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녕하세요, 유네스코 세계유산(UNESCO World Heritage) 독자 여러분! 오늘은 '세계에서 가장 긴 나라(약 4,300km)‘이자 ’세계에서 가장 좁은 나라(약 175 km)‘, 칠레(Chile)로 떠나보겠습니다. '칠레(Chile)'라는 국명은 '땅이 끝나는 곳'이란 마푸체족(Mapuche)의 '칠리(Chilli)' 혹은 케추아어(Quechua) '추위'를 뜻하는 '치리(Chiri)'에서 유래했다고 추정합니다. 남북으로 길쭉한 칠레는 북쪽의 메마른 아타카마 사막(Atacama Desert)부터 남쪽의 빙하 지대 파타고니아(Patagonia)까지 세상의 모든 기후를 품은 ’지구의 축소판‘입니다. 특히 폴리네시아인들의 독창적인 문명을 자랑하는 태평양 한복판의 이스터섬(Easter Island)은 1995년 유네스코 세계유산 '라파 누이 국립공원(Rapa Nui National Park)'으로 등재되었습니다. '세계의 배꼽', 이스터섬으로 떠나보시겠습니까? 테마여행신문 TTN Korea 유네스코 세계유산(UNESCO World Heritage) 시리즈와 함께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멋진 여행을!
▶ 거대한 시간의 파도를 넘은 위대한 경이, 바칸(Bacán: The great marvel beyond the massive waves of time) : 칠레 도심을 걷다 보면 세대를 불문하고 시각을 압도하거나 감탄을 자아내는 대상을 마주할 때마다 반사적으로 터져 나오는 단어가 있습니다. 바로 '바칸(Bacán)'입니다. 영미권의 '경이롭다(Awesome)' 혹은 '장엄하다(Spectacular)'와 궤를 같이하는 이 표현은 압도적 스케일과 역사적 무게감을 자랑하는 칠레의 기념비적 문화재를 수식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적합합니다.
▷ 절해의 고도에 새겨진 인류의 수수께끼, 라파 누이(The enigma of humanity carved in a remote island, Rapa Nui) : 칠레가 품어온 수많은 경탄의 대상 가운데, 본토 해안에서 무려 3,700킬로미터나 격절된 태평양 한가운데의 외딴섬 라파 누이 국립공원(Rapa Nui National Park, 1995년 등재)은 전 세계 방문객들로부터 '바칸'이라는 찬사를 끌어내는 인류 최대의 미스터리입니다. 폴리네시아(Polynesia) 계통의 선조들이 이 척박한 화산섬에 당도한 이래, 이들은 외부와의 교류가 철저히 차단된 상황 속에서도 매우 정교하고 독자적인 문명 체계를 구축했습니다. 10세기경부터 약 6백 년간 폭발적으로 조각된 모아이(Moai) 석상은 887기나 남아 매서운 해풍을 견뎌내고 있습니다. 특히 15기의 거대 석상이 일렬로 늘어선 아후 통가리키(Ahu Tongariki) 제단은 붉은 일출 빛과 겹쳐질 때, 인간의 맹목적 신앙과 예술적 투혼이 얼마나 장엄한 경지에 이를 수 있는지를 묵묵히 대변합니다. 조류인간(Birdman) 숭배 사상과 오롱고(Orongo) 마을의 세밀한 바위그림과 돌집 유적들은 금속 연장이나 수레바퀴조차 존재하지 않던 시절, 수십 톤 중량의 응회암을 깨어내 해안까지 끌고 간 현지인들의 지독한 집념을 투영합니다.
