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녕하세요, 유네스코 세계유산(UNESCO World Heritage) 독자 여러분! 오늘은 카리브해의 붉은 섬(Red Island of the Caribbean), 쿠바(Cuba)로 떠나보겠습니다. 쿠바란 국명은 타이노(Taíno)족의 '비옥한 땅이 풍부한 곳' 쿠바오(Cubao) 혹은 '위대한 장소' 코아바나(Coabana)에서 유래했습니다. 400년간 스페인 식민 지배(1492~1898)를 받았으나, 미국-스페인 전쟁(Spanish-American War, 1898)을 거쳐, 마침내 1902년 독립을 쟁취한 카리브해 최대의 섬나라(The largest island nation in the Caribbean)입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올드 아바나와 요새(Old Havana and its Fortification System, 1982)'는 16세기 스페인 안달루시아풍 건축의 정수를 보여주며, '트리니다드와 로스 인헤니오스 계곡(Trinidad and the Valley de los Ingenios, 1988)'은 18세기 제당 산업의 황금기와 흑인 노예 제도를 증언하고 있습니다. 아메리카 대륙의 열쇠(Key of the Americas), 쿠바로 떠나보시겠습니까? 아바나, 우 나나(Havana, ooh na-na)♬ 테마여행신문 TTN Korea 유네스코 세계유산(UNESCO World Heritage) 시리즈와 함께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멋진 여행을!
▶ 권위를 허물고 절망을 해학으로 승화하는 마법, 초테오(Choteo: The Magic of Dismantling Authority and Turning Despair into Humor) : 가장 먼저 주목해야 할 쿠바의 고유한 정신적 키워드는 바로 ‘초테오(Choteo)’입니다. 이 단어는 표면적으로 가벼운 농담, 조롱, 혹은 장난스러운 태도를 의미하지만, 쿠바 사회의 맥락 속에서는 어떠한 심각한 상황이나 억압적인 권위 앞에서도 이를 무겁게 받아들이지 않고 특유의 해학(諧謔)으로 비틀어버리는 사회적·심리적 태도를 지칭합니다. 1928년 쿠바의 저명한 철학자이자 에세이스트인 호르헤 마냐치(Jorge Mañach, 1898~1961)는 역작 『초테오에 관한 탐구(Indagación del choteo)』에서 이를 "그 어떤 권위나 규범도 진지하게 받아들이기를 완강히 거부하는 체제 전복적인 태도"라고 분석한 바 있습니다. 오랜 식민 지배와 잦은 정권 교체, 제국주의(帝國主義)의 간섭이라는 무거운 역사적 억압 속에서 쿠바 민중은 분노와 좌절에 침몰하는 대신, 지배 계급의 위선을 희화화하고 상황을 우스꽝스럽게 희석하는 초테오를 통해 억눌린 감정을 해소해 왔습니다. 특히 1990년대 혹독한 경제난을 겪었던 ‘특별 기간’ 동안, 무대 위 연극의 시각적 초테오나 일상 대화에 녹아든 뼈 있는 농담은 사회적 긴장감을 완화하고 사람들의 숨통을 틔워주는 가장 강력한 심리적 방어 기제(防禦機制)로 작동했습니다.
▶ 아프리카의 영혼이 깃든 우주적이고 긍정적인 파동, 아체(Aché: The Cosmic and Positive Wave Infused with the African Soul) : 두 번째 키워드인 ‘아체(Aché)’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쿠바인의 영적 기반과 일상적 세계관(世界觀)을 지배하는 가장 핵심적인 에너지 개념입니다. 본래 서아프리카 요루바(Yoruba) 전통 종교의 우주론적 개념에서 유래한 어휘로, 노예무역을 통해 끌려온 아프리카인에 의해 전파되었습니다. 이후 식민 지배자들의 종교인 가톨릭(Catholicism) 성인 숭배와 결합하면서 쿠바 고유의 혼합 종교(混合宗敎)인 산테리아(Santería)의 중심 사상으로 굳건히 자리 잡았습니다. 쿠바 사회에서 아체는 우주 만물을 구성하고 유지하는 ‘근원적이고 신성한 생명력’을 뜻합니다. 초월적인 신의 영역뿐 아니라 대자연의 요소, 특정 장소, 인간의 육체와 정신 속에도 깃들어 있다고 여겨집니다. 쿠바인은 진심이 담긴 긍정의 말, 영혼을 깨우는 노래, 역동적인 춤사위, 심장 박동을 닮은 북소리를 통해 몸속의 아체가 외부로 방출된다고 믿습니다. 따라서 누군가에게 "아체를 가졌다(tiene un aché)"라고 칭찬하는 것은 곧 그 사람이 타인에게 선한 영향력을 미치며 행운과 번영의 에너지를 지녔음을 인정하는 최고의 찬사입니다.
