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녕하세요, 유네스코 세계유산(UNESCO World Heritage) 독자 여러분! 오늘은 서구 정신이 탄생한 헬레니즘의 고향, 그리스로 떠나보겠습니다. 여행 가방을 꾸릴 때 우리는 보통 무엇을 챙길까요? 선크림, 편한 신발, 그리고 두둑한 지갑. 하지만 그리스로 떠나는 여러분의 가방에는 제가 세 가지를 더 넣어드리고 싶습니다. 바로 그리스어로 된 세 개의 열쇠입니다. 이 열쇠들은 산토리니의 하얀 골목이나 아크로폴리스의 장엄한 기둥보다 더 깊숙한 곳, 바로 그리스의 살아있는 영혼으로 들어가는 문을 열어줄 것입니다. 한 나라의 진짜 속살은 관광 명소가 아닌 그들의 언어, 특히 다른 언어로는 온전히 옮길 수 없는 고유한 단어 속에 숨어 있습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께 여행꿀팁 대신, 그리스인들의 삶을 지탱하는 세 개의 기둥과도 같은 단어를 소개해 드리려 합니다. 이 세 단어를 이해하는 순간, 여러분의 눈에 비치는 그리스는 이전과 완전히 달라질 겁니다. 자, 준비되셨나요? 테마여행신문 TTN Korea 유네스코 세계유산(UNESCO World Heritage) 시리즈와 함께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멋진 여행을!
▶ 낯선 이는 변장한 신일지니, 필록세니아(Φιλοξενία, Philoxenia) : 첫 번째 열쇠는 ‘필록세니아’입니다. 아마 그리스를 여행하다 보면 호텔이나 식당 간판에서 이 단어를 심심찮게 발견할 수 있을 겁니다. 대부분의 사전은 이 단어를 ‘환대(Hospitality)’라고 번역하지만, 이건 마치 김치를 ‘매운 발효 배추(Spicy Fermented Cabbage)’라고 설명하는 것과 같습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 안에 담긴 깊은 맛과 정서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립니다.
▷ ‘낯선 이를 향한 사랑’의 정의 : 필록세니아는 단순히 친절을 베푸는 행위가 아닙니다. 이 단어는 ‘사랑’을 의미하는 ‘필로스(Philos)’와 ‘이방인, 낯선 이’를 뜻하는 ‘크세노스(Xenos)’의 합성어로 문자 그대로 ‘낯선 이를 향한 사랑’ 또는 ‘이방인의 친구’를 의미하죠. 이는 돈을 내고 서비스를 받는 현대 관광 산업의 상업적인 환대와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필록세니아는 도덕률이자, 수천 년간 그리스인들의 정신에 각인된 삶의 방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크세니아(Xenia)를 위반한 대가, 트로이 전쟁(Τρωϊκός Πόλεμος) : 필록세니아의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고대의 신성한 관습인 ‘크세니아(Xenia)’와 마주하게 됩니다. 크세니아는 단순한 예의가 아니라, 신들의 왕 제우스가 직접 관장하는 사회적 계약이자 종교적 의무였습니다. 당시 제우스는 ‘크세니오스 제우스(Zeus Xenios)’, 즉 ‘이방인의 수호자’라는 별칭으로 불릴 정도였죠. 이 신성한 법률에는 아주 구체적인 규칙이 있었습니다. 집주인은 손님의 이름이나 신분을 묻기 전에 먼저 목욕할 물과 음식, 잠자리를 제공해야 했습니다. 손님 역시 예의를 갖추고 주인에게 부담을 주지 않을 의무가 있었죠. 이 관계는 일회성으로 끝나지 않고, 세대를 이어가는 상호 책임의 약속이었습니다. 고대 그리스 세계는 오늘날처럼 호텔 체인이나 교통 인프라가 갖춰지지 않은, 낯선 이에겐 위험하기 짝이 없는 곳이었습니다. 이런 환경에서 크세니아는 도시국가(Polis) 간의 무역, 외교, 정보 교류를 가능하게 한 필수적인 사회 안전망이었습니다.
이 약속을 어겼을 때 어떤 끔찍한 결과가 초래되는지는 그리스인이라면 누구나 아는 이야기, 트로이 전쟁(Troy戰爭, Τρωϊκός Πόλεμος)이 보여줍니다.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는 스파르타의 왕 메넬라오스(Menelaus)의 집에 손님으로 머물면서 그의 아내 헬레네(Helen)를 데리고 달아나 크세니아의 규칙을 정면으로 위반했습니다. 이는 메넬라오스 개인에 대한 모욕을 넘어, 이방인의 수호자인 제우스에 대한 신성모독이었고, 결국 10년간의 끔찍한 전쟁을 불러왔습니다. 고대 작가들이 기원전 12세기 또는 13세기의 일로 기록한 이 전쟁 이야기는, 크세니아라는 사회적 약속이 얼마나 중요했는지를 뼈저리게 보여주는 서사시인 셈입니다.
