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녕하세요, 유네스코 세계유산(UNESCO World Heritage) 독자 여러분! 오늘은 과라니족의 후손이자 과라니의 땅(Land of the Guaraní), 파라과이(Paraguay)로 떠나보겠습니다. 파라과이란 국명은 과라니어(Guarani language) '바다로 향하는 물' 혹은 '위대한 강에서 태어난 물'이라는 뜻에서 유래한 것으로, 국명 자체가 2549km에 달하는 파라과이 강(Río Paraguay)을 은유합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헤수스 데 타바랑게와 파라나의 산티시마 트리니다드 예수회 선교단 유적(Jesuit Missions of La Santísima Trinidad de Paraná and Jesús de Tavarangue, 1993)'은 17~18세기 유럽 예수회 선교사들과 과라니족 원주민이 함께 이룩한 자치 공동체로, 남미 식민 시대 인류 문화 교류의 정수를 보여줍니다. 남미의 유이(唯二)한 내륙국(The only two landlocked countries in South America), 파라과이로 떠나보시겠습니까? 테마여행신문 TTN Korea 유네스코 세계유산(UNESCO World Heritage) 시리즈와 함께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멋진 여행을!
▶ 이질성을 껴안고 영혼의 선율로 피어나다, 조파라(Jopara, Embracing Heterogeneity and Blooming into a Melody of the Soul) : 언어는 그 언어를 사용하는 집단이 세상을 바라보는 창(窓)이자, 역사적 경험이 축적된 가장 정교한 기록 보관소입니다. 파라과이 인구의 약 77% 이상이 능통하게 구사하며 일상 대화의 주축을 이루는 조파라(Jopara)는 본래 과라니어로 ‘혼합된 것’ 혹은 ‘섞인 찌개’를 의미하는 단어에서 유래했습니다. 이웃한 중남미 국가들이 식민 지배를 거치며 토착 언어를 잃어버리고 스페인어나 포르투갈어라는 단일 지배 언어 체계로 완전히 편입된 것과 달리, 파라과이에서는 정복자의 언어인 스페인어가 토착 언어인 과라니어의 문법 구조 및 어휘와 부드럽게 융합(融合)되었습니다. 예컨대 파라과이 사람들은 스페인어 동사에 과라니어 특유의 간절함과 부드러움을 나타내는 접미사 ‘나(na, 제발)’를 결합하여 “파사메나(Pasámena, 제발 건네주세요)”나 “베니나(Venína, 제발 와주세요)”라고 표현합니다. 이는 외부의 충격을 배척하거나 일방적으로 동화되는 대신, 이질적인 요소를 포용하여 자신만의 고유한 언어적 융통성으로 재창조해 내는 파라과이 특유의 문화적 저항이자 융합의 미학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 슬픔을 승화시킨 선율: 과라니아의 탄생(A Melody Sublimating Sorrow: The Birth of Guarania) : 이러한 조파라적 융합의 정신이 텍스트의 경계를 넘어 청각적 예술로 극적으로 승화된 결과물이 바로 2024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된 파라과이 영혼의 소리, 과라니아(Guarania)입니다. 1920년대까지만 해도 파라과이에서 유행하던 음악은 체코(Czech) 등 유럽에서 건너온 빠르고 경쾌한 폴카(Polka) 리듬이 주를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1925년, 파라과이의 천재적인 음악가 호세 아순시온 플로레스(José Asunción Flores, 1904~1972)는 식민 지배의 여파와 척박한 삶 속에서 살아가는 민중들의 내면 깊은 곳에 자리한 애환과 슬픔을 표현하기에 유럽의 경쾌한 리듬은 턱없이 부족하다고 느꼈습니다. 이에 그는 기존 파라과이 전통 폴카의 선율을 6/8박자의 느리고 우수 어린 리듬으로 변형시켜 완전히 새로운 형태의 음악 장르인 과라니아를 탄생시켰습니다. 특히 그의 초기 대표작인 ‘헤후이(Jejuí)’의 악보는 파라과이 국민들의 영혼을 대변하는 국가적 상징으로 자리 잡았으며, 2025년 아순시온(Asunción)에서 열리는 주니어 팬아메리칸 게임(Junior Pan American Games) 메달 디자인의 핵심 모티브로 채택될 만큼 파라과이인들에게 엄청난 자부심을 안겨주고 있습니다. 원주민의 한(恨)이 서린 정서가 스페인 기타와 유럽식 하프라는 서구의 악기를 빌려 연주되는 과라니아는 그 자체로 가장 완벽한 음악적 조파라의 결정체라 할 수 있습니다.
