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녕하세요, 유네스코 세계유산(UNESCO World Heritage) 독자 여러분! 오늘은 '세상의 끝'을 품은 북유럽의 노르웨이로 떠나보겠습니다. 노르웨이를 제대로 여행한다는 것은 장엄한 피오르드를 유람선으로 둘러보거나 오로라를 찾아 북극권으로 떠나는 것 이상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이 땅의 사람들이 자연과, 서로와, 그리고 자기 자신과 맺는 독특한 관계의 방식을 이해하는 여정입니다. 그리고 그 관계의 핵심에는 영어는 물론 한국어로도 딱 떨어지게 번역되지 않는 세 개의 단어가 있습니다. 이 열쇠로 노르웨이 문화의 DNA를 열고 들어서는 순간, 독자 여러분은 비에 젖은 샌드위치마저 행복의 일부가 되는 바이킹의 후예들의 진짜 영혼을 마주하게 될 것입니다. 테마여행신문 TTN Korea 유네스코 세계유산(UNESCO World Heritage) 시리즈와 함께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멋진 여행을!
▶ 자연 속에 ‘있는’ 기술, 프릴루프트슬리브(Friluftsliv, Free-air life) : 노르웨이 사람들의 자연을 향한 사랑은 각별합니다. 하지만 이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등산’이나 ‘캠핑’ 같은 취미 활동과는 차원이 다른 이야기입니다. 그들의 관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첫 번째 열쇠인 ‘프릴루프트슬리브’의 문을 열어야 합니다. 프릴루프트슬리브는 문자 그대로 ‘자유로운 공기 속의 삶(free-air life)’을 의미합니다. 이 용어는 노르웨이가 낳은 세계적인 극작가 헨리크 입센(Henrik Ibsen, 1828~1906)이 1859년에 발표한 시 ‘고원에서(On the Heights)’에서 처음 사용하며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입센은 외딴 자연 속에서 보내는 시간이 인간의 정신적, 육체적 안녕에 얼마나 중요한 가치를 지니는지를 이 단어에 담아냈습니다.
▷ 법적인 뒷받침, 알레만스레텐(Allemannsretten, The Right to Roam) : 이러한 철학이 단순한 국민 정서에 그치지 않고 사회 시스템으로 작동할 수 있는 데에는 ‘알레만스레텐’, 즉 ‘모든 사람의 권리’라 불리는 법적 장치가 있습니다. 고대부터 내려온 이 관습법은 1957년 ‘야외 레크리에이션법(Outdoor Recreation Act)’으로 성문화되었으며, 모든 사람에게 경작지를 제외한 대부분의 땅을 자유롭게 오갈 권리를 보장합니다. 사유지라 할지라도 숲, 산, 해안가라면 누구나 하이킹을 하고 자연을 즐길 수 있다는 뜻입니다. 가장 가까운 민가에서 150미터 이상 떨어져 있다면 최대 이틀까지는 텐트를 치고 야영하는 것도 허용됩니다.
토지의 사적 소유 개념이 매우 엄격하고 ‘무단 침입’이 중요한 법적, 사회적 경계로 작동하는 한국의 관점에서 보면 가히 혁명적인 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법은 노르웨이인들에게 자연이 특정 개인의 소유가 아닌, 모두가 함께 누리고 책임져야 할 공동의 자산이라는 인식을 심어주었습니다. 물론 이 자유에는 ‘흔적 남기지 않기’, ‘야생 동식물 존중하기’와 같은 무거운 책임이 뒤따릅니다. 자유와 책임이 균형을 이룰 때 비로소 진정한 프릴루프트슬리브가 가능하다는 사회적 합의가 이 법의 근간을 이룹니다.
▶ 단순함 속에서 찾는 사치, 코스(Kos, Cosiness) : 프릴루프트슬리브를 통해 자연과 교감한 노르웨이인들은 다시 실내로 돌아와 그들만의 방식으로 아늑함과 충만함을 만들어냅니다. 그 비밀을 푸는 두 번째 열쇠가 바로 ‘코스(Kos)’입니다. ‘코스(Kos, 발음은 ‘쿠스’에 가깝습니다)’는 안전하고, 따뜻하고, 만족스러운 상태에서 오는 순간적인 행복감을 뜻하는 명사입니다. 이는 종종 다른 사람들과 함께할 때 느끼는 감정이지만, 혼자서도 충분히 경험할 수 있습니다. 코스는 특정한 행위라기보다는 마음의 상태, 즉 소박한 즐거움과 현재에 집중하는 깊은 안녕감을 의미합니다. 노르웨이인들은 이 단어를 일상 곳곳에 붙여 사용합니다. 커피 한 잔의 여유는 ‘카페코스(kaffekos)’,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은 ‘파밀리에코스(familiekos)’, 산장(hytte)에서의 휴식은 ‘휘테코스(hyttekos)’가 됩니다. 계절에 따라서도 그 모습이 달라지는데, 벽난로와 담요로 대표되는 ‘빈테르코스(vinterkos, 겨울 코스)’가 있는가 하면, 긴 백야를 즐기며 피크닉을 하는 ‘솜메르코스(sommerkos, 여름 코스)’도 있습니다.
