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녕하세요, 유네스코 세계유산(UNESCO World Heritage) 독자 여러분! 오늘은 노래하는 땅(The Land That Sings), 라트비아로 떠나보겠습니다. 지휘자도, 악보도 없이 수만 명의 사람들이 하나의 목소리가 되는 기적을 상상해 본 적 있으신가요? 아이부터 백발의 노인까지, 저마다의 사연이 담긴 전통 의상을 곱게 차려입은 사람들이 리가(Riga)의 메자파르크(Mežaparks) 대공연장에 모여 아카펠라 합창을 시작하는 순간, 공기는 숙연한 전율로 가득 찹니다. 바로 이 순간이 라트비아를 가장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자, 이 나라를 ‘노래하는 땅(The Land That Sings)’이라 부르는 이유입니다. 인구 200만 명이 채 되지 않는 작은 나라, 역사 속에서 늘 강대국들 사이에 끼어 있던 나라가 어떻게 이토록 강렬하고 끈질긴 정체성을 꽃피울 수 있었을까요? 그 답은 거대한 기념비나 화려한 궁전에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삶 속에 살아 숨 쉬는 세 가지 라트비아어 단어 속에 그 비밀이 담겨 있습니다. 이 세 개의 열쇠는 라트비아인들의 공동체 정신과 민족적 자부심, 그리고 자연과의 깊은 교감을 이해하는 문을 열어줄 것입니다. 테마여행신문 TTN Korea 유네스코 세계유산(UNESCO World Heritage) 시리즈와 함께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멋진 여행을!
▶ 어깨를 맞대는 정신, 탈카(Talka/Talka) : 라트비아 사람들의 DNA에는 ‘함께’라는 유전자가 깊이 각인되어 있습니다.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단어가 바로 ‘탈카’입니다. 단순히 ‘공동 작업’이나 ‘자원봉사’로 번역하기에는 그 의미가 너무나 얕습니다. 탈카는 ‘어깨를 맞대는 정신’ 그 자체이며, 공동의 이익을 위해 함께 모여 무언가를 해내는 행위를 통해 소속감과 유대감을 확인하는 라트비아인들의 생존 철학입니다. 독자 여러분은 마을 사람들이 모여 김장을 하는 모습을 떠올리시면 이해가 쉬울 겁니다. 라트비아에서는 김장 대신 마을 공원을 청소하고, 이웃의 헛간을 수리한다는 차이가 있긴 하지만요.
▷ 건초더미에서 시작된 정체성 : 탈카의 뿌리는 고대 발트-슬라브족의 농경문화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건초 만들기, 호밀 수확, 아마포 수확 등 혼자서는 버거운 농사일을 마을 사람들이 품앗이로 해결하던 전통이었죠. 흥미로운 점은 이것이 단순한 노동 교환을 넘어 하나의 사회적 의식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라트비아의 구전 민요인 ‘다이나스(dainas)’에는 탈카의 시작과 끝에 의례적인 노래를 부르고, 일이 끝나면 수혜자가 직접 빚은 맥주와 음식을 나눠 먹으며 축제를 벌였다는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이 전통은 수백 년간 독일 튜턴 기사단(German Teutonic Order)의 지배와 러시아 제국의 농노제(serfdom)를 겪으며 더욱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되었습니다. 외세의 공식적인 권력 구조 밖에서 라트비아인들 스스로 공동체를 조직하고 서로를 돕는 탈카는, 억압 속에서 자신들의 유대를 강화하고 정체성을 지키는 소리 없는 저항의 한 방식이었습니다.
▷ 한국의 ‘두레’와 ‘품앗이’와 비슷하지만! : "이거 완전 우리네 두레, 품앗이 아니야?" 싶으시겠지만, 결정적인 차이점이 있습니다. 한국의 두레와 품앗이가 주로 농업 생산성 향상과 상부상조라는 사회경제적 기능에 집중했다면, 라트비아의 탈카는 문화적 생존과 저항의 수단이라는 차원을 더했습니다. 수 세기에 걸친 독일과 러시아의 문화적 동화 압력 속에서, 라트비아인들은 탈카를 통해 자신들의 언어와 관습을 공유하며 끈끈한 내부 결속을 다졌습니다. 특히 줄어드는 인구 속에서 공동체의 힘을 유지하는 것은 생존과 직결된 문제였습니다. 따라서 이들에게 탈카는 단순한 협동 노동이 아니라, 민족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필사적인 ‘문화적 자기방어’ 행위였던 셈입니다.
▶ 노래로 벼려낸 나라, 지에스무 스베트키(Dziesmu svētki/Song and Dance Celebration) : 라트비아의 심장을 이해하려면 그들의 노래를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노래의 정수가 바로 5년에 단 한 번 열리는 ‘지에스무 스베트키’, 즉 노래와 춤 축제입니다. 이 축제는 단순한 공연이 아니라, 전 세계에 흩어져 사는 라트비아인들까지 한자리에 모이게 하는 ‘민족적 순례’이자 정체성 확인의 성스러운 의식입니다.
▷ 공연을 넘어선 민족적 순례 : 1873년에 시작된 이 축제는 그 규모가 상상을 초월합니다. 일주일간 수도 리가 전역에서 열리며, 4만 명이 넘는 공연 참가자와 50만 명에 달하는 관객이 함께합니다. 2003년 유네스코 인류 구전 및 무형유산 걸작으로 등재된 이 축제는 라트비아인들에게는 올림픽보다 더 중요한 행사입니다. 쿠르제메(Kurzeme), 비제메(Vidzeme) 등 각 지역을 상징하는 깃발을 들고 리가 시내를 행진하는 장엄한 거리 행렬, 수만 명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움직이는 거대한 군무, 그리고 축제의 대미를 장식하는 합동 합창 콘서트는 보는 이의 넋을 빼놓을 만큼 압도적입니다.
