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녕하세요, 유네스코 세계유산(UNESCO World Heritage) 독자 여러분! 오늘은 발칸 반도의 태양의 나라(Land of the Sun), 북마케도니아(North Macedonia)로 떠나보겠습니다. 마케도니아란 국명은 '키가 큰' 혹은 '고지대'를 뜻하는 고대 그리스어 '마케드노스(Makednós)'에서 유래했습니다. 그런데 ‘북’마케도니아라니, ‘남’마케도니아는 어디냐구요? 남마케도니아는 그리스의 마케도니아 지방(Macedonia)에 해당하는데, 그리스와의 오랜 분쟁 끝에 2019년 1월 마케도니아 공화국(Republic of Macedonia)에서 현재의 북마케도니아(Republic of North Macedonia)로 국명을 변경하였습니다. 국토의 남서쪽에 위치한 오흐리드 지역(Ohrid Region)은 오흐리드 호수(Lake Ohrid)와 비잔틴 양식의 성당들이 조화를 이루는 곳으로, 세계 최초의 유네스코 복합유산(Mixed Heritage) 중 하나입니다. 1년 365일 매일 다른 곳에서 기도할 수 있을 만큼 교회가 많은 발칸의 예루살렘(Jerusalem of the Balkans)으로 떠나보시겠습니까? 테마여행신문 TTN Korea 유네스코 세계유산(UNESCO World Heritage) 시리즈와 함께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멋진 여행을!
▶ 빼앗길 수 없는 이름, 지지 않는 태양의 서사, 손체(Sonce) : 지금 독자 여러분은 스코페의 중심, '마케도니아 광장(Macedonia Square)' 한복판에 서 있습니다. 고개를 들어 12시 방향을 보세요. 하늘을 찌를 듯 솟아 있는 거대한 청동 기마상이 보이시나요? 말을 타고 칼을 높이 쳐든 저 인물, 공식적으로는 '말 탄 전사'라고 불리지만 누구나 알렉산더 대왕(Alexander the Great)임을 알고 있는 저 동상을 보며 어떤 생각이 드시나요? 저 동상의 칼끝이 가리키는 곳은 단순히 지리적 방향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 나라 사람들이 그토록 갈망하는 정체성의 근원, 바로 '손체(Sonce, 태양)'를 향하고 있습니다. 마케도니아어에서 '손체'는 단순히 하늘에 떠 있는 천체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한국인에게 '백두대간'이나 '한강'이 민족의 젖줄이자 정신적 지주인 것처럼, 이곳 사람들에게 태양은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신분증이자 영혼의 닻입니다. 거리를 걷다 보면 발밑의 맨홀 뚜껑부터 식당의 메뉴판, 심지어 아이들의 공책 표지까지 태양 문양이 새겨져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겁니다. 마치 온 도시가 "우리는 태양의 후예다"라고 소리 없는 함성을 지르는 듯합니다.
▷ 1995년, 눈물의 국기 교체식 : 하지만 이 태양에는 슬픈 드라마가 숨겨져 있습니다. 시간을 잠시 1990년대로 돌려보겠습니다. 유고슬라비아 연방이 해체되면서 마케도니아는 독립의 꿈을 이룹니다. 그들은 고대 마케도니아 왕국의 영광을 계승한다는 의미로, 알렉산더 대왕의 아버지 필리포스 2세의 무덤에서 발견된 '베르기나의 태양(Vergina Sun)'을 국기로 채택했습니다. 붉은 바탕에 16갈래로 뻗어 나가는 황금빛 태양. 그것은 그들의 자부심이었습니다. 그러나 남쪽의 이웃 나라 그리스는 격렬히 반발했습니다. "마케도니아라는 이름도, 베르기나의 태양도 모두 고대 그리스 헬레니즘의 유산이다!"라며 국경을 봉쇄하고 경제 제재를 가했습니다. 상상해 보세요. 갓 독립한 나라가 이웃 강대국의 압박에 숨통이 조여오는 상황을 말이죠. 주유소엔 기름이 떨어지고, 가게 진열대는 비어갔습니다. 결국 1995년, 마케도니아 의회는 국기를 바꾸기로 결정합니다. 국회의사당 앞 게양대에서 16줄기 햇살이 그려진 국기가 내려오던 날, 광장에 모인 시민들의 침묵은 통곡보다 더 무거웠을 겁니다.
▶ 효율성의 감옥에서 탈출하는 마법, 메라크(Merak) : 독자 여러분, 솔직해져 봅시다. 우리는 너무 바쁩니다. "빨리빨리(Palli, Palli)"는 전 세계 사전에 등재될 만큼 한국인을 대표하는 단어가 되었죠. 커피는 자판기에서 10초 만에 나오거나, 출근길에 아아를 수혈하듯 들이켜야 직성이 풀립니다. 효율성과 속도, 그것이 우리가 살아남은 방식이었습니다. 하지만 이곳 북마케도니아에 오셨다면, 부디 그 속도계를 잠시 꺼두시길 부탁드립니다. 아니, 끄게 되실 겁니다. 이곳에는 한국어로는 도저히 한 단어로 번역할 수 없는, 아주 묘하고도 매혹적인 단어가 공기처럼 떠다니기 때문입니다. 바로 '메라크(Merak)'입니다. 사전을 찾아보면 '열정', '즐거움', '취미' 정도로 나오지만, 이런 단어들로는 메라크의 깊은 맛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메라크는 '어떤 행위 그 자체에서 오는 깊고 은근한 기쁨, 그리고 그 기쁨을 위해 온전히 시간을 쏟는 태도'를 말합니다. 결과물이 얼마나 완벽한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 과정에 내 영혼이 얼마나 충실히 젖어 들었는가? 그것만이 중요합니다.
