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녕하세요, 유네스코 세계유산(UNESCO World Heritage) 독자 여러분! 오늘은 ‘은의 나라’ 라 플라타(Río de la Plata)이자 세상의 끝(Fin del Mundo), 아르헨티나(Argentina)로 떠나보겠습니다. 아르헨티나라는 국명은 '은(Silver)'을 뜻하는 라틴어 '아르겐툼(Argentum)'에서 유래했습니다. 16세기 탐험가들이 라플라타 강(Río de la Plata)을 거슬러 올라가면 거대한 은의 산이 있을 것이라 믿었던 '은의 땅(Tierra Argentina)'에 대한 열망이 오늘날 국명이 된 것입니다. 아르헨티나는 1816년 투쿠만 선언(Declaration of Independence)을 통해 스페인 제국으로부터 독립한 이후, 남미 현대사의 파란만장한 궤적을 그려온 연방 공화국입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의 관점에서 아르헨티나는 안데스 산맥을 관통하는 잉카의 도로망 카팍 냔(Qhapaq Ñan)부터 파타고니아의 거대한 빙하가 요동치는 로스 글라시아레스(Los Glaciares), 그리고 인류 무형문화유산의 정수인 탱고(Tango)에 이르기까지 자연과 인문이 직조한 거대한 박물관이라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는 '남미의 파리'라 불리며 유럽의 고전적 건축 양식과 라틴 아메리카 특유의 역동성이 결합된 독특한 도시 경관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메시를 품은 라 알비셀레스테(La Albiceleste), 아르헨티나로 떠나보시겠습니까? 테마여행신문 TTN Korea 유네스코 세계유산(UNESCO World Heritage) 시리즈와 함께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멋진 여행을!
▶ 이민자들의 애환이 피워낸 항구의 예술, 포르테뇨(Porteño, the port art born of the joys and sorrows of immigrants) : ‘포르테뇨(Porteño)’는 본래 ‘항구 사람’을 뜻하는 스페인어 단어로, 좁게는 부에노스아이레스(Buenos Aires) 거주민을, 넓게는 그들이 형성한 고유하고 세련된 도시 문화를 지칭합니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빈곤과 전쟁을 피해 기회의 땅을 찾아 대서양을 건너온 수백만 명의 유럽 이민자들은 부에노스아이레스 항구에 첫발을 내디뎠습니다. 고향을 떠나온 이방인들의 고독과 짙은 향수, 그리고 가난한 항구 노동자들의 척박한 애환이 뒤엉킨 이 도시의 뒷골목에서는 삶의 무게를 예술로 덜어내려는 포르테뇨들만의 독창적인 대중문화가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포르테뇨 문화의 시각적 정체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상징이 바로 2015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된 ‘필레테 포르테뇨(Filete porteño)’입니다. 화려한 원색의 물감으로 기하학적인 무늬나 꽃, 식물의 넝쿨 등을 정교하게 그려 넣어 마차나 버스, 상점의 간판을 장식하던 전통 회화 기법입니다. 초기에는 짐마차를 눈에 띄게 꾸미려는 단순한 장식 목적이었으나, 점차 이민자들의 소망과 삶의 철학, 재치 넘치는 속담을 글귀로 써넣으며 부에노스아이레스 대중문화를 대변하는 거리의 예술로 자리 잡았습니다. 이 화려하고도 역동적인 선구조 속에는, 비록 현실은 고단할지라도 이를 예술적 낭만과 유머로 극복하고자 했던 포르테뇨 특유의 낙천주의가 고스란히 깃들어 있습니다.
▷ 반도네온의 선율에 몸을 맡긴 이방인들(Strangers who surrendered themselves to the melody of the bandoneon) : 청각과 신체의 움직임으로 포르테뇨의 영혼을 표현한 궁극의 예술은 단연 ‘탱고(Tango)’입니다. 2009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된 탱고는 아프리카계 이민자들의 원초적인 리듬, 토착 원주민의 애잔한 선율, 그리고 유럽 이민자들이 들여온 악기인 반도네온(Bandoneon)의 숨결이 기적적으로 융합되어 만들어졌습니다. 이 춤과 음악은 낯선 땅에 던져진 이민자들의 짙은 우수와 정서적 갈망을 매우 관능적이고 열정적인 몸짓으로 표현해냅니다.
