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녕하세요, 유네스코 세계유산(UNESCO World Heritage) 독자 여러분! 오늘은 풍차의 나라(The Land of Windmills), 네덜란드로 떠나보겠습니다. 네덜란드를 이해하려면 운하와 미술관 너머, 그들의 상호작용을 지배하는 보이지 않는 3가지 ‘사회적 소프트웨어’를 들여다봐야 합니다. 바로 사람 사이의 온기를 만드는 네덜란드식 아늑함 헤젤러흐하이트(Gezelligheid)와 물과의 싸움이 빚어낸 합의의 정신 폴더르모델(Poldermodel), 그리고 네덜란드식 실용주의, 헤도헌(Gedogen)까지! 이 세 개의 열쇠로 네덜란드의 심장 헤젤러흐하이트부터, 네덜란드의 정신 폴더르모델, 그리고 네덜란드의 영혼 헤도헌을 차례로 열어보는 여정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테마여행신문 TTN Korea 유네스코 세계유산(UNESCO World Heritage) 시리즈와 함께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멋진 여행을!
▶ 사람 사이의 온기를 만드는 네덜란드식 아늑함, 헤젤러흐하이트(Gezelligheid) : 네덜란드 생활에 대해 이야기할 때 ‘헤젤러흐하이트’라는 단어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이 단어는 한국어나 영어로 완벽하게 번역되지 않는, 네덜란드 문화의 정수와도 같은 개념으로 아늑함, 친밀함, 정겨움, 즐거운 분위기 등 여러 단어를 동원해도 그 전체적인 느낌을 담아내기 어렵습니다. 헤젤러흐하이트는 만질 수 있는 물건이 아니라, 경험해야만 알 수 있는 ‘감정’이자 ‘분위기’ 그 자체이기 때문이죠!
헤젤러흐하이트(Gezelligheid)의 어원은 ‘동료’ 또는 ‘친구’를 의미하는 ‘헤젤(gezel)’에서 왔습니다. 이는 헤젤러흐하이트가 근본적으로 사회적인 개념임을 시사합니다. 가장 중요한 특징은 혼자서는 결코 ‘헤젤릭(gezellig)’할 수 없다는 거! 독일어 ‘게뮈틀리히(gemütlich)’는 혼자서도 아늑하고 편안한 상태를 즐길 수 있지만, 헤젤러흐하이트는 반드시 다른 사람과의 교감이 필요하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친구와 맥주를 마시거나, 가족과 저녁 식사를 하는 것, 이 모든 것이 헤젤릭할 수 있답니다.
▷ 헤젤러흐하이트 vs. 한국의 정(情) : 자, 이쯤 되면 많은 독자 분들이 ‘그거 우리나라의 정(情)이랑 비슷한 거 아니야?’라고 생각하실 겁니다. 표면적으로는 비슷해 보이지만, 두 개념의 본질은 상당히 다릅니다. 한국의 ‘정’은 집단주의 사회의 ‘우리’라는 강력한 유대감 속에서 오랜 시간과 관계를 통해 형성되는 깊고 끈끈한 감정입니다. 그것은 공유된 역사와 상호 간의 책임감에 기반을 둔, 때로는 말로 표현되지 않는 강력한 결속력입니다. 반면, 네덜란드의 헤젤러흐하이트는 극도로 개인주의적인 사회가 보편적인 연결의 욕구를 해결하기 위해 고안해낸 문화적 장치에 가깝습니다. 이것은 깊은 사전 관계나 의무 없이도, 그 순간의 따뜻하고 즐거운 분위기를 ‘적극적으로 만들어내는’ 행위란 차이가 있습니다.
