에서 동창(東廠, 황제의 정보기관)까지 움직였으니, 역시 환관 정치라고 해도 무방하다 할 것이다. 환관은 겉으로는 심부름꾼으로 위장한 황제였던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권력의 중심은 고관(高官)에서 황태후와 외척으로, 다시 무장 세력으로 옮겨졌고 맨 마지막에는 환관에게로 넘어 갔다. 그동안 황제가 없었던 시대는 단 한 번도 없었다. 또 공식적으로 황제의 막강한 권한이 축소된 일도 없었다. 그러나 실제로 정치를 움직인 세력은 이처럼 끊임없이 변하고 있었던 것이다.

4. 역사의 진실을 보기 위하여
역사는 승리자의 전리품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물론 그러한 면이 당연히 있는 점을 감안하여 역사를 보지 않으면 역사를 쓴 사람에게 우롱 당하는 것이다. 그래서 역사 쓴 사람이 자기를 미화하려고 쓴 그 글의 행간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그 행간을 들여다보면 역사를 기록한 사람에게 속지 않는다.
역사 가운데는 칼로 사람을 죽였을 때에 그 죄를 칼에 있는가 칼을 쥐고 있는 사람에게 있는가? 라는 초보적인 질문을 던지면 사람을 죽인 죄는 칼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안다. 그런데 역사에는 칼에다 죄를 주면서 쓰여 있는 경우가 너무 많다.
황제의 권위는 칼보다 더 무섭다. 그 근처만 가도 다치기 쉽다. 그런데 황제를 뽑은 사람은 마치 황제라는 칼을 쥐고 있는 사람처럼 겉으로 나타나지 않은 채 하고 싶은 짓을 다 한다. 그렇게 본다면 황제를 뽑았던 환관들은 한갓 심부름꾼으로만 볼 수 없다. 황제권을 사용하는 환관이 실제의 황제이다. 이것이 진실이다.

5. 역사의 실용학문을 위하여
역사는 과거 사실에서 시간이 흐름에 따라 무엇이 어떻게 변하는 가를 보고자하는 학문이다. 단순한 과거 사실은 쓰레기이다. 우리가 역사에서 이 변화의 경향을 읽어 낼 수 없다면 역사는 아무런 쓸모없는 쓰레기가 될 것이며, 반대로 이 변화의 경향을 파악한다면 이 쓰레기는 재활용되어 명품의 부속품이 될 것이다. 따라서 역사 사실이란 그것을 활용하는 사람에 의해 실용학문이 될 수도, 비실용 학문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황제뽑기》에서는 2천년 동안 변함없이 이어 온 황제제도 속에서 실제로 정치를 움직인 세력을 추적하였다. 모든 권력자들은 과거시대의 핵심 권력자들이 어떻게 권력의 중심에서 멀어졌는지 그 실패의 원인을 찾아 같은 실패를 반복하려 하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고관에서 환관까지 권력의 중심이 이동한 것이 발전인지 아닌지를 분석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사람들은 과거의 실패를 끊임없이 연구하여 같은 과거에 실패한 방법을 되풀이 하여 사용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황제를 뽑는 일이 없는 시대는 없었으나 각 시대별로 황제를 뽑은 부류도 달랐고, 방법도 달랐다는 점에서 역사의 변화를 절감한다.
만약에 이러한 하나의 경향을 현재와 미래에 적용할 수 있다면 오늘날 정치를 이끄는 주도세력과 이념들이 앞으로 어떻게 변모해 갈지 가늠케 한다. 적어도 이 책을 통해 어떠한 방법으로든지 과거에 성공을 거두었다고 해도 그 방법 역시 종래에 가서는 한계에 부딪혀서 실패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기 때문에 정권을 획득하고 유지하는 방법이 이미 과거에 사용했던 것이라면 이는 실패를 자초하는 일임을 인지하게 된다. 같은 방법으로는 다시 정치의 중심에 설 수 없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그러한 점에서 역사는 위대하다.


