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녕하세요, 유네스코 세계유산(UNESCO World Heritage) 독자 여러분! 오늘은 유럽의 심장(Heart of Europe)이자, 보유한 중세의 요새! 슬로바키아(Slovakia)로 떠나보겠습니다. 슬로바키아란 국명은 '슬라브인의 땅(Land of the Slavs)'이라는 명징한 의미를 담고 있으며, 이는 5세기경부터 카르파티아 산맥에 뿌리내린 슬라브 민족의 강인한 정체성을 상징합니다. 국토 전체가 거대한 성채 박물관이라 불릴 만큼 180여 개의 고성(古城)과 420여 개의 저택이 곳곳에 산재해 있고, 웅장한 타트라 산맥(Tatra Mountains)의 만년설과 맑은 다뉴브강이 어우러지는 천혜의 비경을 자랑합니다. 무엇보다 1992년 12월 31일 '벨벳 이혼(Velvet Divorce)'이라 불리는 평화적인 분리 과정을 통해 체코슬로바키아 연방 공화국(Czech and Slovak Federative Republic)에서 독립공화국으로 다시 태어난 독특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동유럽과 서유럽을 잇는 교두보, 슬로바키아로 떠나보시겠습니까? 테마여행신문 TTN Korea 유네스코 세계유산(UNESCO World Heritage) 시리즈와 함께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멋진 여행을!
▶ 산은 슬로바키아의 심장이다(The Mountain is the Heart of Slovakia), 호리(Hory) : 슬로바키아를 이해하는 첫 번째 열쇠는 ‘호리(Hory)’, 즉 ‘산’입니다. 한국인에게 산이 어떤 의미인지 굳이 설명할 필요는 없겠지요. 우리 애국가 첫 소절도 ‘동해물과 백두산이’로 시작하니까요. 하지만 슬로바키아인들에게 산, 특히 타트라(Tatra) 산맥은 그 의미를 넘어 국가 정체성의 핵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들에게 산은 단순한 풍경이 아니라 역사 그 자체이자, 고난의 시대를 버티게 해준 정신적 척추입니다.
▷ 국가의 요람, 타트라 산맥(The High Tatras, Cradle of the Nation) : 슬로바키아 국가(國歌)의 제목은 ‘타트라 산 위에 번개가 친다(Nad Tatrou sa blýska/Lightning over the Tatra Mountains)’입니다. 가사는 타트라 산맥 위로 폭풍우가 몰아치는 장면으로 시작하는데, 이는 곧 슬로바키아 민족에게 닥친 위기를 상징합니다. 국가의 첫 소절부터 산을 등장시켜 민족의 운명을 이야기하는 나라. 이보다 더 강렬하게 산과 국가의 일체감을 표현할 수 있을까요? 이러한 깊은 유대감은 역사적 배경에서 비롯됩니다. 슬로바키아인들은 11세기부터 약 천 년간 헝가리의 지배를 받으며 독자적인 국가나 왕조, 심지어 귀족 계층조차 갖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헝가리 왕국 북부 고원지대 사람들’로 불렸을 뿐, 고유한 민족으로서의 정체성을 인정받기 어려웠죠. 주변 강대국인 폴란드나 오스트리아, 헝가리가 저마다 화려한 왕가의 역사를 자랑할 때, 슬로바키아인들에게는 기댈 곳이 없었습니다. 바로 그때, 그들의 변치 않는 왕국이자 성채가 되어준 것이 바로 카르파티아(Carpathian) 산맥, 그중에서도 가장 험준하고 장엄한 타트라 산맥이었습니다.
▷ 산의 아들, 국민 영웅 야노시크(Son of the Mountains, National Hero Jánošík) : 모든 나라에는 국민적 영웅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이순신 장군이나 홍길동이 있다면, 슬로바키아에는 유라이 야노시크(Juraj Jánošík, 1688~1713)가 있습니다. 그는 18세기 초, 타트라 산맥을 무대로 활동했던 의적(義賊)으로, 부패한 귀족들을 털어 그 재물을 가난한 농민들에게 나눠주었다는 전설로 유명합니다. ‘슬로바키아의 로빈 후드’라는 별명이 딱 어울리죠. 야노시크의 전설은 산을 빼놓고는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그가 태어난 곳도 산골 마을인 테르호바(Terchová)였고, 그의 주 활동 무대 역시 험준한 산악 지대였습니다. 산은 그의 요새이자 은신처였으며, 억압받는 민중에게는 희망의 상징이었습니다. 그의 이야기는 19세기 민족주의가 부흥하던 시기에 문학과 영화를 통해 재탄생하며, 단순한 의적을 넘어 외세의 압제에 저항하는 민족 영웅의 아이콘으로 격상되었습니다.
▶ 슬로바키아의 역사를 맛보다(Tasting Slovak History), 브린자(Bryndza) : 슬로바키아를 이해하는 두 번째 열쇠는 ‘브린자(Bryndza)’라는 이름의 양젖 치즈입니다. 아마 많은 한국인들에게는 생소한 이름일 겁니다. 하지만 브린자를 맛보지 않고 슬로바키아를 논하는 것은, 된장찌개를 먹어보지 않고 한국 음식을 이야기하는 것과 같습니다. 브린자는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이 땅의 척박한 자연환경과 유목민적 유산, 그리고 수백 년의 역사가 녹아있는 ‘먹을 수 있는 유물’입니다.
