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녕하세요, 유네스코 세계유산(UNESCO World Heritage) 독자 여러분! 오늘은 '발칸의 붉은 장미(Red Rose of the Balkans)' 불가리아(Bulgaria)로 떠나보겠습니다. 불가리아란 국명은 7세기경 볼가강(Volga River) 유역에서 이동해 온 튀르크계 유목민 '불가르인(Bulgars)'에서 유래했습니다. 어원적으로는 '뒤섞이다(mix)' 혹은 '흔들다(shake)'를 뜻하는 튀르크어 동사 'bulgha'에서 파생된 것으로 보며, 이는 동서양의 문화를 융합해 독자적인 정체성을 확립한 그들의 역사를 상징합니다. 불가리아는 기원전 트라키아 문명(Thracian Civilization)의 눈부신 황금 유물부터 로마, 비잔틴, 오스만 제국의 유적까지 겹겹이 쌓인 거대한 '역사의 지층'을 보유한 국가이자, 전 세계 2억 5천만 명이 사용하는 키릴 문자(Cyrillic alphabet)의 탄생지입니다. 무엇보다 681년 건국 이래 ‘유럽 대륙에서 유일하게 단 한 번도 국명을 바꾸지 않은 유일한 국가’이죠! 찬란한 슬라브 문화의 요람(Cradle of Slavic Culture) 불가리아로 떠나보시겠습니까? 테마여행신문 TTN Korea 유네스코 세계유산(UNESCO World Heritage) 시리즈와 함께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멋진 여행을!
▶ 마르테니짜(Мартеница, Martenitsa) : 매년 3월 1일이 되면 불가리아 전역은 약속이라도 한 듯 붉고 흰색의 물결로 뒤덮입니다. 사람들의 옷깃과 손목, 가방은 물론이고 거리의 나무, 심지어 사랑하는 반려동물의 목에도 작고 앙증맞은 붉고 흰 실 장식이 달려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마르테니짜’입니다. 이날 불가리아 사람들은 서로에게 마르테니짜를 선물하며 “체스티타 바바 마르타!(Честита Баба Марта!/Happy Baba Marta!)”라고 외치며 건강과 행복을 빌어줍니다. 여기서 중요한 규칙이 하나 있습니다. 마르테니짜는 절대 자신을 위해 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반드시 다른 사람에게 선물로 받아야만 하죠. 이 작은 규칙 하나가 마르테니짜를 단순한 장신구가 아닌, 사람과 사람 사이의 따뜻한 마음과 공동체의 유대를 상징하는 매개체로 만듭니다. 2020년 한 해에만 불가리아인들 사이에서 1,500만 개 이상의 마르테니짜가 오고 갔다는 사실은 이 전통이 얼마나 살아 숨 쉬는지를 보여줍니다.
▶ 빨리빨리 문화에 대한 발칸식 처방전(A Balkan Prescription for "Ppalli-Ppalli" Culture), 아이랴크(Айляк, Ailyak) : 만약 당신이 한국의 ‘빨리빨리’ 문화에 지쳐 번아웃 직전이라면, 불가리아 제2의 도시 플로브디프(Plovdiv)에서 ‘아이랴크(Ailyak)’라는 이름의 특효약을 처방받으시길 권합니다. 튀르키예어 ‘aylak(게으른, 한가한)’에서 유래한 이 단어는 불가리아, 특히 플로브디프 사람들에게는 하나의 삶의 철학이자 경지로 통합니다. 그 의미를 한마디로 정의하기는 어렵지만, 굳이 풀어보자면 ‘아무것도 서두르지 않고, 걱정 없이, 모든 과정을 즐기며 여유를 만끽하는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한국인의 DNA에 각인된 ‘빨리빨리’ 정신과 정반대의 개념입니다. 아마 처음 플로브디프에 도착한 한국인이라면 주문한 커피가 30분이 지나도 나오지 않는 상황에 당황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곳에서 ‘아이랴크’는 무능이나 게으름이 아니라, 삶을 제대로 즐길 줄 아는 지혜로 여겨집니다.