탱고가 전 세계인의 심금을 울리는 대중가요이자 문학적 서사로 도약할 수 있었던 데에는 카를로스 가르델(Carlos Gardel, 1890~1935)이라는 불세출의 영웅이 존재합니다. 풍부한 바리톤 음색과 극적인 감정 표현을 통해 탱고에 전례 없는 서정적 깊이를 더한 그는, 44세의 젊은 나이에 비극적인 비행기 사고로 세상을 떠났지만 오늘날까지도 "가르델처럼 되다(Ser Gardel)"라는 관용구가 쓰일 만큼 신화적인 존재로 추앙받고 있습니다.
한편, 포르테뇨의 폭발적인 열정을 설명할 때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요소는 바로 축구(Football)입니다. 탱고가 내면의 깊은 슬픔을 연인과의 육체적 교감을 통해 우아하게 통제하는 예술이라면, 축구는 개인의 고독을 집단적인 열망과 에너지로 변환시켜 거대한 스타디움의 그라운드 위에 맹렬하게 폭발시키는 가장 역동적인 방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 무한한 대초원을 질주하는 자유와 융합, 가우초(Freedom and fusion racing across the endless prairie, Gaucho) :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화려한 불빛을 뒤로하고 내륙으로 끝없이 달려가면, 하늘과 맞닿은 광활한 대초원 팜파스(Pampas)가 위용을 드러냅니다. 이 거칠고도 자비 없는 대자연 속에서 탄생한 두 번째 핵심 키워드 ‘가우초(Gaucho)’는 스페인계 백인 정착민과 토착 원주민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메스티소) 목동들을 일컫습니다. 야생 소와 말을 몰았던 가우초들은 특유의 자유분방함과 대자연에 순응하는 강인한 생명력, 억압에 결코 굴복하지 않는 기질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별빛을 지붕 삼아 노숙을 하면서도 전통 허브차인 마테(Mate)를 돌려 마시며 낭만적인 유대감을 나누었고, 소고기를 숯불에 천천히 구워 먹는 아사도(Asado) 문화를 발전시켰습니다.
19세기에 접어들며 독립 전쟁과 국경 방어의 최전선에서 용맹하게 싸운 가우초는 아르헨티나의 진정한 민족적 영웅이자 자립심의 상징으로 격상되었습니다. 이러한 가우초의 삶을 문학적으로 집대성한 인물이 바로 아르헨티나의 위대한 시인 호세 에르난데스(José Hernández)이며, 그의 대표작이 서사시 『가우초 마르틴 피에로(El Gaucho Martín Fierro)』입니다. 부패한 정부의 부당한 징집으로 국경 수비대에 끌려가 온갖 고초를 겪는 가우초의 비극적이지만 영웅적인 삶을 생생하게 그려낸 이 작품은, 아르헨티나 문학사에서 가장 빛나는 봉우리로 평가받습니다.
▷ 붉은 밀림 속에 건설된 신과 인간의 유토피아(A utopia of gods and humans built in the red jungle) : 가우초 문화가 광활한 대초원 위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이룩한 융합의 결과물이라면, 철저한 계획과 종교적 신념 아래 체계적으로 이루어진 융합의 결정체는 1984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과라니족의 예수회 선교단 시설(Jesuit Missions of the Guaranis)’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아르헨티나 미시오네스주에 위치한 산 이그나시오 미니(San Ignacio Miní)는 17세기 초, 가톨릭 예수회가 포르투갈의 잔혹한 노예 사냥꾼들로부터 과라니 원주민들을 보호하고 교화하기 위해 건립한 거주지입니다.