▷ 대륙의 혈관을 이은 잉카의 도로망, 카팍 냔(Qhapaq Ñan, the Inca road network connecting the continent's veins) : 불가능에 도전한 인간의 끈기는 태평양의 외딴섬에 국한되지 않고 남미 대륙 깊숙한 곳까지 생명력을 뻗어갑니다. 칠레 북단 구역을 가로지르는 카팍 냔(Qhapaq Ñan, Andean Road System, 2014년 등재)은 콜럼버스 도래 이전(Pre-Columbian) 시대 아메리카 전역을 통틀어 가장 고도화된 물류 및 통신망이었습니다. 남미 6개국이 합심하여 유네스코에 이름을 올린 이 방대한 공유유산(Shared Heritage, 共有遺産)은 전체 길이가 30,000킬로미터에 육박하며, 잔혹한 자연의 장벽을 뚫어낸 잉카 제국(Inca Empire)의 치밀한 행정력을 방증합니다. 그 중에서 칠레를 관통하는 구간은 황량한 아타카마 사막을 종단하여 수도 산티아고(Santiago) 남부 마이포 강(Maipo River) 유역까지 핏줄처럼 이어졌습니다. 제국은 해발 6,000미터를 상회하는 험산과 가파른 협곡을 정복하고자 미타(Mita, 賦役)라는 교대 노동 제도를 가동하여 벼랑에 길을 내고 정교한 돌계단을 놓았습니다. 여행자와 파발꾼(Chasqui)을 위한 숙소인 역참(Tambo, 驛站)을 규칙적으로 배치하고, 험로 곳곳에 무사 안녕을 기원하는 돌무더기 기원탑(Apacheta, 祈願塔)을 축조하여 방대한 생태계를 단일한 혈관계로 통합해 냈습니다.
▶ 거친 시련의 사막에서 피어난 불굴의 꽃, 아페라르(Aperrar: The indomitable flower blooming in the harsh desert) : 칠레를 이해하는 두 번째 핵심 어휘는 '아페라르(Aperrar)'입니다. 개를 뜻하는 명사 '페로(Perro)'에서 파생된 이 동사는 직역하면 '사냥개처럼 집요하게 물어뜯다'라는 뉘앙스를 지닙니다. 하지만 칠레니스모 내에서 이 어휘는 결코 부정적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감당하기 힘든 역경이 덮쳐오더라도 절대 주저앉지 않고 꿋꿋하게 버텨내며 진일보하는 칠레 민중의 강건한 회복 탄력성(Resilience)을 은유하는 숭고한 표현입니다.
▷ 척박한 땅에서 일군 연대, 초석과 구리 광산 유산(Solidarity built on barren land, saltpeter and copper mining heritage) : 질긴 생명력의 연대기는 칠레 북부 타라파카(Tarapacá) 주에 속한 황막한 팜파 델 타마루갈(Pampa del Tamarugal) 평원에 버려진 움버스톤과 산타 라우라 초석 작업장(Humberstone and Santa Laura Saltpeter Works, 2005년 등재)에서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중반까지 글로벌 농업의 판도를 바꾼 천연비료의 주원료, 초석(Sodium nitrate, 硝石)을 채굴하던 이 방대한 산업 시설은 주변국에서 이주해 온 수많은 노동자가 일궈낸 다국적 공동체의 요람입니다. 살을 태우는 일조량과 숨통을 조이는 모래폭풍 속에서도 이들은 '팜피노(Pampinos)'라는 확고한 유대감을 형성하며 '아페라르'의 저력으로 거대한 기업 도시(Company town)를 세웠습니다. 비록 합성 질산염의 등장과 경제 공황의 여파로 쇠락하여 지금은 적막만이 맴돌고 있으나, 녹슨 기계 장치와 극장 터는 가혹한 착취 구조에 저항하며 사회적 정의(Social justice)를 부르짖은 그들의 뜨거운 동지애를 대변합니다. 이는 안데스 고도 2,000미터 비탈에 자리 잡은 세웰 광산 도시(Sewell Mining Town, 2006년 등재)와도 대비되는 흥미로운 대목입니다. 1905년 세계 최대 규모의 지하 구리 광맥인 엘 테니엔테(El Teniente)를 채굴하기 위해 건설된 이 알록달록한 '계단 마을'은, 평활한 사막과 가파른 산지라는 극명히 대조되는 환경 속에서도 삶의 터전을 억척스럽게 방어해 낸 현지인들의 불굴의 의지를 나란히 증명합니다.
▶ 이질적인 두 영혼이 만나 이룬 완벽한 화음, 카차이(Cachái: The perfect harmony created by two disparate souls) : 칠레의 다채로운 정신문화를 해독하는 마지막 열쇠는 '카차이(Cachái)'에 숨어 있습니다. 영어 동사 '캐치(Catch)'에서 파생된 이 단어는 일상적인 대화 말미에 붙어 "내 의도를 제대로 파악했어?" 혹은 "충분히 공감하지?"라는 뜻을 부드럽게 묻는 구어체 표현입니다. 이 짧고 경쾌한 단어 속에는 타인의 세계관을 이해하고 인식의 차이를 좁혀보려는 강력한 소통의 의지가 담겨 있습니다. 실제로 칠레의 문화적 성숙 과정은 이 '카차이'의 쉼 없는 연속이었습니다. 외부에서 밀려온 서구의 문화와 그곳에서 수천 년간 생명력을 이어온 토착 원주민의 오랜 관습이 서로를 배척하지 않고 치열하게 교감하여 탄생시킨 융합의 결정체들이 칠레 전역에 산재해 있습니다.
