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 역대 제왕들이 천년간 읽어온 통치 교본
당 태종의 치세를 정선한 『정관정요』는 정관(당 태종의 연호) 시대에 쓰이지 않았다. 당나라의 사관 오긍은 무측천 혼란기 이후 현종 대에 이르러 제왕에게 바칠 정치 사례 정선집이 절실히 필요함을 깨닫고 태종의 치세를 거리낌 없는 직필로써 적어 내려간 전10권 분량의 『정관정요』를 집필했다. 그 시기는 현종이 국정 초반의 열린 개혁 정치를 뒤로하고 간언을 무시한 채 폐쇄와 독단으로 흐르며 전횡을 일삼던 시기다. 최고의 치세를 이루었다는 당 태종도 군신들의 합당한 반대에 귀를 막고 고구려 정벌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인 일이 있다는 점을 상기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렇게 제왕의 과오까지 직필한 특유의 필법으로 처음에는 당 조정의 인가를 받지 못했던 『정관정요』는 현종 이후 후대에 많은 군신의 공감을 얻었고, 당나라 말기부터는 제왕과 신료들의 필독서가 되었다. 당 헌종憲宗, 당 문종文宗, 당 선종宣宗 등 역대 당나라 군주는 물론 송 인종仁宗과 금 세종世宗, 원 세조世祖, 명 신종神宗, 청 고종高宗 등 송, 금, 원, 명, 청에 걸쳐 중국 사서史書에는 제왕과 신료들이 『정관정요』를 읽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우리나라 역사 기록에는 『고려사』 2권 「광종세가」 원년(950) 1월 1일 조에 과거제와 노비안검법 등을 시행한 광종光宗이 즉위 직후 『정관정요』를 자신의 국정 교과서로 삼았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그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신라 말기부터 『정관정요』의 전고를 언급하는 사료가 있어 우리나라에서도 이미 중국과 비슷한 시기에 『정관정요』가 읽히고 있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이후 고려 예종睿宗이 애독했고, 『고려사』 곳곳에 『정관정요』에 관한 기록이 등장한다. 조선시대에도 경연의 교재이자 유생들의 필독서로 읽히며 세종, 단종, 세조, 성종, 중종, 선조, 인조, 효종, 숙종, 영조, 종조, 순조 대에 걸쳐 주해, 교정, 경연, 진강進講 기록이 거듭 발견된다. 이는 『정관정요』가 당나라에서 처음 널리 읽힌 시기부터 우리나라에서도 정치 교본으로 읽혀온 사실을 말해준다. 또한 『정관정요』는 일본에서도 800년 경 천황 환무桓武 대부터 천황을 비롯해 아시카가와 도쿠가와 등 일본을 지배한 여러 가문에서 통치 교본으로 읽혀 사실상 동아시아에서 10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제왕학의 성전으로 자리매김했다. 또한 시대가 바뀐 지금까지도 많은 나라에서 “경영학의 원리를 담고 있는 훌륭한 동양고전”(하버드 경영대학원)으로 꼽히며 정치뿐 아니라 기업, 교육 등 여러 분야에서 『정관정요』의 리더십을 이야기한다.
치세는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정관정요』가 이렇게 오랜 세월 국경을 초월해 동아시아의 제왕학 교과서로 자리 잡고 권위를 이어온 데는 당 태종의 잘못과 오류를 얼마간 정직하고 과감하게 써내려간 사관 오긍의 동호직필 정신과 함께, 당 태종을 마주한 수많은 이의 간언과 그를 채택하고 조화시킨 당 태종의 통치 이념이 있었다. 태종이 자신을 폭군 수 양제와 은 주왕에 빗대며 낙양 궁궐 수리 중지를 읍소해 역린逆鱗을 거스른 장현소에게 명주 200필을 하사한 일화는 유명하다.
위진남북조 말기의 혼란과 수나라의 패망을 목도한 당 태종은 “창업과 수성守成 중 무엇이 더 어렵소?”라는 질문을 자주 했다. 또 수성에 있어 흥망성쇠의 원인에 깊이 천착했다. 혁신에 목매기보다 초심을 상기하고, 기본을 지키는 데 충실하고자 했다. 역사에 기록된 망국의 징조를 반복하지 않는 것, 그것이 수성의 기본이다. 그리고 그 위에 민본에 입각한 통치 철학이 얹혀 치세가 이루어진다. 당 태종은 늘 망국의 군주를 거울삼아 스스로를 경계하는가 하면, 군신 간에 신뢰관계를 쌓고자 했고 인의의 정치를 펼쳐 민심을 얻고자 했으며, 백성의 삶을 풍요롭게 하며 전쟁보다 화친과 포용을 추구하고자 했다. 『정관정요』에는 역대 왕조의 흥망에 관한 전고가 수없이 등장한다. 그를 통해 우리는 나라(혹은 조직)의 존립을 위태롭게 하는 리더의 공통된 특징을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 충신의 간언을 듣지 않고 자신의 잘못된 신념을 절대화한다.