▶ 물과의 싸움이 빚어낸 합의의 정신, 폴더르모델(Poldermodel) : 네덜란드를 이해하는 두 번째 열쇠, ‘폴더르모델’의 기원을 찾으려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물과의 싸움으로 점철된 그들의 역사를 봐야 합니다. 네덜란드 국토의 상당 부분은 바다를 막아 만든 간척지, 즉 ‘폴더르(polder)’이며 해수면보다 낮은 곳에 위치합니다. 중세 시대, 이 낮은 땅에서 살아남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모두가 협력하는 것이었습니다. 농부, 귀족, 상인 할 것 없이 모두가 제방을 쌓고 물을 퍼내는 데 힘을 합쳐야 했습니다. 단 한 명이라도 자신의 의무를 소홀히 하면 마을 전체가 물에 잠기는 재앙을 맞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실존적 위협은 네덜란드인들의 DNA에 대화와 타협, 그리고 만장일치에 가까운 합의를 중시하는 문화를 각인시켰습니다. 이것이 바로 모든 이해 당사자가 동등한 발언권을 갖고 합의를 통해 의사 결정을 내리는 폴더르모델의 원형입니다.
▷ 현대 사회 속 폴더르모델 : 수백 년간 물과 싸우며 체득한 이 방식은 현대 네덜란드 사회를 움직이는 핵심 원리로 자리 잡았습니다. 네덜란드 정치 시스템은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역사상 단 한 번도 단일 정당이 과반을 차지한 적이 없기 때문에, 정부를 구성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여러 정당이 연정을 통해 타협안을 도출해야 합니다. 선거 후 ‘인포르마퇴르(informateur)’라는 중재자가 각 정당의 입장을 조율하며 연정 합의안을 만드는 과정 자체가 폴더르모델의 정치적 구현입니다. 경제 분야에서 폴더르모델의 가장 극적인 성공 사례는 1982년의 ‘바세나르 협약(Wassenaar Agreement)’입니다. 극심한 경제 위기 속에서 노동조합, 경영자 단체, 정부가 한자리에 모여 임금 인상을 억제하는 대신, 노동 시간을 단축하고 일자리를 창출하는 사회적 대타협을 이뤄냈습니다. 이 역사적인 합의는 ‘네덜란드의 기적’이라 불리며 경제를 회생시켰고, 이후 많은 유럽 국가의 모델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합의 정신은 일반 직장에까지 이어져, 회사 파티 장소를 정하는 것과 같은 사소한 일에도 청소 직원의 의견까지 묻는 문화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시간은 오래 걸릴지라도, 이 과정은 구성원 모두에게 결정에 대한 주인의식을 심어주고 변화에 대한 저항을 줄여줍니다.
▷ 폴더르모델 vs. 한국의 빨리빨리 : 폴더르모델의 접근 방식은 속도와 효율을 중시하는 한국의 ‘빨리빨리’ 문화와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폴더르모델은 속도보다 과정과 포용을 우선시합니다. 이로 인해 의사 결정이 더디고, 모두가 조금씩 양보한 결과 누구도 100% 만족하지 못하는 결론에 이르기도 합니다. 반면, 한국의 빨리빨리 문화는 압축 성장의 시대에 강력한 리더십 아래 신속하고 효율적인 결정을 내리는 데 최적화된 방식이었습니다.
▶ 네덜란드식 실용주의, 헤도헌(Gedogen) : 마지막 열쇠인 ‘헤도헌’은 아마도 외국인이 이해하기 가장 어려운 네덜란드적 개념일 것입니다. 이 단어는 ‘법을 집행하는 것이 오히려 더 큰 사회적 해악을 낳을 것이라 판단될 때, 특정 법의 집행을 의도적으로 하지 않는’ 정부의 공식적인 정책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눈감아주기나 무관심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조직화된 관용과 선별적 단속’이라는 체계적인 시스템에 가깝습니다. 즉, 법 집행의 이익이 더 큰 공공의 이익에 양보해야 한다는 의식적인 결정인 셈입니다. 그 기저에는 완벽하게 범죄 없는 유토피아 사회는 비현실적이며, 법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사회적 안녕을 위한 수단이라는 깊은 실용주의 철학이 깔려 있습니다.
