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녕하세요, 유네스코 세계유산(UNESCO World Heritage) 독자 여러분! 오늘은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국가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바티칸 시국(Vatican City)으로 떠나보겠습니다. 바티칸이란 국명은 고대 로마인들이 티베리스 강(Tiber River) 건너편 언덕에서 미래를 점치던 '예언(prophecy)'을 뜻하는 라틴어 '바티치니움(Vaticinium)' 혹은 '예언의 언덕(Mons Vaticanus)'에서 유래했습니다. 바티칸은 1929년 라테라노 조약(Lateran Treaty)을 통해 이탈리아로부터 완전히 독립된 주권을 인정받은 엄연한 국가이자, 전 세계 14억 가톨릭 신자의 영적 수도(Spiritual Capital)로서 르네상스와 바로크 예술의 걸작들을 품고 있는 인류 문명의 보물창고입니다. 국토 내에 국제법상 주권의 주체인 성좌(Holy See, Santa Sede)와 이를 물리적으로 보조하는 바티칸 시국(State of the Vatican City)이라는 두 개의 실체가 공존하며, 핏줄이 아닌 직무(Jus Officii)에 의해 시민권이 부여되는 독특한 행정 시스템을 가지고 있습니다. 영혼의 제국(Empire of Souls)이자 예술의 성소(Sanctuary of Art), 바티칸으로 떠나보시겠습니까? 테마여행신문 TTN Korea 유네스코 세계유산(UNESCO World Heritage) 시리즈와 함께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멋진 여행을!
▶ 유스 오피치(Jus Officii, Right of Office) : 우리는 태어나면서 부모의 국적을 물려받는 속인주의(屬人主義, Nationality Principle)를 따르거나, 미국처럼 태어난 땅에 따라 국적을 받는 속지주의(屬地主義, Territorial Principle)에 익숙합니다. 핏줄이나 땅, 이것은 운명처럼 주어지는 천부적인 권리에 가깝습니다. 하지만 바티칸에서는 이 모든 상식이 산산조각 납니다.
▷ "당신은 이곳에서 태어날 수 없습니다" : 바티칸의 시민권은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유스 오피치(Jus Officii)', 즉 '직무에 의한 권리'에 기반합니다. 이것은 바티칸에서 태어났다고 해서 주어지는 것도 아니고, 부모가 시민권자라고 해서 영구적으로 물려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교황청이나 바티칸 시국을 위해 '일하는 동안'에만 빌려 쓰는, 지극히 기능적이고 계약적인 형태의 국적입니다. 바티칸 시민권을 획득할 수 있는 대상은 극히 제한적입니다. 주로 바티칸 시국이나 로마에 거주하는 추기경(Cardinals), 교황청 소속의 외교관(Diplomats of the Holy See), 바티칸 시국 내에 거주하며 스위스 근위대원처럼 특정 직무를 수행하는 자, 그리고 교황의 특별 허가를 받은 자만이 시민이 될 수 있습니다. 가장 충격적인 사실은 이 국적의 '휘발성'입니다. 여러분이 만약 바티칸의 직원이 되어 시민권을 얻었다 하더라도, 은퇴하거나 해고되거나 직무가 해제되는 그 즉시 국적은 소멸합니다. 마치 퇴사할 때 사원증을 반납하듯, 국적을 반납해야 합니다. "한 번 한국인은 영원한 한국인"이라는 정서나 혈통 중심의 민족주의를 가진 한국인에게는 매우 충격적인 개념이죠.
▶ 산타 세데(Santa Sede, Holy See) : 많은 한국 여행자들이 바티칸을 방문하면서 혼동하는 것이 '바티칸 시국(Vatican City State)'과 '성좌(Holy See, Santa Sede)'의 차이입니다. 이 둘은 동전의 양면처럼 붙어 있지만, 국제법적으로나 기능적으로는 엄연히 다른 존재입니다. 한국어로 번역할 때 '교황청'으로 퉁쳐서 부르기도 하지만, 정확한 이해를 위해 이 둘을 구분하는 것은 바티칸 여행의 수준을 한 단계 높여줄 것입니다.
▷ 영혼이 있는 땅, 육체가 있는 국가 : 쉽지 않지만, 최대한 쉽게 비유해보겠습니다. '산타 세데(Santa Sede)'는 교황을 정점으로 하는 가톨릭 교회의 최고 통치 기구이자 주권의 주체로서 '영혼'에 해당합니다. 반면, '바티칸 시국(State of Vatican City)'은 이 영혼이 지상에 발붙일 수 있도록 1929년 라테란 조약으로 만들어진 물리적 영토와 행정 기구, 즉 '육체'입니다. 국제 연합(UN)에서 옵저버 국가(Permanent Observer State)의 지위를 갖는 것은 땅덩어리인 '바티칸 시국'이 아니라, 국제법상 주체인 '성좌(Holy See)'입니다. 교황청 대사관이 전 세계에 파견될 때도 '바티칸 시국 대사'가 아니라 '교황청(Holy See) 대사'의 명의로 나갑니다. 즉, 영토는 0.44제곱킬로미터에 불과하지만, 성좌의 외교적 영토는 전 세계 180여 개국에 뻗어 있는 셈입니다.