▷ 합창으로 제국을 무너뜨리다! 노래 혁명 : 이 축제가 라트비아인들에게 이토록 중요한 이유는 그들의 아픈 역사와 맞닿아 있기 때문입니다. 1987년에서 1991년 사이, 라트비아를 포함한 발트 3국에서는 총 한 자루 없이 오직 노래의 힘으로 소련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한 ‘노래 혁명(Singing Revolution)’, 라트비아어로는 ‘아트모다(Atmoda, 각성)’가 일어났습니다. 소련 점령기 동안, 노래 축제는 체제 선전의 도구로 이용당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라트비아인들은 이 축제를 민족 정체성을 은밀하게 지키는 가장 중요한 통로로 활용했습니다. 금지된 애국가를 부르는 대신, 그들은 교묘하게 상징과 은유가 담긴 노래들을 레퍼토리에 포함시켜 저항의 불씨를 이어갔습니다. 이 노래 혁명의 중심에는 세 곡의 상징적인 노래가 있었습니다.
▶ 숲이 영혼을 만나는 곳, 다바스 사유타(Dabas sajūta/A Sense of Nature) : 라트비아를 이해하는 마지막 열쇠는 그들의 영혼 깊숙이 자리한 ‘다바스 사유타’, 즉 ‘자연을 느끼는 감각’입니다. 이는 단순히 아름다운 풍경을 즐기는 것을 넘어, 스스로를 자연 생태계의 일부로 여기는 깊은 공생의 감각을 의미합니다. 국토의 약 50%가 숲이고, 수많은 호수와 강, 그리고 때 묻지 않은 긴 해안선이 펼쳐진 나라에서는 자연이 멀리 있는 특별한 공간이 아니라 삶 그 자체입니다.
▷ 자연이 곧 신화인 땅 : 이 깊은 유대감은 기독교가 들어오기 전, 고대 라트비아인들의 다신교적 세계관에 그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그들의 신화에서 신들은 자연 현상의 인격화된 모습입니다. 하늘의 신 ‘디에우스(Dievs)’, 어머니와 같은 태양의 여신 ‘사울레(Saule)’, 아버지 같은 천둥의 신 ‘페르콘스(Pērkons)’가 대표적입니다. 더 나아가 세상 만물에는 그것을 돌보는 ‘어머니(māte)’가 있다고 믿었습니다. 대지의 어머니 ‘제메스 마테(Zemes māte)’, 숲의 어머니 ‘메자 마테(Meža māte)’, 바다의 어머니 ‘유라스 마테(Jūras māte)’ 등 모든 자연물에 인격과 신성을 부여한 그들의 세계관은 자연을 정복의 대상이 아닌 경배와 공존의 대상으로 여기게 했습니다.
▷ 하지 축제 야니(Jāņi)와 버섯 채집 : 이러한 ‘다바스 사유타’는 오늘날 두 가지 전통 속에서 가장 생생하게 살아 숨 쉽니다. 첫째는 라트비아 최고의 명절인 하지 축제, ‘야니(Jāņi)’입니다. 매년 6월 23일 밤부터 24일 새벽까지 이어지는 이 축제 기간에 라트비아인들은 도시를 떠나 시골로 향합니다. 여자들은 들꽃으로, 남자들은 떡갈나무 잎으로 화관을 만들어 쓰고, 거대한 모닥불을 피웁니다. 캐러웨이 씨를 넣은 특별한 ‘야뉴 시에르스(Jāņu siers)’ 치즈를 먹고 맥주를 마시며, 밤새 ‘리고(Līgo)’라는 후렴구가 붙는 전통 노래를 부르다 동트는 해를 맞이합니다. 고대인들은 하짓날 밤 자연의 힘이 최고조에 달하며, 물질세계와 영적 세계의 경계가 가장 얇아진다고 믿었습니다. 두 번째는 버섯과 베리 채집입니다. 라트비아인들에게 숲에서 버섯을 따는 행위는 ‘국민적 소일거리’이자 명상과도 같은 의식입니다. 모든 가족에게는 대대로 내려오는 자신들만의 비밀스러운 채집 장소가 있을 정도입니다. 이 전통의 중요성은 2023년, 버섯 채집 문화가 라트비아 국가 무형문화유산 목록에 공식 등재된 사실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 라트비아 여행은 우리에게 한 국가의 진정한 힘이 영토의 크기나 군사력이 아닌, 문화적 뿌리의 깊이와 사람, 그리고 그들이 발 딛고 선 땅과의 유대에 있음을 가르쳐 줍니다. 공동체(탈카)가 함께 모여 정체성의 노래(지에스무 스베트키)를 부르고, 그 노래는 다시 그들을 키워낸 자연(다바스 사유타)을 향합니다. 이 아름다운 순환이야말로 발트해의 작은 거인이 가진 힘의 원천일 것입니다. 라트비아의 오래된 속담이 이 모든 이야기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바람 속의 외로운 나무는 더 쉽게 쓰러진다(Vēja vientuļie koki vieglāk krīt/Solitary trees in the wind more easily fal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