▷ 커피숍(coffee shop)에서 마약을?! : 헤도헌의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네덜란드의 마약 정책입니다. 1976년, 네덜란드 정부는 ‘아편법(Opium Act)’을 개정하여 마약을 건강에 미치는 위험도에 따라 ‘소프트 드러그(soft drugs, 예: 대마초)’와 ‘하드 드러그(hard drugs, 예: 헤로인, 코카인)’로 법적으로 구분했습니다. 이는 소프트 드러그 사용자가 하드 드러그의 범죄 세계와 접촉하는 것을 막으려는, 헤도헌 정책의 시작이었습니다. 이 정책의 구체적인 결과물이 바로 ‘커피숍(coffee shop)’ 시스템입니다. 커피숍에서는 엄격한 조건 하에 소량(1인당 5g 미만)의 대마초 판매가 묵인(gedogen)됩니다. 광고 금지, 미성년자 출입 금지, 공공질서 문란 행위 금지 등의 조건이 그것입니다. 하지만 이 시스템에는 논리적 모순이 존재합니다.
바로 ‘뒷문의 역설(backdoor paradox)’입니다. 소비자에 대한 판매, 즉 ‘앞문’은 묵인되지만, 커피숍이 대마초를 공급받는 ‘뒷문’은 여전히 불법이며 단속 대상입니다. 이처럼 명백한 비논리성을 네덜란드 사회가 수십 년간 실용주의라는 이름 아래 감수해왔다는 사실은, 논리적 일관성을 중시하는 한국인 독자에게 매우 흥미로운 지점이 아닐 수 없습니다.
▷ 헤도헌 vs. 한국의 무관용 원칙 : 이 지점에서 네덜란드와 한국의 차이는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한국의 마약 정책은 ‘무관용(zero tolerance)’ 원칙에 기반을 둔 세계에서 가장 엄격한 수준입니다. 특히 한국법은 속인주의를 적용하여, 네덜란드에서 대마초 흡연이 묵인된다 할지라도 한국인이 그곳에서 흡연했다면 귀국 후 처벌받을 수 있습니다. 이는 법철학에 대한 근본적인 시각차를 보여줍니다. 네덜란드의 접근 방식은 결과주의적이고 실용적입니다. 즉, 정책이 현실 세계에서 어떤 결과(피해 감소)를 낳는가로 그 가치를 판단합니다. 반면 한국의 접근 방식은 의무론적이고 절대적입니다. 마약 사용은 그 자체로 비도덕적인 행위이므로, 그 결과와 상관없이 원칙적으로 처벌해야 한다는 입장에 가깝습니다.
▶ 네덜란드인이 스스로 창조한 국가, 네덜란드 : 지금까지 살펴본 헤젤러흐하이트, 폴더르모델, 헤도헌은 각각 독립된 특성이 아니라 서로 긴밀하게 연결된 하나의 시스템입니다. 역사적으로 합의를 이끌어내야만 했던 필요성(폴더르모델)은 높은 신뢰 사회를 구축했고, 이 신뢰는 헤도헌이라는 실용적 모호함을 감당할 수 있는 사회적 자본이 되었습니다. 또한 개인주의 사회 속에서 사람들은 합의된 온기(헤젤러흐하이트)를 소중히 여기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경직된 이념보다 인간 중심의 실용적인 해법을 우선시하는 네덜란드 문화를 가리킵니다.
네덜란드의 평평하고, 질서정연하며,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진 풍경은 그들의 사회를 비추는 거울과 같습니다. 이곳은 끊임없는 협상과 실용적인 노력을 통해 의식적으로 설계되고 유지되어 온 사회입니다. 이러한 네덜란드의 정신을 이보다 더 완벽하게 요약하는 말은 없을 것입니다. “신은 지구를 창조했지만, 네덜란드인은 네덜란드를 창조했노라!(God schiep de aarde, maar de Nederlanders schiepen Nederland/God created the earth, but the Dutch created the Netherland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