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녕하세요, 유네스코 세계유산(UNESCO World Heritage) 독자 여러분! 오늘은 유럽의 동과 서가 만나는 발칸 반도의 심장, 세르비아(Serbia)로 떠나보겠습니다. 세르비아란 국명은 슬라브어파의 한 갈래인 '세르브인(Serbs)'의 땅을 의미하며, 어원적으로는 '동맹(Ally)'이나 '친척(Kinsman)'을 뜻하는 고대 인도유럽어 뿌리에서 유래했다고 추정합니다. 세르비아는 도나우 강(Danube River)과 사바 강(Sava River)이 합류하는 비옥한 대지 위에 로마 제국 황제 17명을 배출한 고대 문명의 요람이자, 비잔틴과 오스만,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거대한 역사가 충돌하고 융합된 문화의 교차로(Crossroads of Culture)입니다. 수많은 외세의 침략과 굴곡진 현대사 속에서도 세르비아 정교회(Serbian Orthodox Church)의 숭고한 신앙과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슬라바(Slava, 수호성인의 날)'를 품은 고유한 정체성의 민족이기도 하죠! 키릴 문자와 라틴 문자가 공존하는 라즈베리의 땅(Land of Raspberries), 세르비아로 떠나보시겠습니까? 테마여행신문 TTN Korea 유네스코 세계유산(UNESCO World Heritage) 시리즈와 함께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멋진 여행을!
▶ 이성(理性)을 초월한 저항의 미학, 이나트(Inat) : 세르비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들이 서 있는 땅의 특수성을 인지해야 합니다. 다뉴브 강과 사바 강이 만나는 베오그라드(Belgrade)는 역사적으로 합스부르크 왕가(가톨릭/서구)와 오스만 제국(이슬람/동방)이 충돌하던 최전선이었습니다. 이러한 지정학적(地政學的) 위치는 세르비아인들에게 끊임없는 침략과 전쟁을 안겨주었으나, 동시에 그들로 하여금 외부의 압력에 굴하지 않는 독특한 저항 정신과 내면의 결속력을 다지게 만든 토양이 되었습니다. 이나트(Inat)는 세르비아인을 설명하는 가장 중요한 단어이자, 타 문화권 사람들이 가장 이해하기 힘든 개념입니다. 사전적으로는 '고집(Stubbornness)', '악의(Spite)', '반항(Defiance)' 등으로 번역되지만, 이는 이나트가 가진 다층적 의미의 일부에 불과합니다.
▷ 개념적 정의 : 이나트는 "자신에게 손해(損害)가 되거나 심지어 파멸(破滅)을 초래할지라도, 자신의 존엄(尊嚴)과 신념(信念)을 지키기 위해 강자에게 저항하거나 불가능한 상황에 맞서는 태도"를 의미합니다. 이는 합리적 선택(Rational Choice)이나 실리 추구(Pragmatism)와는 정반대의 개념입니다. 세르비아 사람들은 이나트를 설명할 때 "나의 피해를 감수하고서라도, 너에게 굴복하지 않음으로써 나의 존재 가치를 증명하겠다"는 강렬한 의지를 내비칩니다.
▷ 어원과 역사적 형성 : '이나트'라는 단어는 오스만 튀르크어에서 유래했으나, 500년에 걸친 오스만 제국의 지배 하에서 세르비아인들이 겪은 억압과 수탈의 역사 속에서 독자적인 문화적 기제(機制)로 진화했습니다. 압도적인 무력을 가진 제국 앞에서 물리적 승리가 불가능할 때, 정신적 승리를 거두고 민족적 정체성(正體性)을 잃지 않기 위해 발현된 생존 본능이 바로 이나트입니다.
▶ 신앙과 가족을 잇는 성스러운 끈, 슬라바(Slava) : 두 번째 키워드는 세르비아 정교회(Serbian Orthodox Church) 문화의 정수이자, 2014년 유네스코(UNESCO)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슬라바(Slava)입니다. 슬라바는 '영광(Glory)' 또는 '축하(Celebration)'를 의미하며, 가문의 수호성인(Patron Saint)을 기리는 축제를 뜻합니다. 전 세계 기독교 문화권에서 개인이 자신의 세례명 축일(Name Day)을 기념하는 것은 흔하지만, 가족 단위(Family)로 대를 이어 특정 성인을 가문의 수호신으로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것은 오직 세르비아인들에게만 존재하는 고유한 문화입니다. 그리스나 러시아 정교회 신자들도 성인을 공경하지만, 슬라바처럼 가정 내에서 사제 역할을 가장이 수행하며 대대적인 잔치를 벌이는 풍습은 없습니다.
▷ 이교도 전통과 기독교의 융합 : 슬라바의 기원은 기독교 전파 이전 슬라브족의 다신교(Paganism) 전통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고대 슬라브인들은 각 가정마다 숭배하는 가신(家神)이 있었습니다. 9세기경 세르비아인들이 기독교로 개종할 때, 초대 대주교였던 성 사바(Saint Sava)는 이교도적 관습을 무리하게 없애는 대신, 가신 숭배를 기독교 성인 숭배로 대체하도록 유도했습니다. 예를 들어, 천둥의 신 페룬(Perun)을 섬기던 가문은 선지자 엘리야(St. Elijah)를, 가축의 신을 섬기던 가문은 성 조지(St. George)를 수호성인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이를 통해 슬라바는 세르비아인들의 종교적 정체성과 민족적 연속성을 보존하는 핵심 기제가 되었습니다.
