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녕하세요, 유네스코 세계유산(UNESCO World Heritage) 독자 여러분! 오늘은 ‘유럽의 지붕(Top of Europe)’이자 대자연이 빚은 거대한 예술 작품! 스위스(Switzerland)로 떠나보겠습니다. ‘헬베티카(Confoederatio Helvetica)’는 로마 시대 이 땅에 거주했던 용맹한 켈트족의 일파 ‘헬베티족(Helvetii)’에서 기원했으며, 우리에게 친숙한 스위스란 국명은 건국에 참여한 초기 3개 주 중 하나인 ‘슈비츠(Schwyz)’에서 유래했습니다. 정치적으로 스위스는 1291년 뤼틀리 서약(Rütli Oath)을 기원으로 1815년 빈 회의를 통해 영구 중립국(Permanently Neutral State)으로 인정받은 평화의 상징이자, 26개의 칸톤(Canton)이 모여 강력한 연방을 이룬 직접 민주주의(Direct Democracy)의 살아있는 교과서이기도 합니다. 융프라우-알레치(Jungfrau-Aletsch)의 빙하부터 베른 구시가지(Old City of Berne)의 중세 거리까지 자연과 문화가 조화를 이루는 청정 국가, 스위스로 떠나보시겠습니까? 테마여행신문 TTN Korea 유네스코 세계유산(UNESCO World Heritage) 시리즈와 함께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멋진 여행을!
▶ 1분 늦음은 재앙, 5분 이름은 미덕(A Minute Late is a Disaster, Five Minutes Early is a Virtue), 퓡크틀리히카이트(Pünktlichkeit/Punctuality) : 스위스에서 ‘퓡크틀리히카이트(Pünktlichkeit)’는 시간을 잘 지키는 습관 이상의 의미를 가집니다. 그것은 존중과 신뢰, 그리고 공동의 선(善)에 대한 헌신을 표현하는 사회적 약속이자 정교한 비언어적 소통 방식입니다. 스위스 사람에게 약속 시간에 늦는 것은 상대방의 시간을 도둑질하는 무례한 행위로 여겨지며, 심지어 약속 시간보다 ‘10분’ 일찍 도착하는 것조차 상대의 준비 시간을 방해하는 배려 없는 행동으로 비칠 수 있습니다. 약속 시간 ‘5분 전’에 도착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미덕으로 통합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스위스의 정밀함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 하는 점입니다. 많은 이들이 자연스럽게 세계적인 스위스 시계 산업을 떠올립니다. 하지만 시계 산업은 원인이라기보다는 결과에 가깝습니다. 스위스적 시간관념의 진짜 뿌리는 훨씬 더 깊고 오래된 곳, 바로 험준한 알프스의 농경문화에 있습니다. 알프스에서의 삶은 혹독하고 예측 불가능한 자연과의 싸움이었습니다. 여름은 짧고 겨울은 깁니다. 농부들은 이 짧은 여름 동안 가축을 고지대 목초지로 이동시키고, 겨울을 날 건초를 만들고, 치즈를 생산하는 모든 일을 시간 맞춰 해내야만 했습니다. 파종 시기를 놓치거나 건초를 말릴 타이밍을 놓치는 것은 곧 생존의 위협으로 이어졌습니다. 자연의 시계에 자신들의 삶을 완벽하게 동기화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 국민이 보스, 정치는 거들 뿐(The People are the Boss, Politics Just Helps Out), 디렉테 데모크라티(Direkte Demokratie/Direct Democracy) : 만약 스위스 국민에게 “당신 나라의 통치자는 누구입니까?”라고 묻는다면, 대통령이나 총리의 이름을 대는 대신 거울을 가리킬지도 모릅니다. 스위스 정치 시스템의 핵심은 주권이 ‘진정으로’ 국민에게 있다는 점입니다. 국민은 단순한 유권자를 넘어, 국가의 최종적인 입법자이자 헌법의 수호자 역할을 합니다. 이것이 바로 ‘디렉테 데모크라티(Direkte Demokratie)’, 즉 직접 민주주의입니다. 스위스 시민들은 1년에 서너 차례, 국가의 중대사에 대해 직접 투표권을 행사합니다. 이 시스템을 움직이는 두 개의 강력한 도구는 ‘국민발안(popular initiative)’과 ‘국민투표(optional referendum)’입니다. 국민발안은 유권자 10만 명의 서명을 받으면 헌법 개정안을 직접 제안할 수 있는 제도입니다. 국민투표는 의회가 통과시킨 법안에 대해 5만 명의 서명을 받으면 국민 전체의 찬반을 물어 그 법의 시행을 막을 수 있는 제도입니다. 이 제도가 얼마나 강력한 힘을 갖는지는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 명확히 알 수 있습니다. 2009년, 스위스 정부와 의회는 모두 반대했지만 한 시민단체가 주도한 ‘미나렛(이슬람 사원의 첨탑) 신축 금지’ 국민발안이 투표에 부쳐졌습니다. 결과는 놀라웠습니다. 투표자의 찬성으로 헌법이 개정되었고, 스위스에서는 새로운 미나렛을 지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는 기성 정치권의 의사를 국민이 직접 뒤엎을 수 있음을 보여준 상징적인 사건이었습니다.