▷ 건축으로 피어난 포용, 칠로에 교회와 발파라이소(Tolerance blossoming through architecture, Churches of Chiloé and Valparaíso) : 서로 다른 신앙과 건축 공법이 절묘하게 화합한 대표적 사례가 바로 칠레 남부의 칠로에 섬의 교회들(Churches of Chiloé, 2000년 등재)입니다. 연중 비바람과 짙은 안개가 머무는 이 군도에 17세기 초반 상륙한 예수회(Jesuit) 선교사들은 현지인들에게 가톨릭의 가르침을 전파하려 애썼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무리하게 유럽의 웅장한 석재 건축 방식을 이식하려 들지 않았습니다. 선교사들이 제시한 성당의 기본 골격은 칠로에 주민들의 뛰어난 선박 건조 기술 및 지역의 단단한 목재들과 융화되어 '칠로타(Chilotan)'라는 전무후무한 양식을 낳았습니다. 쇠못 하나 없이 나무의 홈을 정밀하게 맞물리는 결구법, 습기를 방어하기 위해 지붕과 벽체 표면에 물고기 비늘처럼 나무 조각(Tejuela)을 빈틈없이 덮어씌운 마감, 그리고 뒤집힌 배의 밑바닥을 연상시키는 둥근 아치형 천장은 현지 기후와 민중의 삶을 깊이 있게 이해(Cachái)하지 못했다면 결코 탄생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16곳에 달하는 이 소박한 목조 예배당은 보편적인 종교 철학이 향토적인 토양과 얼마나 유려하게 어우러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눈부신 증거입니다. 해안가의 험준한 산비탈에 조성된 발파라이소 항구도시 역사 구역(Historic Quarter of the Seaport City of Valparaíso, 2003년 등재) 역시 수용과 융합의 미학을 재현합니다. 파나마 운하(Panama Canal)가 뚫리기 전까지 세계 해운의 대동맥 역할을 하던 이 항구는, 다양한 국적의 이주민들이 가파른 산동네에 적응하고자 산악 열차인 푸니쿨라(Funicular)를 곳곳에 배치하고 빅토리아 양식의 외관에 원색의 페인트를 칠해 그들만의 독특한 거주 문화를 정착시켰습니다.
▶ 세상의 끝에서 새로운 영감을 속삭이다(Whispering new inspiration from the end of the world) : 지금까지 본고는 현지인들의 삶 속에 깊게 뿌리내린 세 가지 일상어를 등대 삼아 칠레라는 국가가 빚어낸 문화적 심도와 유네스코 등재 유산의 이면을 짚어보았습니다. 라파 누이의 고독한 석상과 아타카마를 종단하는 옛 잉카의 길에서 목도한 위대한 도전 '바칸(Bacán)', 황량한 산업 현장의 질곡과 피비린내 나는 군부 폭정 앞에서도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지키려 맹렬히 투쟁했던 저항 의식 '아페라르(Aperrar)', 그리고 침략자의 종교마저 투박한 피리 선율로 보듬고, 외래 건축 양식을 나무 비늘 덮인 소박한 예배당으로 재탄생시킨 화합의 정신 '카차이(Cachái)'. 이 세 단어는 칠레가 단순히 지리적으로 동떨어진 변방이 아니라, 재앙에 가까운 자연의 시험과 역사의 깊은 상흔을 어떤 방식으로 극복하고 찬란한 유산으로 승화시켰는지를 입증하는 더할 나위 없는 문화 인류학적 해제(解題)입니다. 안데스 산맥과 거대한 태평양이라는 절망적인 지형의 감옥에 갇힌 듯 보이는 이 좁고 긴 대륙의 끄트머리에서, 사람들은 결코 밀려오는 운명의 파도를 수동적으로 관망하지 않았습니다.
A mal tiempo, buena cara.
In bad weather, a good face.
가혹한 비바람 속에서도 밝은 표정을 잃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