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녕하세요, 유네스코 세계유산(UNESCO World Heritage) 독자 여러분! 오늘은 서인도 제도의 헬렌(Helen of the West Indies), 세인트루시아(Saint Lucia)로 떠나보겠습니다. 세인트루시아란 국명은 1502년 프랑스 항해사들이 루치아 성녀(Saint Lucy)의 축일인 12월 13일에 섬을 발견한 것에 유래했습니다. 영국과 프랑스가 카리브해의 이 전략적 요충지를 차지하기 위해 무려 14번이나 주인이 바뀌는 치열한 쟁탈전을 벌였기에, 트로이 전쟁(Trojan War)의 원인이 된 미녀의 이름을 따 ‘서인도 제도의 헬렌’이라는 별칭을 얻었습니다. 이러한 격동의 역사는 1979년 2월 22일 영국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하기 전까지 섬의 언어, 종교, 음식, 음악 등 사회 전반에 지울 수 없는 짙은 흔적을 남겼습니다. 또한 세인트루시아는 아서 루이스(Sir Arthur Lewis, 1915~1991)와 데릭 월컷(Derek Walcott, 1930~2017)이라는 두 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하여 인구 대비 세계에서 가장 높은 지성적 밀도를 자랑하는 독보적인 국가이기도 하죠! 2004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피톤 관리 지역(Pitons Management Area)은 바다 위로 수직으로 솟아오른 두 개의 거대한 화산 원추구인 그로 피톤(Gros Piton)과 쁘띠 피톤(Petit Piton)이 자아내는 압도적인 원시의 경관을 품고 있습니다. 카리브해의 푸른 보석이자 지성의 요람, 세인트루시아로 떠나보시겠습니까? 테마여행신문 TTN Korea 유네스코 세계유산(UNESCO World Heritage) 시리즈와 함께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멋진 여행을!
▶ 대자연의 압도적 경이로움, 바주디(The Overwhelming Wonder of Mother Nature, Bazoudi) : 세인트루시아의 물리적, 지리적 특성을 가장 직관적이고도 강렬하게 설명할 수 있는 첫 번째 크웨욜(Kweyol 또는 Kwéyòl, 카리브해 연안 국가에서 널리 사용되는 프랑스어 기반의 크리올어) 키워드는 바로 '바주디(Bazoudi)'입니다. 이 단어는 영어로 'stunned' 또는 'dazed'로 번역되며, 한국어로는 '넋을 잃은', '망연자실한' 혹은 '황홀경에 빠진' 상태를 의미하는 매력적인 형용사입니다. 일상적인 대화에서는 누군가 눈부시게 매력적인 사람을 보았거나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소식을 접했을 때 감탄사처럼 사용되기도 하지만, 세인트루시아를 방문한 이들이 화산섬 특유의 극적이고 압도적인 자연 풍광을 처음 마주했을 때 느끼는 원초적인 경외감을 표현하기에 이보다 더 완벽하게 부합하는 단어는 찾아보기 힘듭니다.
카리브해의 수많은 이웃 섬들이 저마다 평화롭고 잔잔한 백사장과 나른한 야자수 그늘을 뽐내며 휴양객들을 유혹하지만, 세인트루시아는 거칠고 원시적인 화산의 에너지가 지표면 위로 그대로 노출된 극적인 지형을 통해 방문객들을 단숨에 바주디 상태로 몰아넣습니다. 이 섬은 단순히 안락한 휴양을 위한 정적인 장소가 아니라, 지구가 지금 이 순간에도 살아서 끓어오르고 숨 쉬고 있음을 증명하는 거대한 지질학적 박물관과도 같습니다.
이러한 대자연의 경이로움을 전 세계가 공식적으로 인정한 기념비적 결과물이 바로 2004년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당당히 등재된 '피통 관리 지역(Pitons Management Area)'입니다. 세인트루시아의 남서부 해안을 따라 육상 1,134헥타르와 해상 875헥타르를 아울러 총 2,909헥타르에 걸쳐 광활하게 펼쳐진 이 보호 구역의 핵심은 단연 그로 피통(Gros Piton, 해발 798미터)과 프티 피통(Petit Piton, 해발 743미터)이라는 두 개의 거대한 화산 첨탑입니다. 짙고 푸른 카리브해 바다 깊은 곳에서부터 수직에 가깝게 하늘을 찌를 듯 치솟아 오른 이 두 봉우리는 고대 화산 활동이 남긴 장엄한 자연의 조각품으로, 섬의 거의 모든 곳에서 그 위용을 뚜렷하게 확인할 수 있는 세인트루시아의 절대적인 상징입니다.