▷ 금식과 만찬, 포스나(Posna)와 므르스나(Mrsna) : 독자 여러분이 알아두면 좋은 또 하나의 팁은 슬라바가 금식일(Fasting day)에 걸리는지 여부입니다. 성 니콜라스 축일(12월 19일)처럼 대림절 기간이거나 수요일/금요일에 슬라바가 열리면 '포스나 슬라바(Posna Slava)'라고 하여 육류, 달걀, 유제품이 없는 식탁을 차립니다. 이때는 잉어 구이, 콩 요리, 감자 샐러드 등이 주메뉴가 됩니다. 반면 금식일이 아닐 때는 '므르스나 슬라바(Mrsna Slava)'라 하여 통돼지 바비큐, 양고기, 사르마(Sarma, 양배추 롤) 등 고기 요리가 풍성하게 나옵니다.
▶ 영혼을 울리는 느림과 향유의 미학, 메라크(Merak) : 세 번째 키워드 메라크(Merak)는 세르비아인들의 일상을 지배하는 삶의 태도이자 철학입니다. 터키어에서 유래했으나 발칸 고유의 정서로 심화된 메라크는 "작은 것에서 느끼는 깊은 충만감, 영혼이 우주와 하나 되는 듯한 쾌락, 그리고 근심 걱정을 잊고 현재의 순간을 온전히 즐기는 무아지경(無我之境)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 쾌락주의(Hedonism) VS 메라크(Merak) : 메라크는 서구의 쾌락주의와 다릅니다. 쾌락주의가 감각적 만족을 추구한다면, 메라크는 다소 멜랑콜리(Melancholy)하고 감상적인 기분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때로는 돈이나 시간, 건강을 낭비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 몰입하는 행위가 메라크입니다. 예를 들어, 친구들과 술을 마시며 밤을 새우거나, 좋은 음악에 취해 유리잔을 깨뜨리는 행위, 혹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카페에 앉아 5시간 동안 담배를 피우며 거리를 바라보는 행위가 모두 '메라크'입니다.
▷ 메라크의 성전(聖殿), 카파나(Kafana) 문화 : 메라크를 체험할 수 있는 가장 구체적인 장소는 바로 카파나(Kafana)입니다. 카파나는 단순한 술집이나 식당이 아닙니다. 1522년 베오그라드에 유럽 최초의 카파나가 문을 열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유서 깊은 이곳은 세르비아인들의 "두 번째 집"입니다. 역사적으로 카파나는 뉴스와 소문이 교환되고, 비즈니스가 성사되며, 정치적 음모가 꾸며지고, 시인들이 시를 쓰는 공간이었습니다.
▷ 커피 의식(The Coffee Ritual) : 세르비아에서 커피(Domaća kafa) 힌잔을 마시는 것은 신성한 의식과도 같습니다. 한국처럼 종이컵에 담아 길을 걸으며 마시는 문화는 이곳에서 환영받지 못합니다. 작은 컵에 담긴 진한 커피를 놓고, 한 모금씩 아주 천천히 음미하며(Sipping), 친구와 몇 시간이고 대화를 나누는 것이 바로 메라크를 즐기는 방법입니다. 커피 찌꺼기(Talog)가 바닥에 가라앉기를 기다리는 그 시간조차 대화의 일부가 됩니다.
▶ 역설(Paradox)의 땅, 세르비아를 여행하는 법 : 지금까지 살펴본 세 가지 키워드-이나트, 슬라바, 메라크-는 서로 모순되는 듯하면서도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세르비아라는 국가의 독특한 아우라(Aura)를 형성합니다. 이나트(Inat)는 역사적 시련 속에서 세르비아를 지켜낸 '단단한 뼈대(Bone)'입니다. 비합리적으로 보일 만큼 강한 자존심과 저항 정신은 그들이 누구에게도 종속되지 않은 주체적인 민족임을 증명합니다. 슬라바(Slava)는 세르비아 사회를 흐르는 '뜨거운 피(Blood)'입니다. 가문의 수호성인을 중심으로 뭉친 가족과 공동체의 유대는 그 어떤 외풍에도 흔들리지 않는 소속감과 정체성을 제공합니다. 메라크(Merak)는 고단한 삶을 위로하고 윤택하게 만드는 '부드러운 숨결(Breath)'입니다. 전쟁과 가난 속에서도 삶을 비관하지 않고, 순간의 기쁨을 최대치로 끌어올려 향유할 줄 아는 낙천성은 세르비아인들이 가진 강인한 생명력의 원천입니다. 독자 여러분, 세르비아를 방문하신다면 1999년 폭격을 맞아 부서진 채 보존된 베오그라드 국방부 건물 앞에서 그들의 이나트를 느껴보십시오. 우연히라도 현지인의 슬라바에 초대받는다면, 낯선 이방인을 가족처럼 대하는 그들의 빵과 와인을 나누며 가족애를 체험하십시오. 그리고 오후의 카파나에 앉아 휴대폰을 내려놓고, 천천히 터키식 커피를 마시며 메라크의 순간을 만끽해 보십시오. 지구 반대편 이 낯선 발칸의 땅에서 의외의 동질감과 깊은 울림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