이 선교단 시설은 원주민들이 자급자족할 수 있는 고도의 농업 경제 체제를 구축하고, 외부 제국의 무력 억압으로부터 자유를 보장받은 일종의 ‘사회주의적 신권 국가’였습니다. 붉은 사암으로 정교하게 지어진 성당 폐허를 바라보면, 유럽의 웅장한 바로크 건축 양식과 과라니 원주민 고유의 섬세한 미적 감각이 놀라울 정도로 완벽하게 혼합되어 있습니다. 무자비한 정복과 피비린내 나는 파괴로 점철되었던 아메리카 대륙의 끔찍한 식민 역사 속에서, 이질적인 두 문화가 폭력이 아닌 신앙과 예술적 교감을 매개로 빚어낸 기적과도 같은 융합의 미학입니다.
▶ 폭력의 늪에서 피어난 기억과 정의, 메모리아(Memory and Justice Blooming from the Swamp of Violence, Memoria) : 아르헨티나의 현대 문화를 가장 극적으로 형성한 세 번째 열쇠는 스페인어로 '기억'을 뜻하는 ‘메모리아(Memoria)’입니다. 이는 부당한 국가 권력의 폭력 앞에서 결코 굴복하지 않고 끝내 진실을 규명하여 희생자들의 명예를 회복하려는 아르헨티나 시민들의 위대한 집단적 의지를 상징합니다.
아르헨티나는 1976년부터 1983년까지 이어진 군부 독재 시절, 국가가 국민을 상대로 테러를 자행한 ‘더러운 전쟁(Dirty War)’이라는 참혹한 암흑기를 겪었습니다. 이 시기 수만 명의 무고한 시민들이 어떠한 재판 절차도 없이 강제로 납치되어 끔찍한 고문을 당하거나 실종되었습니다. 절망만이 가득했던 어둠 속에서 가장 먼저 죽음의 위협에 몸을 내던진 이들은 실종된 자녀들을 찾기 위해 거리로 나선 평범한 '어머니'들이었습니다. 실종된 자녀들을 상징하는 흰색 기저귀를 머리에 두르고 마요 광장(Plaza de Mayo)을 행진한 '마요 광장의 어머니들'은, 숭고한 저항의 불씨를 지피며 무소불위의 군부 독재를 종식시키는 결정적인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 상처를 품고 비상하는 남미의 은빛 날개(South America's silver wings soaring while harboring wounds) : 지금까지 우리는 아르헨티나라는 거대하고 매혹적인 국가의 근원적인 정체성을 관통하는 세 가지 핵심 키워드인 포르테뇨, 가우초, 메모리아를 통하여 남미 대륙의 심장부에 굳게 숨겨진 경이로운 영혼의 풍경을 깊이 있게 들여다보았습니다. 고향을 잃은 이방인들의 고독을 탱고로 치환해 낸 열정, 드넓은 팜파스의 비바람을 맞으며 피워낸 가우초의 굳센 저항 정신, 그리고 참혹한 국가 폭력의 상처를 외면하지 않고 진실을 낱낱이 기록하여 인류 기억의 공간으로 일궈낸 메모리아의 의지. 이 모든 궤적들은 어떠한 억압과 가혹한 시련 속에서도 결코 삶의 존엄성을 잃지 않으려는 인간 본연의 끈질긴 생명력이라는 하나의 숭고한 지점에서 완벽하게 수렴합니다.
특히 한국과 아르헨티나는 언어와 피부색, 지리적 위치가 완벽히 다름에도 불구하고, 이민자의 슬픔과 식민의 한을 탱고와 아리랑으로 극복하였고, 예수회 건축물과 유교적 서원을 통해 학문적 진리의 토대를 다졌으며, 군부 독재 시절의 진실을 세계기록유산으로 보존해냈다는 놀라운 평행이론을 완성했습니다. 국가적 위기와 절망의 순간마다 아르헨티나인들은 잠시 숨을 고르며 물러설지언정, 결코 삶의 아름다움을 포기하지 않고 묵묵히 기타를 튕기고 춤을 추며 내일을 도모해 왔습니다. 이러한 그들의 끈질긴 기질과 유연한 생존 철학을 통찰력 있게 대변해 주는 지혜로운 격언을 독자 여러분께 소개하며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Soldado que huye, sirve para otra guerra.
A soldier who flees serves for another war.
도망친 병사는 다른 전쟁에 쓸모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