▶ 감자전으로 나뉘고 초콜릿으로 뭉친다(Divided by a Potato Pancake, United by Chocolate), 뢰슈티그라벤(Röstigraben/The Rösti Ditch) : 스위스에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누구나 알고 있는 국경선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뢰슈티그라벤(Röstigraben)’입니다. 직역하면 ‘뢰슈티(Rösti) 해자(垓子)’라는 뜻으로, 독일어권 스위스에서 즐겨 먹는 바삭한 감자전의 이름에서 유래했습니다. 이 유머러스한 용어는 독일어를 사용하는 다수 지역과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서부 지역(Romandy)을 가르는 문화적, 정치적, 심리적 경계선을 의미합니다. 이 경계선은 단순히 언어의 차이를 넘어섭니다. 유럽연합(EU)과의 관계, 사회 복지 정책, 국가의 역할 등 주요 정치 현안에 대해 두 지역은 종종 정반대의 투표 성향을 보입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1992년 유럽경제지역(EEA) 가입을 묻는 국민투표였습니다. 프랑스어권은 압도적으로 찬성했지만, 독일어권의 반대로 결국 부결되었습니다. 이는 뢰슈티그라벤이 스위스 사회의 역학을 이해하는 데 얼마나 중요한 개념인지를 보여줍니다. 번외적으로 독일어권과 이탈리아어권(Ticino) 사이에는 ‘폴렌타그라벤(Polentagraben)’, 즉 옥수수죽 해자라는 경계선도 존재합니다. 이는 스위스가 단일한 문화권이 아니라, 뚜렷한 개성을 가진 여러 문화권의 연합체임을 상징적으로 드러냅니다.
▷ 우연이 아닌 선택으로 만들어진 나라(Willensnation) :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스위스 국가 정체성의 가장 심오한 역설과 마주하게 됩니다. 대부분의 국가는 국민을 ‘하나로 묶는 공통점’을 통해 자신을 정의합니다. 공통의 언어, 공통의 혈통, 공통의 종교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스위스는 정반대입니다. 스위스는 국민의 ‘서로 다른 차이점’을 관리하고 존중하겠다는 약속 위에서 국가를 세웠습니다. 뢰슈티그라벤이라는 개념은 스위스가 ‘빌렌스나치온(Willensnation)’, 즉 ‘의지의 국가’라는 사실을 명확히 보여줍니다. 스위스는 단일 민족국가(Nation State)가 아니라, 서로 다른 배경을 가진 공동체들이 자발적인 의지로 연합하기로 선택한 결과물입니다. 그 역사적 뿌리는 중세 시대의 ‘아이드게노센샤프트(Eidgenossenschaft)’, 즉 ‘맹세 공동체’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 알프스의 여러 작은 공동체들은 외부의 위협에 맞서 서로를 지키고 협력하겠다는 ‘맹세’를 통해 연방을 결성했습니다. 이들의 결속은 혈연이나 언어가 아닌, 정치적 합의에 기반한 것이었습니다.
▷ 한강의 단일성 vs 제네바 호수의 다양성 : 한국의 정체성이 ‘기반형(foundational)’이라면, 스위스의 정체성은 ‘부가형(additive)’에 가깝습니다. 한국인에게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은 다른 모든 정체성의 바탕이 되는 근원적 정체성입니다. 하지만 스위스 사람에게는 제네바 사람(프랑스어권), 베른 사람(독일어권), 또는 티치노 사람(이탈리아어권)이라는 지역적·문화적 정체성이 우선할 수 있습니다. ‘스위스인’이라는 정체성은 이처럼 각기 다른 문화 집단을 하나로 묶는 상위의 정치적 정체성으로 추가되는 것입니다. 여행자에게 이것은 아마 가장 이해하기 어렵지만, 동시에 가장 흥미로운 지점입니다. 스위스에서는 하나의 ‘스위스 문화’를 찾으려 해서는 안 됩니다. 대신, 직접 민주주의와 상호 존중이라는 기둥 위에 세워진 하나의 정치적 지붕 아래, 여러 개의 문화가 조화롭게 공존하는 모습을 발견해야 합니다. 스위스를 여행한다는 것은 이 모자이크 조각들 사이를 오가는 여정입니다. 뢰슈티그라벤과 같은 보이지 않는 경계를 넘나들며, 매 순간 의식적인 선택과 합의를 통해 스스로를 창조해 나가는 한 국가의 위대한 실험을 만나 보시겠습니까?
▶ 세 개의 열쇠, 퓡크틀리히카이트, 디렉테 데모크라티, 그리고 뢰슈티그라벤은 결국 하나의 이야기로 귀결됩니다. 퓡크틀리히카이트는 사회적 신뢰를 유지하는 매일의 리듬을 제공합니다. 디렉테 데모크라티는 공동체의 의지를 실현하는 정치적 틀을 만듭니다. 그리고 뢰슈티그라벤의 수용은 이 모든 것이 자발적인 선택임을 증명하며 문화적 회복탄력성을 부여합니다. 이 세 요소가 함께 어우러져 스위스라는 독특한 ‘의지의 국가’를 직조해냅니다. 스위스에는 이런 속담이 있습니다. “Worte sind Zwerge, Taten sind Riesen”(Words are dwarfs, deeds are giants). 말은 난쟁이요, 행동은 거인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스위스의 정신을 가장 잘 요약하는 말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들의 정체성은 거창한 선언이 아니라, 투표소에 표를 던지고, 약속 시간에 정확히 도착하고, 언어의 경계 너머 이웃을 존중하는 수백만 개의 작지만 단호한 일상의 행동들이 모여 만들어진 위대한 결과물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