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녕하세요, 유네스코 세계유산(UNESCO World Heritage) 독자 여러분! 오늘은 발트 3국(Baltic States)이자, 백로의 땅(Land of Storks) 리투아니아(Lithuania)로 떠나보겠습니다. 많은 분들이 리투아니아를 라트비아, 에스토니아와 묶어 '발트 3국'이라 부릅니다. 발트 3국조차 낯선 여행자에게 이 용어는 리투아니아에 집중할 수 없게 만드는 진입장벽이 되어 버립니다. 리투아니아는 이웃 나라들과 역사의 궤를 같이하면서도, 한때 유럽 대륙에서 가장 거대한 제국을 이루었고, 유럽에서 가장 마지막까지 자신들의 고대 신앙을 지켰으며, 총칼이 아닌 노래로 독립을 쟁취한 아주 '별난' 역사를 간직한 나라입니다. 세 개의 리투아니아어 열쇠와 함께 리투아니아의 영혼을 파헤쳐 보겠습니다. 테마여행신문 TTN Korea 유네스코 세계유산(UNESCO World Heritage)시리즈와 함께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멋진 여행을!
▶ 5천 년의 시간을 봉인한 살아있는 화석(The Living Fossil That Sealed 5,000 Years of Time), 칼바(Kalba, Language) : 리투아니아의 첫 번째 매력은 '듣는 것'이 아니라 '읽는 것'에 있습니다. 바로 그들의 언어, '리투아니아어(Lietuvių kalba)'입니다. 언어학자들은 이 언어를 현존하는 인도-유럽어족 언어 중 가장 '보수적인(conservative)' 언어로 꼽는 데 주저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보수적'이란 '원시적'이라는 뜻이 아니라, 수천 년 전 모든 유럽 언어의 공통 조상 격인 '원시 인도-유럽어(Proto-Indo-European, PIE)'의 특징을 가장 많이 보존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쉽게 말해, 지난 수천 년간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 등 대부분의 유럽 언어들이 엄청난 변화(예를 들어, 게르만어파의 자음 대이동)를 겪으며 원형을 잃어버린 반면, 리투아니아어는 그 원형을 놀랍도록 간직하고 있습니다. 맙소사! 이 언어는 고대 산스크리트어나 고대 그리스어에서나 발견되던 복잡한 문법 구조를 지금도 사용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요?
▶ 유럽의 마지막 이교도, 그들의 심장에 흐르는 자연의 숨결(The Last Pagans of Europe, and the Breath of Nature in Their Hearts), 파고니야(Pagonija, Paganism) : 리투아니아는 아주 독특한 타이틀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로 '유럽의 마지막 이교도 국가(the last pagan country in Europe)'라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이 10세기도 되기 전에 기독교를 받아들인 것과 달리, 리투아니아는 14세기 후반까지 국가적 차원에서 다신교(Lithuanian polytheism) 신앙을 유지했습니다. 왜 이들은 이토록 오래 버텼을까요? 이는 '신앙'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13세기와 14세기, '북방 십자군(Northern Crusades)'이라는 거창한 명분을 내세운 독일의 튜튼 기사단(Teutonic Knights)이 '이교도를 개종시킨다'는 명목으로 리투아니아를 끊임없이 침공했습니다. 심지어 서유럽의 기사들이 '이교도 사냥'을 일종의 '전쟁 관광(war tourism)'처럼 즐기러 올 정도였습니다.
▷ 한여름 밤의 불꽃, 요니네스(Joninės: The Midsummer Night's Fire) : 리투아니아의 이교적 영혼이 현재 어떻게 살아있는지 보고 싶으시다면, 매년 6월 밤(하지)에 열리는 축제 '요니네스(Joninės)'(혹은 고대 이름인 '라소스(Rasos)')에 반드시 참여해야 합니다. 이날 밤, 리투아니아인들은 독실한 가톨릭 신자에서 '자연의 자녀'로 돌아갑니다. "악령을 쫓기 위해(chase away evil spirits)" 거대한 모닥불을 피우고, 양복 입은 할아버지부터 10대 청소년까지 모두가 그 불 위를 뛰어넘으며(fire-jumping) 몸과 마음을 정화합니다. 여성들은 들판에서 꺾은 야생화로 화환(wreaths)을 만들어 머리에 쓰고, 그 화환을 강물에 띄워 사랑과 운명을 점칩니다. 이날 밤 모은 이슬(dew)과 허브는 특별한 치유력을 갖는다고 믿어집니다. 그리고 가장 신비로운 전통은, 일 년에 단 한 번, 이날 밤에만 핀다는 전설의 '양치식물 꽃(mythical blooming fern)'을 찾아 숲을 헤매는 것입니다.
