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녕하세요, 유네스코 세계유산(UNESCO World Heritage) 독자 여러분! 오늘은 불곰국(Brown Bear Country) 러시아로 떠나보겠습니다. 모스크바(Moscow) 지하철, 즉 메트로(Московский метрополитен/Moskovskiy Metropoliten)에 처음 발을 들여놓는 순간, 독자 여러분은 낯선 풍경에 놀라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대리석 기둥과 샹들리에로 장식된 역사의 화려함에 한번 놀라고,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오르내리는 러시아인들의 무표정한 얼굴에 다시 한 번 놀라게 되죠. 웃음기 하나 없는 그들의 모습은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차갑고 접근하기 어려운 러시아인’이라는 고정관념을 여지없이 확인시켜 주는 듯 하지만 러시아인의 초대를 받는다면? 그 무표정한 얼굴 중 하나였던 이의 비좁은 아파트에 초대받아 앉아 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주인은 손수 만든 보르시(борщ)를 세 그릇째 권하며 떠들썩하게 웃고, “딱 한 잔만 더!”를 외치며 끝없는 건배를 제안할 것입니다. 이 수수께끼 같은 문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열쇠가 필요합니다. 테마여행신문 TTN Korea 유네스코 세계유산(UNESCO World Heritage) 시리즈와 함께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멋진 여행을!
▶ 영혼의 사용법, 두샤(Душа/Dusha) : 러시아인을 이해하는 첫 번째 열쇠는 ‘두샤’라는 단어에 있습니다. 한국어로는 ‘영혼’이라 번역되지만, 그 쓰임새와 깊이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입니다. 한국에서 ‘영혼’이라는 단어가 주로 종교적이거나 시적인 맥락에서 사용되는 반면, 러시아에서 두샤는 일상의 모든 순간에 살아 숨 쉬는 운영체제와 같습니다.
▷ 문지방을 넘어선 영혼의 궁극적 표현, 환대 : 그렇게 굳게 닫혀 있던 두샤의 문은 당신이 러시아인의 집 문지방을 넘는 순간 활짝 열립니다. 공공장소에서의 냉담함은 눈 녹듯 사라지고, 믿을 수 없을 정도의 따뜻한 환대가 시작됩니다. “오븐에 있는 것은 무엇이든 식탁으로!(Что в печи, всё на стол мечи!/What's in the oven, put it on the table!)라는 속담처럼, 주인은 자신이 가진 가장 좋은 것을 아낌없이 내어놓습니다. 이 극적인 변화는 ‘사생활’에 대한 개념 차이에서도 비롯됩니다. 러시아어에는 본래 영어의 ‘privacy’에 정확히 해당하는 일상 단어가 없었습니다. 구소련 시절 ‘사적인’을 의미하는 ‘차스트니(частный/chastnyi)는 자본주의적 뉘앙스 때문에 부정적으로 쓰였고, 대신 ‘개인적인’이라는 뜻의 ‘리치니(личный/lichnyi)가 주로 사용되었죠. 이는 러시아 문화에서 가장 신성하고 진정으로 ‘사적인’ 공간이 물리적인 집이 아니라 바로 두샤 그 자체임을 시사합니다. 따라서 누군가를 집에 초대한다는 것은 자신의 영혼을 보여주겠다는 매우 의미심장한 제안입니다. 깊은 개인사를 털어놓고, 삶의 본질에 대한 질문을 던지며 밤늦도록 대화를 나누는 것은 사생활 침해가 아니라, 두샤를 교감하는 과정인 것입니다. 러시아인의 집에 초대받았다면 마음껏 영혼의 대화를 나눌 준비를 하시기 바랍니다.
▶ 끝없는 대지가 만든 생각의 스케일, 프로스토르(Простор/Prostor) : 러시아를 특징짓는 두 번째 키워드는 ‘프로스토르’입니다. 이 단어는 단순히 ‘공간’이나 ‘넓음’으로 번역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끝없이 펼쳐진 대지와 그 안에서 자유롭게 노니는 감각, 즉 광활함이라는 ‘느낌’ 그 자체를 의미합니다. 11개의 시간대를 가로지르고 캐나다의 두 배에 달하는 영토를 가진 나라에서 태어난 개념답습니다.
