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녕하세요, 유네스코 세계유산(UNESCO World Heritage) 독자 여러분! 오늘은 세계에서 가장 큰 지하 와인셀러 밀레슈티 미치(Mileștii Mici)를 품은 와인의 나라(Country of Wine) 몰도바(Moldova)로 떠나보겠습니다. 몰도바란 국명은 인접한 루마니아 몰도바강(Moldova River)에서 유래했고, 이 때문에 몰도바를 루마니아의 일부로 여기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몰도바는 강대국들 사이의 격동적인 역사 속에서도 라틴계 정체성을 지켜왔으며, 국토 내에 러시아 평화유지군이 주둔하고 있는 미승인 국가 트란스니스트리아(Transnistria)와 튀르크계 기독교인들의 자치지역 가가우지아(Gagauzia)를 품고 있는 복잡다단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유럽의 숨겨진 보석(Europes Hidden Gem) 몰다비아 공국(Principality of Moldavia)의 동쪽으로 떠나보시겠습니까? 테마여행신문 TTN Korea 유네스코 세계유산(UNESCO World Heritage) 시리즈와 함께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멋진 여행을!
▶ 포도, 와인 그리고 노록: 몰도바 사람들은 와인으로 말한다(Grapes, Wine, and Noroc: Moldovans Speak Through Wine) : 몰도바를 이해하는 첫 번째 키워드 노록(Noroc)은 몰도바어(루마니아어)로 행운(Good Luck)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이 단어의 쓰임새는 놀랍도록 다층적입니다. 노록은 아침에 만나면 안녕하세요라는 인사말이 되고, 친구와 헤어질 땐 잘 가라는 작별 인사가 됩니다. 누군가 재채기를 하면 신의 가호가 있기를(Bless you)이라는 뜻으로 "노록!"이라고 외치며, 물론 술잔을 부딪칠 때도 건배의 의미로 "노록!"을 외칩니다. 행운이라는 단어가 이들의 만남과 헤어짐, 건강, 그리고 축하의 모든 순간에 스며들어 있는 것입니다.
▷ 기네스북에 오르다: 세계 최대의 와인 컬렉션을 마시러 가다(Into the Guinness Book: Going to Drink the Worlds Largest Wine Collection) : 몰도바의 와인 스케일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몰도바에는 밀레슈티 미치(Mileștii Mici)라는 국영 와이너리가 있습니다. 이곳은 2005년, 세계에서 가장 많은 병(약 150만 병)을 소유한 와인셀러로 기네스 세계 기록에 등재되었습니다. 이후로도 와인은 계속 추가되어, 2025년 현재 200만 병에 가까운 와인이 황금 컬렉션(Golden Collection) 이라는 이름으로 잠들어 있습니다. 200만 병이라는 숫자보다 더 압도적인 것은 이 와인들이 보관된 공간의 규모입니다. 이 와인들은 석회암 채석장으로 사용되던 지하 터널 에 보관되어 있는데, 터널의 총 길이가 무려 200킬로미터(km)에 달합니다. 이 중 약 55킬로미터가 현재 와인 저장고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200킬로미터...?! 서울에서 대전까지의 직선거리가 약 150킬로미터입니다. 즉, 밀레슈티 미치 지하에는 말 그대로 서울에서 대전까지 뚫을 수 있는 길이의 지하 고속도로가 와인으로 가득 채워져 있는 셈입니다. 이는 단순한 와인 창고가 아니라 지하 제국이죠!
▶ 오아스페치(Oaspeți/Guests): 손님은 왕이 아니라 가족이다(Guests are Not Kings, They are Family) : 몰도바의 영혼을 여는 두 번째 열쇠는 환대입니다. 이를 설명하는 키워드는 오아스페치(Oaspeți), 즉 손님들입니다. 몰도바에서 손님이라는 단어는 단순한 방문객(visitor)이 아니라, 극진한 대접과 보호를 받아야 할 신성한 대상을 의미합니다. 환대는 이들 문화의 선택 사항이 아닌 초석(cornerstone)입니다.