▶ 발칸의 심장에 새겨진 불굴의 정신(The Indomitable Spirit Engraved in the Heart of the Balkans), 로도류비에(Родолюбие, Rodolyubie) : 마지막 열쇠는 ‘로도류비에’입니다. ‘겨레(род, rod)’와 ‘사랑(любие, lyubie)’의 합성어인 이 단어는 문자 그대로 ‘겨레 사랑’ 혹은 ‘조국애’로 번역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맹목적인 국수주의나 배타적인 민족주의와는 거리가 멉니다. 로도류비에는 거대한 제국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수백 년간 자신들의 언어와 문화,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싸워온 불가리아인들의 처절한 역사가 응축된, 저항과 보존의 정신입니다. 이는 외부의 압력에 맞서 고유의 것을 지키려는 열망이라는 점에서 한국인의 ‘한(恨)’과 ‘정(情)’이 결합된 정서와도 맞닿아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로도류비에’라는 이름의 민속 무용단이 전통 춤과 음악을 통해 이 정신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 키릴 문자, 문화 독립의 선언(The Cyrillic Alphabet, A Declaration of Cultural Independence) : 불가리아인들의 로도류비에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키릴 문자(Cyrillic script)에 대한 자부심입니다. 오늘날 러시아를 비롯한 동유럽과 중앙아시아의 2억 5천만 인구가 사용하는 이 문자의 고향이 바로 불가리아이기 때문입니다. 9세기~10세기, 제1차 불가리아 제국의 황금기에 프레슬라프(Preslav)와 오흐리드(Ohrid) 학당을 중심으로 키릴 문자가 탄생했습니다. 비잔티움 제국에서 온 선교사 키릴로스(Cyril)와 메토디우스(Methodius) 형제가 만든 글라골 문자(Glagolitic script)를 바탕으로, 그들의 제자들이 그리스 문자를 차용해 슬라브어의 소리를 표기하기에 더 쉽고 실용적인 형태로 발전시킨 것이 바로 키릴 문자입니다. 이는 당시 그리스어를 사용하던 비잔티움 제국의 문화적, 종교적 영향력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슬라브 문화권을 형성하려는 강력한 의지의 표명이었습니다.
▷ "왜 불가리아인이라 불리는 것을 부끄러워하는가?": 한 권의 책이 민족을 깨우다("Why Are You Ashamed to Call Yourself a Bulgarian?": How One Book Awakened a Nation) : 수백 년의 외세 지배는 불가리아인들의 민족의식을 희미하게 만들었습니다. 특히 18세기, 오스만 제국 내에서 경제적, 종교적 영향력이 막강했던 그리스 문화에 동화되는 이들이 늘어났습니다. 바로 이때, 꺼져가던 민족의 불씨를 되살린 것은 한 권의 책이었습니다. 1762년, 아토스산의 힐란다르(Hilandar) 수도원에 있던 파이시 힐란다르스키(Paisius of Hilendar, 1722~1773)라는 이름의 한 수도사가 쓴 『슬라브-불가리아 역사(Istoriya Slavyanobolgarskaya)』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는 이 책의 서문에서 동족을 향해 이렇게 절규했습니다. …….오, 이 멍청하고 어리석은 놈들아! 왜 스스로를 불가리아인이라고 부르는 것을 부끄러워하느냐? 너희는 너희 모국어를 읽지도 말하지도 못하면서? 아니면 불가리아인들에게 왕국과 국가가 없었던가?……." …….О, неразумни и юроде!Поради что се срамиш да се наречеш болгарин и не четеш, и не говориш на своя език? Или българите не са имали царство и държава?…….” 이 책은 필사본 형태로 불가리아 전역에 퍼져나가며 잠들어 있던 사람들의 영혼을 깨웠습니다. 자신들에게도 위대한 황제와 독립적인 교회가 있었던 영광스러운 과거가 있었음을 일깨워주었고, 이는 19세기 불가리아 민족 부흥 운동(Bulgarian National Revival)의 기폭제가 되었습니다. 한 권의 역사책이 민족 해방 운동의 사상적 토대가 된 것입니다.
▶ 릴라 수도원의 필사본, 키릴 문자 창제, 그리고 파이시의 역사책. 이 세 가지 사례는 불가리아의 ‘로도류비에’가 결국 ‘글’과 ‘기록’에 뿌리내리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국가가 없을 때, 그들은 글을 통해 민족의 정체성을 지켰습니다. ‘우리의 말을 지키는 것이 곧 우리의 영혼을 지키는 것’이라는 믿음. 이는 한글과 『조선왕조실록』에 대한 자부심으로 가득한 한국인들이 너무나도 깊이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로도류비에는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문자의 힘을 통해 실천하는 문화적 저항이자 수호 행위인 것입니다.이 세 가지 열쇠, 마르테니짜, 아이랴크, 로도류비에는 각각 자연과 공동체를 대하는 불가리아인의 따뜻한 마음, 시간을 대하는 그들의 여유로운 지혜, 그리고 역경 속에서도 자신을 지켜낸 불굴의 정신을 보여줍니다. 이 열쇠들을 손에 쥔 당신의 불가리아 여행은 이제 장미 향기보다 더 짙고, 요구르트보다 더 깊은 맛을 내게 될 것입니다. 불가리아에는 이런 속담이 있습니다. “함께 힘을 합친 무리는 산도 들어 올린다(Сговорна дружина планина повдига/A collusive group raises a mountain)”. 함께 봄을 부르고, 함께 문화를 지키고, 함께 느긋한 시간을 즐기는 불가리아 사람들의 힘을 상징하는 말입니다. 부디 그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 그 단단한 연대의 힘을 직접 느껴보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