▷ 코스(Kos, Cosiness) vs 덴마크의 휘게(Hygge) : 여행에 관심 있는 분들이라면 전 세계적으로 유행한 덴마크의 ‘휘게(Hygge)’라는 단어를 들어보셨을 겁니다. 코스는 이 휘게와 비슷하면서도 분명한 차이점을 가집니다. 사실 노르웨이어에도 ‘휘겔리(hyggelig)’라는 단어가 존재하지만, 코스는 보다 노르웨이적인 특색을 담고 있습니다. 코스는 휘게보다 더 자연과 야외 활동(프릴루프트슬리브)에 가깝게 연결되어 있고, 본질적으로 더 사회적이며 소박합니다. 휘게가 잘 꾸며진 미니멀리즘 인테리어의 거실을 떠올리게 한다면, 코스는 스키를 타고 돌아온 뒤 편의시설 하나 없는 소박한 산장(hytte)에서 느끼는 아늑함에 가깝습니다. 코스와 함께하는 음식 역시 와플이나 타코처럼 훨씬 더 캐주얼하고 소박한 경우가 많습니다. 이 비교가 중요한 이유는, 많은 여행자들이 휘게를 통해 북유럽의 라이프스타일을 접했기 때문입니다. 코스를 휘게와 구분함으로써 우리는 노르웨이만의 고유한 정체성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코스는 미학이나 소비주의(적절한 양초나 담요를 구매하는 것)보다는 사람과 자연 환경에 대한 날것 그대로의 연결감 그 자체에 더 집중합니다.
▶ 공동체의 심장 박동, 두그나드(Dugnad, Community Work) : 노르웨이의 강력한 공동체 정신을 이해하기 위한 마지막 열쇠는 ‘두그나드(Dugnad)’입니다. 놀랍게도 이 개념은 한국의 역사 속에도 존재했지만, 지금은 전혀 다른 길을 걷고 있는 한 전통과 깊은 평행선을 그립니다. 두그나드는 공동의 목적을 위해 함께 수행하는 무급의 자발적 노동을 의미합니다. 이 단어는 ‘도움’ 또는 ‘선행’을 뜻하는 고대 노르드어 ‘두그나드르(dugnaðr)’에서 유래했습니다. 두그나드는 2004년 노르웨이 ‘올해의 단어’로 선정될 만큼 그 문화적 중요성이 지대합니다. 하지만 흥미롭게도 이 활동은 완전히 자발적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참여해야 한다는 강력하고 암묵적인 사회적 기대가 존재하며, 불참할 경우 공동체로부터 소외될 수도 있습니다. ‘의무적인 자원봉사’라는 이 역설이야말로 신뢰도 높고 평등한 노르웨이 사회를 이해하는 핵심입니다. 이는 살아 숨 쉬는 사회 계약과 같습니다. 두그나드는 자선 활동이 아닙니다. 공동의 이익에 기여하는 것이 결국 자신의 이익(예를 들어, 내 아이가 놀 더 좋은 놀이터)으로 돌아온다는 상호 이익의 한 형태입니다.
▷ 두그나드 vs 한국의 두레와 품앗이 : 한국에도 공동 노동의 강력한 전통이 있었습니다. ‘두레’는 주로 모내기나 김매기 같은 쌀농사를 위해 성인 남성들에게 부과되었던 의무적인 공동 노동 조직이었습니다. 반면 ‘품앗이’는 신뢰와 개인적 관계를 바탕으로 이웃 간에 필요에 따라 노동력을 자발적으로 교환하는 소규모의 상호부조 활동이었습니다. 노르웨이와 한국의 전통 모두 농경 사회의 필요에서 출발했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두그나드는 두레의 의무적인 사회적 압력과 품앗이의 공동체 형성 정신을 모두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결정적인 차이는 그들의 운명에서 갈렸습니다. 한국의 두레와 품앗이가 급격한 산업화와 도시화 과정에서 대부분 사라진 반면 , 노르웨이의 두그나드는 오히려 더욱 번성하며 현대 사회에 맞게 진화했습니다.
▶ 지금까지 살펴본 세 개의 열쇠, 프릴루프트슬리브, 코스, 두그나드는 서로 분리된 개념이 아닙니다. 이들은 자연과 공동체, 그리고 소박한 만족을 중시하는 노르웨이적 세계관을 이루는 상호 연결된 조각들입니다. 두그나드로 관리된 등산로를 따라 프릴루프트슬리브를 즐기고(하이킹), 저녁에는 산장에서 친구들과 코스를 나누는(소박한 식사) 하루를 상상해 보십시오. 이 세 가지가 어떻게 하나의 삶 속에서 유기적으로 작동하는지 알 수 있을 겁니다. 이제 노르웨이 여행을 준비하는 독자 여러분께 마지막 선물로 노르웨이 속담 하나를 건네고 싶습니다. "Ut på tur, aldri sur(Out on a trip, never sour)". 직역하면 ‘여행(산책)을 떠나면, 절대 시무룩하지 않다’는 뜻입니다. 자연 속에 있는 것이야말로 행복의 근원이자 나쁜 기분을 치유하는 명약이라는 그들의 믿음이 담겨있죠. 이 사랑스러운 격언이 1970년대 노르웨이 어린이 TV 쇼 ‘레케스투에(Lekestue, 놀이방)’를 통해 대중화되었다는 사실은 이 속담을 더욱 정겹게 만듭니다. 이 속담은 단순한 격언이 아니라, 노르웨이를 방문하는 이들을 위한 최고의 여행 조언입니다. 밖으로 나가고, 소박한 기쁨을 찾고, 주변 세계와 연결됨으로써 더 깊은 안녕감을 찾으라는 노르웨이 방식의 삶으로의 초대장인 셈입니다. 부디 이번 여행에서는 노르웨이를 그저 눈으로 ‘보는’ 것을 넘어, 이 세 개의 강력한 열쇠를 통해 온몸으로 ‘느껴’보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