두 첨탑은 피통 미탕(Piton Mitan)이라는 가파른 산등성이로 서로 긴밀하게 이어져 있으며, 이 구역 안에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자동차를 타고 칼데라(Caldera) 분화구 안으로 직접 들어갈 수 있는 드라이브인(Drive-in) 화산인 설퍼 스프링스(Sulphur Springs)가 경이로운 자태를 숨기고 있습니다. 약 30만 년 전의 거대한 화산 폭발로 형성된 이곳에서는 오늘날까지도 매캐한 유황 가스가 쉴 새 없이 뿜어져 나오고 뜨거운 진흙탕이 맹렬하게 끓어오르며 생동하는 지구의 에너지를 아낌없이 발산합니다.
바주디(Bazoudi)라는 단어는 결국 단순히 눈앞에 펼쳐진 풍경의 시각적 아름다움에 일차원적으로 놀라는 것을 넘어섭니다. 이는 나약한 인간을 압도하는 맹렬한 자연의 위력 앞에서 옷깃을 여미며 겸허함을 느끼고, 동시에 그 거칠고 변덕스러운 자연의 섭리와 조화롭게 공존하는 법을 기나긴 세월에 걸쳐 터득해 온 세인트루시아 사람들의 심오한 생태학적 세계관을 훌륭하게 대변하는 열쇠입니다.
▶ 혼종성이 창조한 문화적 자부심, 크웨욜(Cultural Pride Created by Hybridity, Kwéyòl) : 세인트루시아의 복잡다단한 사회 구조와 그곳에 뿌리내린 사람들의 내면을 가장 깊이 있게 이해하기 위한 두 번째 핵심 키워드는 바로 '크웨욜(Kwéyòl)'입니다. 크웨욜은 언어학적 표면으로는 세인트루시아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프랑스어 기반의 크레올어(Creole language)를 지칭하지만, 그 깊은 이면에는 아프리카 대륙에서 끌려온 노예무역의 참혹한 비극과 수백 년간 이어진 유럽 제국주의의 가혹한 억압을 묵묵히 견뎌낸 카리브해 민중들의 피와 땀이 서려 있습니다.
17세기와 18세기, 다양한 서아프리카어군을 사용하던 흑인 노예들은 무자비한 농장주인 프랑스인들의 지시에 복종하고, 동시에 서로 다른 부족 출신의 동료 노예들끼리의 원활한 의사소통 수단을 마련해야만 했습니다. 이들은 생존을 위한 절박함 속에서 프랑스어의 어휘 체계를 차용하되 서아프리카 언어 고유의 문법과 통사 구조를 뼈대로 삼는 임시방편의 피진(Pidgin) 언어를 탄생시켰습니다. 세월이 흐르고 세대를 거듭하면서 이 불완전했던 언어는 문법적 규칙성과 풍부한 어휘력을 갖춘 완벽한 체계의 모어(Mother tongue)로 굳건히 정착하였고, 이것이 바로 오늘날의 크웨욜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훗날 섬의 지배권이 영국으로 영구히 넘어가면서 영어가 유일한 공식 언어로 지정되고 학교 교육과 행정 시스템이 모두 영어로 재편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민중들은 크웨욜을 가정과 마을의 일상어로 끈질기게 고집하며 그들의 문화적 독립성을 지켜냈다는 사실입니다. 식민주의가 남긴 척박한 한계와 영어와 크웨욜이라는 언어적 이중성이 교차하는 혼란스러운 사회적 토양은 역설적이게도 인류 지성사에 영원히 기록될 세계적인 두 명의 천재를 배출하는 최고의 자양분이 되었습니다. 이들의 위대한 업적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라틴아메리카 및 카리브해 지역 목록(MoWLAC)에 등재되어 전 세계의 영구적인 보호를 받고 있습니다.
첫 번째 인물은 1979년 흑인 최초로 노벨경제학상의 영예를 안은 윌리엄 아서 루이스(William Arthur Lewis, 1915~1991)입니다. 2009년 유네스코는 그가 평생에 걸쳐 남긴 방대한 학술 연구 자료와 서신, 그리고 신생 독립국들을 위해 작성한 정책 자문 문서들을 아우르는 '아서 루이스 경의 문서(Sir William Arthur Lewis Papers)'를 기록유산으로 당당히 등재했습니다. 루이스는 그 유명한 '이중부문모형(Dual-sector model)'을 통해 식민 지배를 겪은 개발도상국에서 전통적인 자급자족 농업 부문과 서구 자본이 이식된 자본주의 부문이 어떻게 분리되어 상호 작용하는지를 날카롭게 통찰했습니다. 그는 식민지의 가난이 게으름이 아니라 자본과 지식의 구조적 결핍에서 비롯된다고 설파하며, 제3세계 국가들이 경제적 종속의 사슬을 끊고 진정한 자립 성장을 이룰 수 있는 이론적 청사진을 세상에 제시했습니다.