▷ 라이트 럼 마스터: 이타적 연대로 빚어낸 축복(Light Rum Masters: Blessings Brewed through Altruistic Solidarity) : 아체의 신성한 에너지는 공동체의 형제애를 다지고 소중한 지식을 전수하는 과정에서도 강력한 매개체로 작동합니다.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2022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쿠바의 ‘라이트 럼 마스터의 지식(Knowledge of the light rum masters)’입니다. 럼(Rum) 제조는 단순한 기계적 알코올 증류(蒸留) 공정이 아닙니다. 최고 장인(匠人) 공동체는 당밀 발효부터 오크통(Oak barrel) 내부의 미세한 온도 변화, 숙성 및 블렌딩(Blending) 기술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노하우를 구전(口傳)과 도제식 훈련으로만 전수합니다. 유네스코가 주목한 지점은 이들 장인 공동체가 개인의 영달이나 상업적 이익을 뛰어넘어, 국가의 농산업적 유산을 보존하기 위해 이타적이고 끈끈한 형제애를 형성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마스터가 후학에게 빛깔과 점도를 식별하는 비법을 전수하는 경건한 과정은, 쿠바인이 말하는 축복의 생명력인 '아체'가 장인의 영혼에서 제자의 영혼으로 깊숙이 흘러 들어가는 신성한 교감 의식과 같습니다.
▶ 척박한 현실에서 피어난 창조적 생존술과 인내의 기록, 인벤타르(Inventar: Creative Survival Tactics and Records of Patience Blooming in Harsh Realities) : 쿠바 사회를 관통하는 세 번째 핵심 키워드는 ‘인벤타르(Inventar)’입니다. 사전적으로 ‘발명하다’ 혹은 ‘창조하다’라는 의미지만, 쿠바의 일상 문맥에서는 "가진 것이 거의 없는 극한의 제약 속에서도 놀라운 기지와 창의력을 발휘해 기어코 살아남는 비상한 능력"을 뜻합니다. 종종 ‘레솔베르(Resolver, 해결하다)’나 ‘루차르(Luchar, 투쟁하다)’와 동의어로 쓰이는 인벤타르는 만성적인 결핍 속에서 체득한 눈물겨운 생존 철학입니다. 특히 1990년대 초 대외 무역의 80%가 증발하고 미국의 강력한 금수 조치(Embargo)가 옥죄던 ‘특별 기간’ 당시, 쿠바인은 버려진 부품으로 가전제품을 고치고 지붕 위에서 가축을 기르며 자원을 극한까지 재활용해야 했습니다. 대체재(代替材) 발명과 물물교환을 통한 사회적 안전망 구축은 인벤타르 정신이 빚어낸 숭고한 연대의 결과물입니다.