▷ 두 개의 여권 : 이 기묘한 이중성은 여권(Passport) 시스템에서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바티칸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두 종류의 여권 시스템을 운용하는 곳 중 하나입니다. 우선 교황청(Holy See) 여권이 있습니다. 교황청은 국가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외교관과 고위 성직자에게 '외교관 여권(Diplomatic Passport)'과 '관용 여권(Service Passport)'을 발급합니다. 이 여권의 표지에는 'Sancta Sedes(Holy See)'라고 적혀 있습니다. 이는 소지자가 교황의 영적인 권위를 대리하여 외교 업무를 수행함을 의미합니다. 반면 바티칸 시국(Vatican City State) 여권은 바티칸 시국 영토 내에 시민권을 가지고 거주하는 일반 시민들에게 발급되는 '일반 여권(Ordinary Passport)'입니다. 표지에는 'Stato della Città del Vaticano(Vatican City State)'라고 적혀 있습니다. 한국인이 대한민국 여권 하나로 정체성을 증명하는 것과 달리, 이곳에서는 자신이 '영적인 정부(Holy See)' 소속인지, '물리적인 국가(Vatican City)' 소속인지에 따라 주머니 속의 신분증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 엑스트라 옴네스(Extra Omnes, Everybody Out) : 세 번째 키워드는 바티칸의 가장 드라마틱한 순간, 바로 교황 선출 회의인 '콘클라베(Conclave)'의 시작을 알리는 외침입니다. 한국의 대통령 선거가 광화문 광장을 가득 메운 유세 차량과 확성기 소음, 화려한 개표 방송 그래픽으로 대변된다면, 바티칸의 선거는 철저한 '침묵'과 '단절', 그리고 '연기'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 문을 걸어 잠그고, 세상을 차단하다 : 교황 선출 투표가 시작되기 직전, 교황청 전례 주관자는 시스티나 성당(Sistine Chapel)의 문 앞에서 엄숙하게 외칩니다. "엑스트라 옴네스!(Extra Omnes!)" 라틴어로 "모두 밖으로!"라는 뜻입니다. 이 명령이 떨어지면 투표권을 가진 80세 미만의 추기경들을 제외한 모든 사람-청소부, 요리사, 비서, 경비병, 심지어 의사까지-은 성당 밖으로 나가야 합니다. 그리고 육중한 문이 닫히고 빗장이 걸립니다. '콘클라베(Conclave)'라는 단어 자체가 라틴어 'Cum Clave(열쇠를 가지고)'에서 유래했다는 점을 상기하면, 이 의식이 단순한 비공개 회의가 아니라, 세상과 완전히 격리된 '밀실'에서의 결단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순간부터 추기경들은 외부 세계와 완전히 단절됩니다. 인터넷, 스마트폰, 신문, TV는 물론 가족과의 연락도 금지됩니다. 외부의 정치적 압력이나 여론에 휘둘리지 않고, 오직 신과의 대화(기도)와 동료 추기경들과의 토론만을 통해 차기 지도자를 선출하기 위함입니다.
▶ 영원한 건 절대 없어♬ : 바티칸 시국은 경복궁만 한 크기의 땅에, 서울의 작은 아파트 단지보다 적은 사람들이 모여, 전 세계 13억 가톨릭 신자의 영적 지주 역할을 하는 기적 같은 곳입니다. 핏줄이 아닌 직무로 맺어진 시민들, 영토를 넘어선 영적인 권위(성좌), 현대 화학과 고대 의식이 결합된 선거(콘클라베), 그리고 라틴어로 작동하는 ATM까지……. 이곳의 모든 것은 우리가 익숙해진 '국가'의 정의를 유쾌하게 배반합니다. 유구한 교황청의 역사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진리를 담은 이탈리아 속담 하나를 전해드리며 서론을 마칠까 합니다. 바티칸의 권력과 역사가 어떻게 수천 년을 이어왔는지 보여주는, 다소 냉소적이지만 지극히 현실적인 격언입니다. "Morto un Papa, se ne fa un altro.(When one Pope dies, another is made.)" 교황이 죽으면, 또 다른 교황을 만들면 된다. 너무 비정하게 들리시나요? 아닙니다. 이 말은 아무리 위대한 인물이라도 대체 불가능한 존재는 없으며, 한 사람의 죽음이나 부재로 인해 세상이 멈추지 않는다는 로마인들의 쿨한 낙관주의와 끈질긴 생명력을 보여줍니다. 시스템은 개인보다 강하며, 역사는 묵묵히 계속됩니다. 바티칸이 2천 년을 버텨온 비결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의 여행도, 우리의 인생도 그러할 것입니다.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삶은 계속되고, 우리는 또 새로운 길을 찾을 테니까요. 여러분만의 콘클라베에서 여러분만의 '흰 연기'를 피워 올리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