▶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엮어낸 연대와 저항의 씨앗, 테레레(Tereré, Seeds of Solidarity and Resistance Woven Under the Hot Sun) : 파라과이를 이해하는 두 번째 핵심 키워드인 테레레(Tereré)는 열대와 아열대가 교차하는 파라과이의 극단적인 자연환경과 이를 극복해 낸 사람들의 끈끈한 사회적 연대 의식을 동시에 웅변하는 완벽한 문화적 상징입니다. 파라과이 사람들은 섭씨 40도를 가볍게 넘나드는 살인적인 더위, 즉 과라니어로 '하쿠(Haku)'라 불리는 가혹한 기후 속에서도 불평하기보다는 시원한 그늘 아래 모여 앉아 전통 허브 음료인 테레레를 나누어 마시며 일상의 여유와 위안을 찾습니다. 2020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된 ‘포아 냐냐(Pohã Ñana) 문화의 전통 지식과 테레레 음주 관습’은 파라과이의 가장 대중적이면서도 신성한 의식입니다. 파라과이인들은 예로부터 약효가 있다고 믿어온 포아 냐냐라는 전통 허브를 절구에 찧어 찬물에 우려낸 뒤, 소뿔이나 나무로 조각된 구암파(Guampa)라는 잔에 예르바 마테(Yerba mate) 잎을 가득 채워 마십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하고 핵심적인 통찰은 이 음료가 결코 개인의 갈증을 해소하기 위한 독단적인 소비 행위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가족, 친구, 동료들이 동그랗게 모여 앉아 ‘봄비야(Bombilla)’라는 금속제 필터 빨대 하나를 한 입씩 돌려가며 마시는 이 행위는, 상대방에 대한 무한한 신뢰와 계급을 초월한 평등함을 맹세하는 파라과이식 사회적 접착제라 할 수 있습니다.
▷ 실오라기에 얽힌 결사항전: 60줄무늬 폰초 파라이(The Life-or-Death Struggle Woven in Threads: The Poncho Para'í de 60 Listas) : 이러한 신체적 치유와 공동체적 연대의 정신은 단지 마시는 음료에서 멈추지 않고, 피비린내 나는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파라과이인들의 체온을 유지하고 목숨을 지켜주었던 전통 직물 문화로 숭고하게 이어집니다. 2023년 유네스코 긴급보호대상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된 폰초 파라이 데 60 리스타스(Poncho Para'í de 60 Listas)가 바로 그 위대한 역사의 생증인(生證人)입니다. 피리베부이(Piribebuy) 시를 중심으로 전승되어 온 이 수공예 외투는 단순한 방한용 전통 의류를 넘어, 파라과이의 뼈아픈 수난사와 국민적 회복력을 촘촘히 엮어낸 국가적 저항의 상징입니다.
▶ 고통의 늪에서 평화와 인권의 금자탑을 쌓다, 트랑킬로파(Tranquilopa, Building a Monument of Peace and Human Rights from the Swamp of Agony) : 파라과이 사람들은 피할 수 없는 커다란 난관이나 곤란한 상황에 직면했을 때 "트랑킬로파 체라아(Tranquilopa chera'a, 다 괜찮아 내 친구야, 걱정하지 마)"라고 말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세 번째 키워드인 트랑킬로파(Tranquilopa)는 스페인어로 평온함을 뜻하는 트랑킬로(Tranquilo)에 과라니어의 '모든 것'을 뜻하는 접미사 파(-pa)가 결합된 단어로, 겉보기에는 한없이 태평하고 수동적인 운명론적 태도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면을 한 꺼풀만 벗겨보면, 인구의 절반 이상을 앗아간 잔혹한 전쟁과 길고 어두웠던 독재라는 짙은 억압의 터널 속에서도 끝끝내 희망의 끈을 놓지 않으려는 파라과이인 특유의 강인한 생명력과 '능동적 체념의 철학'이 깊숙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폭력과 착취를 뛰어넘어 인간의 기본적 존엄성을 회복하고 평화를 구축하고자 했던 이들의 숭고한 정신은 파라과이 영토에 새겨진 대표적인 유네스코 세계유산과 세계기록유산에 고스란히 각인되어 역사를 증언하고 있습니다.