▶ 일에 담긴 영혼의 조각, 메라키(Μεράκι, Meraki) : 두 번째 열쇠는 ‘메라키’입니다. 이 단어는 아마 여러분이 그리스에서 맛본 최고의 음식, 가장 아름다운 공예품, 그리고 가장 따뜻했던 순간의 비밀을 풀어줄 겁니다. 메라키는 어떤 일을 할 때 ‘영혼과 창의성, 사랑을 다해 임하는 것’, 즉 ‘자신의 일부를 그 안에 쏟아 붓는 행위’를 의미합니다. 단순히 일을 잘하는 것을 넘어, 그 일에 자신의 정수를 불어넣는 것이죠. 어원적으로는 ‘사랑으로 하는 일’을 뜻하는 튀르키예어 ‘메락(Merak)’에서 유래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메라키의 중요한 특징은 완벽함이 아닌 과정에 초점을 맞춘다는 점입니다. 스토아 철학이나 선(Zen) 불교의 이상처럼 감정을 배제한 채 무결점의 결과물을 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적인 실수나 불완전함까지 끌어안는 창조의 과정 자체에서 기쁨과 의미를 찾는다는 거~!
▶ 주체할 수 없는 존재의 환희, 케피(Κέφι, Kefi) : 마지막 열쇠는 ‘케피’입니다. 만약 필록세니아가 그리스인의 따뜻한 심장이고 메라키가 그들의 영혼이 깃든 손이라면, 케피는 억누를 수 없이 터져 나오는 그들의 뜨거운 피와 같습니다. 케피(Kefi)는 영어의 ‘재미(Fun)’나 ‘행복(Happiness)’ 같은 단어로는 도저히 담을 수 없는 감정입니다. 이는 이성과 통제를 넘어, 주체할 수 없는 기쁨과 열정, 희열이 온몸을 지배하여 물리적인 표현을 요구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모든 억압과 근심을 순간적으로 날려버리고 온전히 현재에 몰입하는 경지이죠. 케피는 혼자 느끼는 감정이라기보다는, 사람들 사이에서 전염되고 증폭되는 집단적인 에너지에 가깝습니다. 음악과 춤 속에서 ‘나’와 ‘너’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우리’라는 거대한 환희의 파도에 휩쓸리는 경험, 그것이 바로 케피의 본질입니다. 중요한 것은, 케피가 반드시 좋은 상황에서만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오히려 힘든 시기에도 기어이 기쁨을 찾아내고야 마는 그리스인들의 불굴의 생명력, ‘그리스 정신(Spirit Of Greece)’ 그 자체를 상징합니다.
▷ 신성한 ‘엑스타시스(Ekstasis)’에서 세속의 기쁨으로 : 이토록 강렬한 감정의 뿌리는 어디에 있을까요? 그 흔적은 고대 그리스의 가장 이질적이고 매혹적인 신, 바로 술과 풍요, 그리고 종교적 황홀경, 즉 ‘엑스타시스(Ekstasis)’의 신 디오니소스(Dionysus)에게서 찾을 수 있습니다. 디오니소스를 섬기는 제의(Dionysian Mysteries)는 이성적인 올림포스의 다른 신들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신도들, 특히 여성 사제인 마이나데스(Maenads)는 술과 격렬한 음악, 춤을 통해 무아지경에 빠져들었고, 사회적 규범과 자아의 굴레에서 벗어나 신과 합일되는 해방감을 맛봤습니다. 이는 파괴적일 만큼 강렬하고 카타르시스를 안겨주는 변혁적인 경험이었습니다.
이 고대의 광적인 해방의식은 현대에 와서 한 가지 유명한(혹은 악명 높은) 전통으로 그 흔적을 남겼습니다. 바로 접시 깨기!! 이 행위는 넘쳐흐르는 케피를 주체하지 못해 폭발시키는 감정 표현의 한 방식이었습니다. 물론, 2025년 현재 아무 식당에서나 접시를 깰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1969년 안전 문제로 금지된 이후, 지금은 결혼식이나 일부 관광객을 위한 타베르나에서 특수 제작된 석고 접시를 사용하는 정도로 명맥만 유지하고 있죠. 대신 꽃을 던지는 문화가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접시가 아니라, 그 안에 담긴 폭발적인 케피의 정신일 것입니다.
▶ 당신의 오디세이아가 시작되는 곳, 그리스 : 이제 여러분의 손에는 그리스의 심장으로 들어가는 세 개의 열쇠, 필록세니아, 메라키, 케피가 들려 있습니다. 이 세 단어는 제각기 존재하는 개념이 아니라, 그리스인의 삶이라는 아름다운 직물에 씨실과 날실처럼 촘촘히 얽혀 있습니다. 필록세니아의 마음으로 당신을 맞이한 주인은 메라키를 담아 음식을 내어줄 것이고, 그 음식을 나누는 자리의 기쁨은 어느새 모두의 케피로 폭발할지 모릅니다. 그러니 부디 이번 그리스 여행에서는 수동적인 관찰자가 아닌 능동적인 참여자가 되어보시길! 낯선 이의 미소에서 필록세니아를 읽어내고, 정성껏 만든 음식에서 메라키를 맛보며, 광장에 울려 퍼지는 음악에 몸을 싣고 케피의 파도에 올라타신다면? 그것이야말로 여러분이 그리스에서 가져올 수 있는 가장 값진 기념품이 될 것입니다.
그리스에는 이런 속담이 있습니다. “좋은 날은 아침부터 알아본다(Η Καλή Μέρα Από Το Πρωί Φαίνεται, I Kalí Méra Apó To Proí Fénete)”. 그리스의 영혼을 이해하는 이 세 개의 열쇠와 함께 여행의 ‘아침’을 시작하는 여러분의 여정은, 분명 그저 ‘좋은 날’을 넘어 평생 잊지 못할 눈부신 나날들로 채워질 것이라 확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