- 탐욕에 젖어 백성을 수탈하고 폭력을 일삼는다.
- 전쟁을 좋아하여 끊임없이 백성을 전쟁터로 내몬다.
- 여생과 음주에 빠져 나랏일을 돌보지 않는다.
- 의복과 수레를 화려하게 장식하고 대형 토목공사를 벌인다.
- 독단으로 전횡을 일삼으며 나랏일을 사사로운 개인의 일로 여긴다.
- 간신배에게 나라를 맡기고 자신의 잘못은 모두 남 탓으로 돌린다.
저자 오긍은 이런 역사의 잘잘못으로부터 배움을 얻고자 한 태종의 면모에 주목한다. 우리 역시 이런 역사의 가르침을 모르는 게 아니다. 그러나 이를 단지 앎의 차원에 머물게 하고, 현실과 앎의 공백을 공허한 수사로 메워 결국 패망의 길에 접어든 사례 또한 숱하게 알고 있다. 따라서 『정관정요』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지점은 당 태종의 언행과 훌륭한 간언들 사이에서 묵묵히 드러나는 그의 실천 정신이다. 정관지치는 부단한 반성과 수양으로 이룬 치세의 ‘과정’에 대한 후세의 평가이며, 그와 다른 시대를 사는 우리는 당연하게도 그 결과가 아닌 과정에서 현재적 의미를 발견하고, 과오를 바로잡는 지혜를 배울 수 있다.
새롭게 옮긴 『정관정요』 신완역판
역대 판본의 오류를 바로잡고 원전의 묘미를 살리다
『정관정요』는 모두 10권 40편으로 구성돼 있다. 권1은 ‘군주론君主論’으로, 임금이 견지해야 할 원칙과 조정의 중추 기구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권2는 ‘현신론과 간언론’이다. 당 태종을
현명하게 보좌한 현신의 사적과 간언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권3은 ‘군신관계론’이다. 임금이 유능한 관리를 선발하여 서로 올바른 이치를 권고함으로써 공생공영共生共榮의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는 내용이다. 권4는 ‘태자교육론’으로, 보위를 승계할 태자를 훌륭하게 교육해야 나라의 미래가 보장된다는 내용이다. 권5는 ‘도덕론’이다. ‘인의’는 임금의 도덕, ‘충의’는 신하의 도덕, ‘효우’는 자식과 형제의 도덕, ‘공평’은 관리의 도덕, ‘성신’은 임금과 신하 간 또는 임금과 백성 간의 도덕을 가리킨다. 권6은 ‘자질론’이다. 통치자가 반드시 갖춰야 할 자질과 반드시 버려야 할 자질을 이야기한다. 권7은 ‘학문과 예절’이다. 문치文治를 지향하고, 역사를 통해 교훈을 얻을 것을 강조한다. 권8은 ‘실무론’으로 농사, 형벌, 사면, 조공, 흥망을 어떻게 조화롭게 처리할 것인가에 관한 논의다. 권9는 ‘국방론’이다. 정벌에 나서고 변방을 지킬 때 군사를 부리는 요령이다. 권10은 결론인 ‘경계론警戒論’으로 임금은 과도하게 집착해서는 안 되며 끝까지 초심을 유지할 것을 요구한다.
이처럼 체계적인 구성과 내용은 『정관정요』의 형식과도 조화를 이룬다. 『정관정요』는 일반적인 대화, 서술, 장편 상소문과 조칙이 어우러져 있다. 특히 상소문과 조칙에 쓰인 사륙변려문四六騈儷文은 한문에서 형식과 수사가 가장 화려한 문체로, 가지런한 구법, 글자 배열과 대구를 강구해 안정감과 논리성을 강화한다. 이러한 대구의 특징이 잘 드러나도록 이 판본에서는 어휘 선택과 문장 구성에 심혈을 기울였고, 저본인 『사고전서』본 『정관정요』를 충실하게 재현하고자 했다. 새롭게 출간한 『정관정요』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1. 『사고전서』본의 원문을 근거로 한자를 하나하나 확인하여 기존 번역본의 일부 누락된 구절과 잘못된 글자, 번역 오류 등을 확인했고, 단락 나눔도 정확하게 재조정했다.
2. 인명, 관직명, 지명, 고사성어, 전고典故 등에 상세한 각주를 달았다.
3. 전체 40편에 새로운 해설을 붙였다. 고전 읽기를 통해 옛 고전에 포함된 현대적 의미와 보편적 가치를 새롭게 발굴하고자 함이다.
4. 『정관정요』 상소문과 조칙의 대구를 번역할 때, 그 형식과 의미가 잘 살아나도록 애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