▷ 밀림 속 유토피아: 융합과 포용의 예수회 선교 구역(Utopia in the Jungle: The Jesuit Missions of Fusion and Embrace) : 그 찬란한 첫 번째 증거는 1993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파라과이의 유일한 세계유산, 라 산티시마 트리니다드 데 파라나와 헤수스 데 타바랑게의 예수회 선교 구역(Jesuit Missions of La Santísima Trinidad de Paraná and Jesús de Tavarangue)입니다. 17세기부터 18세기에 걸쳐 기독교의 가치를 전파하고자 당도한 예수회(Jesuits) 수사들은 브라질의 상파울루(São Paulo)에서 밀려드는 반데이란치스(Bandeirantes, 포르투갈계 노예 사냥꾼)들과 스페인 제국주의가 강요하던 가혹한 강제 노역 착취 제도인 엔코미엔다(Encomienda)로부터 원주민 과라니족을 보호하기 위해, 파라나 강 유역의 깊고 척박한 밀림 속에 ‘레두시온(Reducciones)’이라 불리는 일종의 자치적인 유토피아 공동체를 건설했습니다. 이들은 원주민들에게 유럽식 문명과 기독교의 교리를 무력으로 강요하며 일방적으로 복종시킨 것이 아니라, 카시케(Cacique)라 불리는 원주민 엘리트들이 마을 위원회(Cabildo)를 구성해 행정과 종교 업무를 수행하게 하는 등 자치권을 부여했습니다. 더불어 예르바 마테의 집단 재배 등 원주민들의 고유한 전통 산업과 예술적 재능을 존중하는 등, 당시로서는 상상조차 하기 힘든 온건하고 융합적인 공동체를 무려 150년 가까이 성공적으로 실험했습니다.
파라과이 이타푸아(Itapúa) 주에 위치한 라 산티시마 트리니다드 데 파라나 선교 구역은 약 8헥타르에 달하는 광활한 면적을 자랑하는 가장 완성도 높은 유적입니다. 1706년에 설립되어 1745년경 밀라노(Milano) 출신의 예수회 건축가 후안 바우티스타 프리몰리(Juan Bautista Prímoli, 1673~1747)의 설계로 완성된 웅장한 대석조 성당 터는 유럽의 바로크(Baroque) 양식과 로마네스크(Romanesque) 양식을 토대로 하면서도, 지역 원주민들의 정서가 짙게 묻어나는 장식들로 가득합니다. 특히 성당 내부의 화려한 부조 장식에는 천사들이 서양의 하프나 바이올린뿐만 아니라 아메리카 대륙 고유의 악기인 마라카스(Maracas)를 연주하는 모습이 조각되어 있어, 그들이 추구했던 놀라운 문화적 포용력을 시각적으로 입증합니다. 이와 인접한 헤수스 데 타바랑게 선교 구역은 1767년 스페인 왕실에 의한 예수회 추방령으로 인해 미완성으로 남은 고고학적 유적이지만, 남미 지역의 선교 건축물 중에서는 유일무이하게 기독교와 이슬람 건축 양식이 절묘하게 혼합된 무데하르(Mudéjar) 양식을 차용하여 다소 이국적인 세잎클로버 아치(Trefoil arch) 구조를 보여줌으로써 문명의 충돌이 아닌 조화의 극치를 오늘날까지 증명하고 있습니다.
▶ 바람이 전하는 시간의 지문, 치유와 공존의 길을 묻다(The Fingerprints of Time Carried by the Wind, Asking the Path of Healing and Coexistence) : 지금까지 우리는 스페인어와 과라니어가 하나로 섞여 공존하는 조파라, 무더위 속에서 하나의 빨대를 공유하며 연대하는 테레레, 그리고 극심한 고통의 역사 속에서도 낙천성과 평화를 갈구하는 트랑킬로파라는 세 가지 강력한 과라니어 키워드를 통해 파라과이라는 국가가 지닌 깊고도 숭고한 문화적 저력을 다각도로 조명해 보았습니다. 제국주의의 억압을 융합의 미학으로 풀어내어 슬픔을 노래한 과라니아의 선율은 파라과이인들의 다친 영혼을 치유했고, 혹독한 전쟁의 참상과 잃어버린 군인들의 넋을 60개의 흑백 줄무늬 폰초로 엮어낸 여성 장인들의 피땀 어린 직물 문화는 이 민족이 지닌 놀라운 인내와 회복력을 전 세계에 증명해 주었습니다.
Ojeity yvyra guasu, opyta hapo.
A great tree may fall, but its roots remain.
거대한 나무는 쓰러질지라도, 그 뿌리는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