6. 최고 권력자의 비참한 말로!
권력이란 따뜻한 봄날의 달콤한 낮잠과도 같다. 하지만 그 권력의 말로는 추운 겨울날의 악몽과도 같이 비극적이다.
위진시대의 남조 송에서 소도성이 권력을 장악하고 스스로 새로운 왕조의 주인이 되기 위한 징검다리로 10살의 어린 유준을 황제로 앉힌 일이 있다. 어린 꼭두각시 황제 유준은 2년간 황제 자리를 지키다가 소도성에게 선양했다. 이때 유준은 마지막으로 “세세생생(世世生生) 다시는 황제의 집안에서 태어나지 않기를 바란다.”라는 말을 내뱉었다. 10살짜리 어린 아이의 말 치고는 너무 비장한 말이었다.
또 1644년에 이자성(李自成)의 반란군이 북경에 들어오자, 명나라 마지막 황제 숭정제는 17년간 황제 자리에서 누리던 영화를 뒤로 한 채 자금성 앞에 있는 매산(煤山, 景山)에 올라가 35살의 젊은 나이에 스스로의 목을 맨다. 이때 숭정제는 어린 딸을 안고 “너는 다음 생에는 황제의 집안에서 태어나지 말거라.”라고 말했다. 이 얼마나 처절한 부르짖음인가!
그뿐인가. 청말에 권력을 장악한 서 태후는 스스로 정치를 하다가 동치(同治) 황제가 죽은 후, 1875년 1월에 자신의 4살짜리 조카 광서제를 아들로 받아들여서 황제로 세운다. 그러나 서 태후는 어른이 된 광서제가 자신의 뜻을 거스르자 독살하고 만다.
그리고 1908년 11월에 순친왕 재풍(載灃)의 아들인 3살짜리 부의(溥儀)를 데려다가 양자로 삼고는 다시 황제로 세운다. 이때 황제 자리가 비극을 불러 온다는 것을 경험했던 재풍이 서 태후가 자신의 아들을 후임 황제로 지명했을 때 “왜 하필 너인가?”라며 한탄한 일화도 유명하다.
이렇게 역사에 기록될 만한 비극적인 황제 말고 다른 황제들은 어떠했을까? 그들은 황제 자리에서 스스로의 뜻을 이루고 정말 행복했을지 의문이 든다.
남조 송시대에 환온은 “단 며칠을 살더라도 황제 노릇을 하고 싶구나.”라고 했다. 물론 환온은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그 아들 대(代)에 와서 환초(桓楚)라고 불리는 나라를 세웠지만, 그 끝 역시 비극적이었다. 또 비록 황제가 되고 싶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권력의 언저리에서 태어났기에 죽임을 당하는 경우는 더욱 많아 헤아리기 힘들 정도이다.
여기에서 권력세계의 비정함을 엿보게 된다. 그래도 환온처럼 단 하루를 살더라도 최고 권력자가 되어 보고 싶은 것이 속물적 인간의 욕망인지 모른다. 마치 자기가 타 죽은 것을 모르고 부나비가 불을 향해 달려가는 것처럼 말이다.


저자 프로필

권중달

  • 국적 대한민국
  • 학력 대만 정치대학 박사
    중앙대학교 대학원
    중앙대학교 사학과 학사
  • 경력 2006년 중앙대학교 사학과 교수
  • 링크 공식 사이트

2015.06.22. 업데이트 작가 프로필 수정 요청


저자 소개

지은이 권중달

現 중앙대학교 역사학과 명예교수
現 삼화고전연구소 소장 | 홈페이지 www.tonggam.com

권중달은 중앙대학교 사학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대만 정치대학에 유학하여 「《자치통감》이 한국과 중국의 학술에 끼친 영향」이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76년부터 중앙대학교 사학과 교수를 지냈고, 2006년에 정년퇴임하여 지금은 명예교수로 있다. 또한 2006년에 삼화고전연구소를 설립하여 역사의 대중화를 위한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
권중달은 역사지식의 대중화운동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1997년부터 《자치통감》번역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여 2005년 말에 200자 원고지 8만매 분량인 《자치통감》 전294권을 완역하였다. 그리고 2007년 1월부터 2010년 5월까지 3년 6개월 동안 《권중달 역주 자치통감》 31권과 해설서 《자치통감전》 1권, 전32권을 출간하였다. 그리고 일반 독자를 위해 《자치통감산책》, 《자치통감사론강의》와 더불어 <자치통감행간읽기>시리즈 1탄 《위진남북조시대를 위한 변명》을 펴내는 등 대중들이 역사를 알기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책들을 집필하고 있다.

저서: 《중국근대사상사》, 《역사학연구방법론》, 《자치통감전》,《자치통감산책》,
《자치통감사론강의》(전2권), 《위진남북조시대를 위한 변명》
역서: 《중국사의 새로운 이해》, 《문화대혁명 전후의 중국역사인식》, 《자치통감》(전31권)
《허드슨 강변에서 중국사를 이야기하다》

목차

들어가면서

제1장 전한시대
중신들의 황제 뽑기
제3의 인물을 뽑은 중신 주발
천애고아 유병이를 고른 대장군 곽광

제2장 후한시대
황태후의 황제 뽑기
수렴청정을 하려 한 태후들
능력 없는 염 태후의 욕심
환관의 시대를 열어준 양 태후
환관의 아첨에 사로잡힌 어린 황태후

제3장 삼국에서 진시대
격동하는 시대의 황제 뽑기
쿠데타 세력이 뽑는 위의 황제들
권신 종친에게 폐립되는 오나라 조정
내부분열 속에서 포로가 된 진나라 황제

제4장 남조시대
꼭두각시를 황제로 뽑기
힘 있는 장군이 뽑는 동진의 황제들
옹립한 황제에게 되잡힌 송의 쿠데타 세력
황제 자리를 둘러싼 숙질간의 싸움
왕조를 넘겨줄 사람을 뽑은 소도성
징검다리를 건너 제의 황제가 된 사람들
외국 세력에 의해 세워진 양의 황제들
황제 자리를 빼앗겼다는 진욱의 억지

제5장 북조시대
무장 세력의 황제 뽑기
북위의 군벌 이주씨들의 황제 뽑기
삼촌에게 밀려나는 북제의 황제
세 황제를 죽인 북주의 우문호

제6장 당시대
환관들의 황제 뽑기
환관들이 논의하여 뽑는 황제
마음에 안드는 태자를 폐위시킨 환관들의 싸움
항렬은 상관없이 뽑힌 황제
대를 이어가는 환관의 권력

나오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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