두 번째 인물은 1992년 카리브해 출신 작가로는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거머쥔 시인이자 극작가 데릭 월컷(Derek Walcott, 1930~2017)입니다. 최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지역 목록에 새롭게 등재된 '데릭 월컷 개인 자택 도서관(The Derek Walcott Personal Home Library)'은 그가 전 세계를 누비며 수집하고 탐독한 3,338권의 장서를 온전히 보존하고 있습니다. 월컷은 고대 그리스 호메로스(Homer)의 장엄한 서사시를 카리브해 가난한 어부들의 삶으로 환상적으로 치환한 불멸의 걸작 『오메로스(Omeros)』를 통해, 제국주의의 언어인 영어를 능수능란하게 구사하면서도 그 기저에는 민중의 언어인 크웨욜의 역동적인 리듬을 짙게 깔아두었습니다. 그에게 있어 크웨욜과 영어는 어느 하나를 배척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융합하여 전혀 새로운 차원의 문학적 창조를 이루어내는 아름다운 재료였습니다.
▶ 공존을 위한 아름다운 경쟁, 라워즈 에크 라 마게위트(A Beautiful Competition for Coexistence, Lawòz èk La Magéwit) : 세인트루시아 사람들의 공동체 정신을 이해하기 위한 마지막 핵심 크웨욜 키워드는 섬 전역을 붉은 장미와 자주빛 마게위트의 열기로 물들이는 전통 꽃 축제입니다. 세인트루시아인들은 오랫동안 라워즈(La Woz, 장미)와 라 마게위트(La Magwit, 마게위트)라는 두 거대한 문화 결사체 가운데 하나에 소속되어 왔습니다. 노예제 시대의 상호부조 조직에서 시작된 이들은 오늘날에도 각자의 왕과 왕비, 판사와 군인, 음악가와 가수들을 거느린 채 화려한 축제와 노래 경쟁을 펼칩니다. 치열한 라이벌 의식 속에서도 서로를 인정하며 공존하는 이 전통은 세인트루시아 공동체 문화의 상징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라워즈 결사체는 매년 8월 30일 리마의 성 로사(St. Rose of Lima) 축일에, 라 마게위트 결사체는 10월 17일 성 마르가리타 마리아 알라코크(St. Margaret Mary Alacoque) 축일에 각각 섬 전역에서 성대하고 화려한 화훼 축제를 개최합니다. 붉은 옷을 차려입고 장미의 고귀함을 칭송하는 라워즈 파와, 푸른색 옷을 입고 마거리트의 우아함을 기리는 라 마게위트 파 사이의 팽팽하면서도 유쾌한 라이벌 의식은 세인트루시아에서만 볼 수 있는 가장 역동적이고 독특한 사회적 풍경을 연출합니다.
▶ 과거의 지혜가 끓여낸 미래의 향연(Conclusion: The Feast of the Future Brewed by the Wisdom of the Past) : 지금까지 세인트루시아의 본질과 영혼을 가장 날카롭게 꿰뚫는 세 가지 크웨욜 키워드-바주디(Bazoudi), 크웨욜(Kwéyòl), 그리고 라워즈 에크 라 마게위트(Lawòz èk La Magéwit)-를 통하여 이 작은 화산 섬나라가 어떻게 인류 보편의 감동을 주는 거대한 유네스코 세계유산적 가치를 창조해 냈는지 심도 있게 살펴보았습니다. 화산의 격렬한 요동이 빚어낸 경외로운 대자연 피통(Pitons)에서 뿜어져 나오는 압도적 감각은, 척박한 역사적 시련을 꿋꿋하게 견뎌낸 세인트루시아 사람들의 굽히지 않는 생태적 토대이자 삶의 배경이 되었습니다.
식민 지배의 폭력 속에서도 지배자의 언어를 변형하여 창조해 낸 민중의 독창적 언어 크웨욜은, 아서 루이스 경의 빈곤을 타파하는 날카로운 경제적 통찰과 데릭 월컷의 세계를 품은 장엄한 시어(詩語)로 찬란하게 만개하며 카리브해를 넘어 인류 전체의 지적 유산으로 승화되었습니다. 그리고 가혹한 억압의 사슬을 유쾌한 해학과 연대로 돌파해 낸 두 꽃 결사체 축제의 전통은, 어떠한 고난 속에서도 공동체의 결속을 잃지 않는 인간의 눈부신 회복 탄력성을 증명하며 오늘날까지도 힘차게 박동하고 있습니다.
Ti rach koupé gwo bwa.
A small axe cuts down a big tree.
작은 도끼가 큰 나무를 쓰러뜨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