▷ 빵과 소금, 그리고 당신의 신발(Bread, Salt, and Your Shoes) : 몰도바(및 루마니아) 문화권에는 가장 귀한 손님을 맞이하는 뿌이네 쉬 사레(Pâine și sare), 즉 빵과 소금이라는 전통 의식이 있습니다. 전통 의상을 입은 주인이 둥근 빵과 소금을 내밀며 손님을 맞이합니다. 이는 번영과 환영을 상징합니다. 이 의식은 몰도바 환대의 핵심을 보여줍니다. 빵은 생명을, 소금은 가치와 보존을 상징합니다. 고대 사회에서 가장 귀했던 이 두 가지를 손님에게 가장 먼저 내어준다는 것은, "우리 집의 가장 소중한 것을 당신과 나누겠습니다"라는 상징적 계약이자 맹세입니다. 이 빵과 소금의 계약이 체결되는 순간, 손님(Oaspeți)을 맞는 것은 주인의 선택적 친절이 아니라, 반드시 지켜야 할 환대의 규칙(rules of hospitality) 이자 의무가 됩니다. 여기서 한국인 여행자가 기억해야 할 매우 중요한 문화적 차이가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예의상 "아니요, 괜찮습니다"라고 한두 번 사양하는 것이 미덕입니다. 하지만 몰도바에서는 주인이 주는 음식과 와인을 사양하는 것이 오히려 주인의 성의를 무시하는 큰 무례(impolite)로 간주됩니다. 그들의 환대는 거절당하기 위해 베푸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 제국의 교차로에 선 유럽의 경계인(Europes Borderlander Standing at the Crossroads of Empires), 래스크루체(Răscruce/Crossroads) : 많은 서양인들에게 몰도바는 왜 신이 잊은 나라(God forgot about)로 불릴 만큼 인지도가 낮을까요? 그 이유는 몰도바의 정체성이 너무나 복잡하고 비극적인 교차로(Răscruce)에 위치했기 때문입니다. 래스크루체는 말 그대로 교차로 또는 갈림길을 의미합니다. 몰도바의 역사는 제국들의 각축장 그 자체였습니다. 고대 로마(다키아), 훈족과 고트족, 오스만 제국, 러시아 제국(1812년 합병), 루마니아(1918년 통일), 그리고 소련(1940년 재합병) 에 이르기까지, 몰도바는 끊임없이 외세의 지배와 영향을 받았습니다. 이로 인해 몰도바의 정체성은 하나로 규정될 수 없는 녹아든(amalgamated), 절충적인(eclectic) 문화가 되었습니다. 뿌리는 라틴(루마니아) 문화지만, 그 위에 슬라브와 튀르크, 그리고 가장 강력했던 러시아/소련 의 영향이 층층이 쌓여있습니다. 제국의 교차로, 지정학적 위치, 외세의 침략, 강대국 사이에 낀 국가. 이 모든 단어는 한국의 역사를 설명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중국, 일본, 러시아, 미국의 영향을 받아온 한국의 반도 국가 운명과, 루마니아, 러시아(소련), 튀르크 사이에 낀 몰도바의 교차로(Răscruce) 운명은 놀랍도록 닮았습니다.
▷ "우리는 루마니아 사람인가, 몰도바 사람인가?"(Are We Romanian, or Moldovan?) : 몰도바 정체성 혼란의 핵심에는 언어 논쟁이 있습니다. 몰도바 헌법은 공식 언어를 몰도바어(Moldovan)로 규정합니다. 하지만 1991년 독립 선언문은 루마니아어(Romanian)라고 명시했습니다. 몰도바 과학 아카데미 역시 루마니아어가 맞다고 결정했습니다. 언어학적으로 두 언어는 방언 수준의 차이만 있을 뿐 거의 동일(virtually identical)합니다. 그렇다면 이들은 왜 자신의 언어 이름을 두고 싸우는 것일까요? 이는 언어학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학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 유럽에 남은 또 하나의 DMZ: 트란스니스트리아(Another DMZ in Europe: Transnistria) : 교차로의 비극은 과거사가 아니라 현재 진행형입니다. 몰도바 영토 내 드네스트르강 동쪽의 트란스니스트리아(Transnistria) 지역이 그 증거입니다. 1992년 내전 이후, 이곳은 사실상 독립국가(미승인국) 로 기능하고 있습니다. 자체 정부, 의회, 자체 화폐(트란스니스트리아 루블), 그리고 군대까지 갖추고 있습니다. 이곳은 얼어붙은 분쟁(Frozen Conflict) 지역의 전형입니다. 러시아의 강력한 영향력 아래 있으며, 러시아 평화유지군이 주둔 중입니다. 2022년 유럽 평의회(Council of Europe)는 이곳을 러시아의 군사 점령지(military occupation by Russia)로 규정했습니다.
▶ 떠나는 여행자에게, 사람이 그곳을 빛나게 합니다 : 오늘 저는 몰도바를 설명하는 세 개의 키워드, 노록(Noroc, 와인/행운), 오아스페치(Oaspeți, 손님/환대), 그리고 래스크루체(Răscruce, 교차로/역사)를 말씀드렸습니다. 어쩌면 이 세 가지는 결국 하나의 이야기로 통합니다. 수천 년간 거대한 제국들의 교차로(Răscruce) 한복판에서 살아남아야 했기에, 이들은 서로의 행운(Noroc)을 빌어주는 와인잔을 부딪치며 단결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언제 또다시 침략 당할지 모르는 불안한 역사 속에서, 내 울타리 안으로 들어온 손님(Oaspeți) 에게는 빵과 소금을 나누며 모든 것을 내어주는 극진한 환대가 생존의 규칙이 되었습니다. 몰도바와 루마니아에는 제가 가장 사랑하는 속담이 하나 있습니다. "Omul sfințește locul.(Man sanctifies the place.)" 직역하면 "사람이 그 장소를 신성하게(혹은 거룩하게) 만든다."는 뜻입니다. 훌륭한 장소가 사람을 위대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이 그곳에 사느냐에 따라 그 장소의 진정한 가치가 결정된다는 의미죠. 몰도바는 화려한 랜드마크나 거대한 쇼핑몰이 있는 나라가 아닙니다. 하지만 그곳에는 5천 년의 와인을 빚고, 낯선 이에게 빵과 소금을 나누며, 교차로 의 비극을 견뎌낸 사람이 있습니다. 이 미지의 땅을 방문하는 당신이라는 사람(Omul)이, 몰도바라는 장소(locul)를 더욱 빛나고 신성하게(sfințește) 만들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당신의 여정에 행운(Noroc)이 가득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