▷ 슬로바키아의 ‘된장’, 브린자의 첫 만남(Slovakia's 'Doenjang' : A First Taste of Bryndza) : 브린자는 부드럽고 크리미한 질감에 톡 쏘는 짭짤함과 강렬하고 쿰쿰한 향을 가진 양젖 치즈입니다. 처음 맛보면 그 독특한 풍미에 깜짝 놀랄 수도 있습니다. 마치 외국인이 처음 청국장을 맛봤을 때와 비슷한 반응이랄까요? 바로 이 지점에서 브린자는 한국의 된장, 고추장과 같은 ‘장(醬)’ 문화와 완벽한 평행이론을 이룹니다. 둘 다 각국 음식 맛의 근간을 이루는 핵심 재료이자, 발효와 숙성이라는 시간의 마법을 통해 탄생하는 저장 음식입니다. 한번 그 맛에 빠지면 헤어나올 수 없는 중독성을 가졌다는 점도 똑같습니다. 예로부터 한국에서 좋은 집안은 장맛으로 알아봤듯이, 슬로바키아에서는 진짜 브린자의 맛을 아는 사람을 진정한 미식가로 쳐줍니다.
▷ 국민 음식, 브린조베 할루슈키(The National Dish : Bryndzové Halušky) : 브린자의 맛을 가장 제대로, 그리고 맛있게 경험하는 방법은 슬로바키아의 국민 음식 ‘브린조베 할루슈키(bryndzové halušky)’를 먹어보는 것입니다. 감자를 갈아 만든 작은 뇨끼(halušky)를 삶아, 따뜻하게 녹인 브린자 소스에 듬뿍 버무린 후, 바삭하게 튀긴 베이컨 조각을 뿌려 먹는 요리입니다. 상상만 해도 군침이 돌지 않나요? 이 음식은 슬로바키아인들에게 단순한 한 끼 식사 이상의 의미를 지닙니다. 한국인에게 뜨끈한 김치찌개나 떡볶이가 주는 위안과 편안함처럼, 브린조베 할루슈키는 그들의 소울푸드(soul food)입니다. 이 요리를 가장 맛있게 즐기려면 전통 목동의 오두막을 재현한 식당인 ‘살라시(salaš)’나 산 정상의 ‘하타(chata)’를 찾아가는 것이 좋습니다.
▶ 서두르지 않는 삶의 예술(The Art of Not Rushing), 포호다(Pohoda) : 슬로바키아를 여행하다 보면 어딘가 모르게 편안하고 느긋한 분위기를 느끼게 됩니다. 사람들은 서두르는 법이 없고, 도시의 풍경은 차분하며, 자연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아우르는 슬로바키아의 세 번째 열쇠는 바로 ‘포호다(Pohoda)’입니다. 이 단어 하나에 슬로바키아인들의 삶의 철학과 행복의 비밀이 담겨 있습니다.
▷ ‘빨리빨리’의 반대말, 포호다(The Opposite of 'Ppalli-Ppalli' : Defining Pohoda) : ‘포호다’는 한국어로 정확히 번역하기 어려운 단어입니다. ‘편안함’, ‘안락함’, ‘느긋함’, ‘만족감’, ‘평온함’ 등의 의미를 모두 포함하는, 일종의 상태이자 분위기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굳이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한국 문화의 상징과도 같은 ‘빨리빨리’의 완벽한 대척점에 있는 개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포호다’ 철학이 가장 거대하고 극적으로 구현되는 현장이 바로 매년 7월에 열리는 ‘포호다 페스티벌(Pohoda Festival)’입니다. 슬로바키아 최대 규모의 음악 축제로 매년 3만 명의 관객이 모이지만, 이 축제는 놀라울 정도로 평화롭고 안전하며 가족적인 분위기로 유명합니다. 주최 측의 운영 철학은 “마치 당신의 집에 손님을 초대하는 것과 같은 마음으로 축제를 준비한다”는 것입니다. 깨끗한 화장실, 다양한 장르의 음악과 예술 프로그램, 그리고 독한 술 판매 금지 조치 등은 이곳을 단순한 공연장이 아니라, 이름 그대로 ‘포호다’를 만끽할 수 있는 거대한 휴식 공간으로 만듭니다. ‘빨리빨리’에 지친 한국인이라면, 이 축제에서 진정한 정신적 해방감을 맛볼 수 있을 겁니다.
▶ 슬로바키아를 떠나기 전에 다시 한번 되뇌어 봅니다. 장엄한 ‘호리(Hory)’의 품에 안겨 진정한 ‘포호다(Pohoda)’를 느끼고, 그 땅의 역사가 담긴 ‘브린자(Bryndza)’를 맛보았던 순간! 이 세 가지 열쇠는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얽히고설켜 슬로바키아라는 하나의 완전한 경험을 만들어 냅니다. 어쩌면 이 여행은 낯선 나라를 탐험하는 것을 넘어, 잠시 잊고 있던 삶의 다른 속도를 발견하는 과정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슬로바키아의 오래된 속담 하나가 떠오르는군요! “일은 토끼가 아니라서, 도망가지 않는다(Práca nie je zajac, neutečie/Work is not a rabbit, it won't run away).” 이보다 더 유쾌하고 명쾌하게 ‘포호다’의 철학을 요약할 수 있을까요? ‘빨리빨리’를 외치며 달려온 여행자에게 슬로바키아가 건네는 작지만 깊은 위로의 말이 아닐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