▷ 한국의 김장 vs 북마케도니아의 아이바르 : 이 장면,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지 않나요? 맞습니다. 늦가을 한국의 김장 풍경과 판박이입니다. 우리는 온 가족이 모여 노동을 분담하고, 일 년 치 식량을 준비하며 공동체 의식을 다집니다. "우리 집 김치 맛이 최고"라는 자부심처럼, 이곳 사람들도 "우리 집 아이바르가 최고"라는 자부심으로 살아갑니다. 물론 다른 점도 있습니다. 한국의 김장이 배추를 절이고 양념을 버무리는 '속도전'과 '전투적 노동'의 성격이 강하다면, 아이바르는 불 옆에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천천히 졸여내는 '기다림의 미학'에 가깝습니다.
▶ 호수의 눈물로 빚은 영원한 약속, 비세르(Biser) : 이제 우리는 스코페의 뜨거운 아스팔트를 뒤로하고, 영혼을 씻으러 남서쪽으로 향합니다. 차창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풍경이 점점 초록빛으로 물듭니다. 구불구불한 산길을 넘으면, 갑자기 시야가 확 트이며 거대한 푸른 보석이 눈앞에 펼쳐집니다. 유네스코가 자연유산과 문화유산으로 동시에 지정한 세계적인 보물, 오흐리드(Ohrid) 호수입니다. 잠시 차에서 내려 보겠습니다. 그리고 심호흡을 한번 깊게 해보시겠어요? 북마케도니아의 수도 스코페와는 공기부터 다르지 않습니까? 갈리치차(Galičica) 산맥에서 불어오는 청량한 소나무 향기, 그리고 수심 280미터 깊은 호수에서 올라오는 비릿하면서도 시원한 물 냄새가 섞여 있습니다. 오흐리드는 '발칸의 예루살렘'이라 불립니다. 한때 365개의 교회가 있어 매일 다른 교회에서 기도를 드릴 수 있었다는 전설 같은 도시입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가 찾아야 할 보물은 교회의 벽화가 아니라, '비세르(Biser, 진주)'입니다.
▷ 인간과 물고기가 합작한 기적 : 오흐리드의 좁은 골목길, 자갈이 깔린 바닥을 밟으며 걷다 보면 'Ohrid Pearl'이라는 간판을 건 상점들이 즐비합니다. "엥? 진주? 바닷가도 아닌 호수에서?"라고 의아해하실 겁니다. 맞습니다. 이것은 조개가 품어낸 천연 진주가 아닙니다. 인간의 손끝에서, 그리고 오흐리드 호수의 생명이 합작하여 만들어낸 세상에서 유일한 '인조 진주'입니다. '인조'라는 말에 실망하셨나요? 하지만, 인조라도 공장에서 플라스틱으로 찍어낸 모조품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여기에는 100년을 이어온 두 가문의 비밀과, 물고기의 희생이 담겨 있습니다. 1924년, 러시아 혁명을 피해 이곳으로 흘러들어온 한 러시아 군인 요반 수바노비치(Jovan Subanovich)가 있었습니다. 그는 오흐리드 사람들의 따뜻한 환대, 즉 '고스토프림스토(Gostoprimstvo)'에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필레브(Filev) 가문에게 고향 바이칼 호수에서 가져온 비법을 전수했다고 합니다. 비슷한 시기에 탈레브 가문은 나폴레옹 금화 25개를 주고 구매했다는 썰, 정작 바이칼 호수에는 인공 진주를 만드는 비법이 존재하지 않다는 논란도 존재합니다. 그 비법의 핵심은 바로 오흐리드 호수에만 사는 작은 토종 물고기, 플라시카(Plasica)입니다. 손가락만 한 이 은빛 물고기의 비늘을 벗겨내어 갈고, 그것을 특수 용액과 섞어 우유처럼 뽀얀 유액(Emulsion)을 만듭니다. 그리고 조개껍데기 등을 깎아 만든 구슬(핵) 위에 이 유액을 바르고 말리기를 반복합니다. 한 번 바르고, 45분을 말리고, 또 바르고……. 이 과정을 최소 8번에서 많게는 20번까지 반복해야 비로소 영롱한 오흐리드 진주가 탄생합니다.
▶ 당신의 가슴 속에 뜬 태양 : 북마케도니아를 여행한다는 것은 잃어버렸던 우리 안의 감각들을 하나씩 깨우는 과정입니다. '손체(태양)'를 통해 우리는 아무리 짓밟혀도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정체성의 소중함을 배웠습니다. '메라크(열정)'를 통해 우리는 결과보다 과정이 주는 기쁨, 효율성보다 관계가 주는 따뜻함을 되찾았습니다. '비세르(진주)'를 통해 우리는 자연이 주는 선물에 인간의 정성이 더해질 때 비로소 진짜 보석이 탄생한다는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이 땅의 사람들이 수천 년 동안 가슴에 품고 살아온 지혜의 말 한마디를 전해 드리겠습니다. "오직 태양만이 마케도니아보다 오래되었노라!"(Samo sonceto e postaro od Makedonija./Only the sun is older than Macedonia.) 세상이 변하고 국경이 바뀌어도, 우리 머리 위를 비추는 저 태양처럼, 그리고 독자 여러분의 가슴 속에 심어온 이 뜨거운 추억처럼, 변치 않는 가치는 분명히 존재합니다. 안녕히(Doviduvanj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