▷ 지형적 악조건을 역이용한 건축과 방어(Architecture and Defense Exploiting Geographic Adversity) : 쿠바인이 험난한 자연지형 속에서 창조적 생존술을 발휘한 흔적은 유네스코 세계유산 ‘쿠바 남동부 최초의 커피 플랜테이션 고고학적 경관(Archaeological Landscape of the First Coffee Plantations in the South-East of Cuba, 2000년 등재)’에서도 역력히 드러납니다. 18세기 후반 노예 혁명을 피해 시에라 마에스트라(Sierra Maestra) 산맥으로 피신한 프랑스계 농장주들은 급경사 지대에 계단식 밭을 일구고, 계곡물을 끌어오기 위해 거대한 돌 수로(水路)를 건설하는 고도의 토목 기술을 선보였습니다. 이는 척박한 산악 지형의 제약을 공학적 기지로 극복한 뛰어난 인벤타르의 흔적입니다. 또한 끊임없는 외부 침략을 방어하기 위해 건설된 ‘아바나 옛 시가지와 요새(Old Havana and its Fortification System, 1982년 등재)’와 ‘산티아고 데 쿠바의 산 페드로 데 라 로카 성(San Pedro de la Roca Castle, Santiago de Cuba, 1997년 등재)’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특히 산 페드로 데 라 로카 성은 해안가의 가파른 곶(Cape)이라는 지리적 악조건을 천혜(天惠)의 방어선으로 역이용해 절벽을 따라 층층이 축조된 난공불락의 요새로, 서양 건축술과 지형을 결합한 뛰어난 공간적 인벤타르의 표본입니다.
▷ 시대의 격랑에 맞선 투쟁의 기록(Records of Struggle Against the Turbulence of the Times) : 불합리한 세상의 질서 속에서 신념을 행동으로 옮긴 인물들의 치열한 '루차르(투쟁)'는 세계기록유산(Memory of the World)을 통해 후대에 영감을 줍니다. 2013년 공동 등재된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의 생애와 업적(Documentary Collection “Life and Works of Ernesto Che Guevara”)’은 불평등을 타파하려 했던 체 게바라(Ernesto "Che" Guevara, 1928~1967)의 생애를 증언합니다. 방대한 원본 일기와 서신은 한 청년이 게릴라(Guerrilla) 지도자로 성장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귀중한 사료입니다. 아울러 쿠바 독립의 사도(Apostle) 호세 마르티(José Martí, 1853~1895)의 ‘호세 마르티 페레스 기록물(José Martí Pérez Fonds, 2005년 등재)’ 역시 스페인 제국의 압제에 맞서 민중의 자결권을 설파한 쿠바 정신의 거대한 뿌리입니다.
▶ 굴복하지 않는 의지와 연대, 쿠바(Cuba)가 전하는 삶의 철학(Unbreakable Will and Solidarity, The Philosophy of Life Conveyed by Cuba) : 지금까지 우리는 ‘초테오(Choteo)’, ‘아체(Aché)’, ‘인벤타르(Inventar)’라는 세 가지 빛나는 언어적 열쇠를 통해 쿠바인의 깊숙한 내면 풍경과 경이로운 문화유산들의 진면목을 살펴보았습니다. 유럽의 식민 지배, 아프리카인의 강제 이주, 제국주의의 간섭과 만성적 경제 위기라는 험난한 역사의 질곡(桎梏) 속에서도 쿠바인은 삶의 다채로운 색채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강압적 권위 앞에서는 전복적 해학인 초테오로 공포를 무력화시켰고, 우주를 관통하는 생명 에너지 아체를 통해 슬픔을 치유하며 형제애적 결속을 다졌습니다. 고립무원(孤立無援)의 벼랑 끝에서도 기상천외한 창조적 생존술인 인벤타르를 발휘해 기어이 혹독한 오늘을 이겨냈습니다. 눈부신 태양과 끝없이 일렁이는 바다, 낡은 건물들 사이로 흘러나오는 경쾌한 선율 속에서 쿠바인은 전 세계에 강력한 메시지를 던집니다. 그것은 "아무리 가혹하고 고통스러운 환경일지라도 결코 운명에 굴복하지 않으며, 고유한 리듬과 연대를 통해 삶을 온전히 향유하는 법"입니다. 절망의 나락에서도 기어코 희망의 씨앗을 싹틔우는 이들의 긍정적이고 강인한 태도는, 오늘을 살아가는 쿠바인의 지혜가 응축된 격언에 고스란히 스며들어 있습니다.
A mal tiempo, buena cara.
In bad weather, a good face.
궂은 날씨에도 밝은 얼굴을 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