▷ 국가적 서사시, 시베리아 횡단열차 : 러시아인들이 프로스토르를 이해하고 정복하기 위해 벌인 투쟁의 가장 위대한 상징물은 바로 시베리아 횡단열차(Транссибирская магистраль/Trans-Siberian Railway)입니다. 총 길이 9,289km로 세계에서 가장 긴 이 철도는, 1891년 건설이 시작되어 산맥과 영구동토층, 끝없는 원시림을 가로지르는 공학 기술의 기념비입니다. 이 거대한 공사에는 죄수들을 포함한 약 9만 명의 노동력이 동원되었습니다. 시베리아 횡단열차는 단순한 교통 인프라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황제의 왕관에서 가장 소중한 보석’으로 불리며, 혼돈스럽고 무한한 공간에 질서라는 물리적인 선을 그은 것과 같았습니다. 이 철도는 식민지 개척과 자원 수탈, 지정학적 영향력 투사를 위한 도구였으며, 결국 러일전쟁(Russo-Japanese War, 1904~1905)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 프로스토르 vs. 한국의 빨리빨리 : 바로 이 지점에서 한국 독자들은 강렬한 문화적 대비를 경험하게 됩니다. 한국의 ‘빨리빨리’ 문화는 엘리베이터 문 닫힘 버튼을 누르는 사소한 습관부터 경제 개발의 속도에 이르기까지 삶의 모든 측면을 지배합니다. 러시아의 문화는 광활한 공간과 길고 느린 계절의 흐름 속에서 형성되었습니다. 반면 한국의 문화는 좁고 자원이 부족한 반도에서 전쟁의 폐허를 딛고 세계를 따라잡기 위한 처절한 시간과의 싸움 속에서 단련되었습니다. 러시아의 가장 큰 도전 과제가 거대한 ‘공간’을 정복하는 것이었다면, 한국의 과제는 뒤처진 ‘시간’을 정복하는 것이었습니다. 공간과 시간에 대한 이 근본적인 관계의 차이가 수많은 문화적 차이를 낳습니다. 마감 시간에 비교적 여유로운 러시아인들의 태도나 그들의 장기적인 인내력은 프로스토르의 세계에서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반대로 한국의 놀라운 효율성과 서비스 속도, 그리고 그 이면의 사회적 스트레스는 시간이 가장 귀하고 유한한 자원인 문화의 필연적인 결과물입니다. 이 사실을 이해한다면, 러시아의 ‘느림’은 더 이상 답답함의 대상이 아니라 흥미로운 문화적 통찰의 계기가 될 것입니다.
▶ 노동과 휴식 사이, 다차(Дача/Dacha) : 러시아를 이해하기 위한 마지막 키워드는 ‘다차’입니다. ‘도시 외곽에 있는 두 번째 집’을 의미하지만, 단순한 별장 이상의 의미를 지닌 문화 현상이자 삶의 방식입니다. ‘주다’라는 의미의 동사 ‘다바티(давать/davat')에서 유래한 이 단어는, 오늘날 러시아 인구의 거의 절반이 소유하고 있을 정도로 국민적 삶의 핵심을 이룹니다. 다차의 역사는 러시아의 역사를 비추는 거울과 같습니다.
▷ 다차 생활의 의식들 : 주말의 다차는 오감으로 가득한 공간입니다. 숯불에 구워지는 샤슐릭(шашлык)의 냄새, 반야(баня)라 불리는 전통 사우나의 뜨거운 증기, 직접 키운 채소를 수확하는 기쁨, 그리고 겨울을 위해 잼과 피클을 만드는 공동의 노동은 다차 생활을 구성하는 중요한 문화적 의식입니다. 이러한 활동들은 단순한 여가를 넘어 가족 간의 유대를 강화하고 도시화된 러시아인들을 다시 땅과 연결시켜 줍니다. 한국의 주말농장(週末農場)과 비교하면 그 차이가 더욱 분명해집니다. 주말농장이 도시화에 대한 현대적 대응이자 건강한 취미 생활의 일환이라면, 러시아의 다차는 훨씬 더 깊은 역사적, 문화적 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다차는 거대하고 비인격적이며 때로는 억압적인 프로스토르의 공적 세계 속에서 개인이 소유하고 관리할 수 있는 작고 사적인 땅, 즉 ‘나만의 작은 제국’입니다. 그곳은 공적인 갑옷을 벗어 던지고 가족과 신뢰하는 친구들 사이에서 진정한 두샤를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물리적 공간입니다. 결국 다차는 러시아적 모순에 대한 해답입니다. 압도적인 광활함 속에서 영혼이 머물 수 있는 작은 안식처를 개척한 것이죠. 프로스토르가 단련시킨 강인한 인내심은 텃밭에서의 생산적인 노동으로 승화되고, 두샤의 따뜻함은 음식을 나누고 교감하는 시간을 통해 발현됩니다. 다차를 이해하는 것은 러시아인들이 그들의 거대한 땅에서 어떻게 영혼의 집을 가꾸어 왔는지를 이해하는 것과 같습니다.
▶ 광활하고 도전적인 땅 프로스토르(Простор)는 복잡하고 강인한 영혼 두샤(Душа)를 빚어냈고, 그 영혼은 사적인 안식처 다차(Дача)에서 궁극적인 안식과 표현의 자유를 찾습니다. 이 세 가지 개념의 상호작용을 이해하고 나면, 러시아인들의 행동 양식을 설명하는 유명한 속담 하나가 떠오릅니다. “러시아인들은 마구를 채우는 데는 오래 걸리지만, 달리기 시작하면 빠르다(Русские долго запрягают, но быстро едут/Russians take a long time to harness, but they move quickly.). 이 속담은 느리고 신중한 준비 끝에 폭발적인 힘으로 돌진하는 러시아의 국민성을 완벽하게 요약합니다. 독자 여러분이 러시아를 여행할 때 인내심 많고 신중하면서도, 한번 움직이면 누구보다 강력한 그 독특한 러시아식 리듬을 이해하는 데 이보다 더 좋은 길잡이는 없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