▶ 노래로 자유를 되찾은 불굴의 영혼(The Indomitable Spirit That Reclaimed Freedom Through Song), 아트스파루마스(Atsparumas, Resistance) : 리투아니아를 그저 '발트해 연안의 작은 나라'로만 알고 계셨다면? 지금부터 그 편견을 완전히 깨뜨리셔야 합니다. 15세기, 비타우타스 대공(Vytautas the Great, 1392~1430 재위)시절의 리투아니아 대공국(Grand Duchy of Lithuania, LDK)은 모스크바 공국을 위협하고 튜튼 기사단을 격파하며, 유럽에서 가장 영토가 넓은 국가였습니다. 그 영토는 북쪽의 발트해(Baltic Sea)에서 남쪽의 흑해(Black Sea)까지 이르렀습니다. 오늘날의 리투아니아 본토는 물론,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전역과 폴란드, 러시아 일부까지 아우르는 거대한 다민족(multiethnic), 다종교(multireligious) 제국이었죠. 하지만 이 거대한 제국은 폴란드와의 연방(Polish-Lithuanian Commonwealth)이 된 후 18세기 말 내분과 외세의 개입으로 급격히 쇠락했습니다. 그리고 1772년, 1793년, 1795년 세 차례에 걸친 '분할(Partitions)'로 인해 러시아,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3국에 의해 국토가 갈기갈기 찢겼습니다. 1795년 10월 24일, 리투아니아와 폴란드는 주권 국가로서의 존재를 완전히 상실하고 유럽 지도에서 사라졌습니다. 이 '소멸'은 1918년 독립을 되찾기까지 무려 123년간 지속되었습니다.
▷ 노래 혁명: 세상에서 가장 평화롭고 위대한 승리(The Singing Revolution: The World's Most Peaceful and Greatest Victory) : 1980년대 후반, 리투아니아는 마침내 자유를 되찾습니다. 그런데 그 방식이 기가 막힙니다. 총이나 탱크가 아니라 '노래'로 독립을 이뤄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혁명을 '노래하는 혁명(Dainuojanti revoliucija)'이라고 부릅니다. 라트비아 속담에 "군사력에 맞서 정신력으로(Ar garaspēku pret karaspēku)"라는 말이 있듯, 발트 3국은 금지되었던 자신들의 국가(國歌)와 민족 노래들을 수십만 명이 모인 광장에서 함께 부르는 평화로운 방식으로 저항했습니다. 이 혁명의 정점은 1989년 8월 23일에 찾아왔습니다. 이날은 50년 전(1939년), 나치 독일과 소비에트 연방이 비밀 의정서(Molotov–Ribbentrop Pact)를 맺고 발트 3국을 나눠 갖기로 했던 치욕의 날이었습니다. 바로 그날,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 국민 약 200만 명이 손에 손을 잡고, 리투아니아의 수도 빌뉴스(Vilnius)에서 에스토니아의 수도 탈린(Tallinn)까지 600킬로미터(약 675킬로미터)가 넘는 '인간 사슬(human chain)'을 만들었습니다.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발트의 길(Baltijos kelias)'입니다. 이 평화로운 함성은 1987년 한국의 6월 민주항쟁, 그리고 1919년 비폭력 저항이었던 3.1 운동의 모습과 놀랍도록 닮아 있습니다.
▶ 오늘 소개해 드린 루마니아의 영혼을 여는 세 개의 열쇠, '칼바(언어)', '파고니야(신앙)', '아트스파루마스(저항)'는 결국 '생존'이라는 하나의 단어로 귀결됩니다. 이 나라를 여행한다는 것은 단순한 풍경 감상이 아니라, 한 민족의 영혼이 수천 년의 압제 속에서도 어떻게 자신을 잃지 않고 '살아남았는지'를 목격하는 여정입니다. 리투아니아에는 이런 속담이 있습니다. "Geriau duona sausa namie, negu pyragai svetur."(Better dry bread at home than cakes abroad.). "타향의 진수성찬(pyragai, 케이크)보다 내 집(namie)의 마른 빵(duona sausa)이 더 낫다."라는 뜻입니다. 지난 수백 년간 리투아니아인들은 수많은 '진수성찬'(폴란드의 세련된 문화, 러시아/소비에트의 강력한 힘)을 강요받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목숨을 걸고 자신들의 '마른 빵'—그들의 고집스러운 언어(Kalba), 그들의 숲속 신앙(Pagonija),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지키려는 저항(Atsparumas)—을 선택했습니다. 한국인 여행자에게 리투아니아는 우리와 너무나도 닮은 '잃어버린 쌍둥이'같은 나라입니다. 그들이 그토록 지키고자 했던 '집(Namai)'과 '자유(Laisvė)'의 진정한 의미를, 독자 여러분께서도 빌뉴스 구시가지의 돌바닥과 십자가 언덕의 바람 속에서 직접 느껴보시길 진심으로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