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범죄피해자가 될 수 있다
이 책은 모두를 위한 생존 안내서다
피해자이거나 예비 피해자
범죄피해 생존자가 쓴 500일간의 투쟁기
2022년 5월 22일 새벽 5시경, 김진주는 귀갓길에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던 중 일면식도 없는 남성에게 돌려차기로 가격당하고 수차례 짓밟힌 채 방치된다. 건물 입주민이 피범벅으로 쓰러져 있던 그를 발견한 덕에 김진주는 간신히 병원으로 이송돼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김진주는 전신이 마비됐고, 필름이 잘린 것처럼 사건 당시 기억을 잃었다. 친한 사람들과 즐겁게 시간을 보낸 평범한 날이었을 뿐이다. 그 누구도 내게 닥치리라 예기치 못한 사건이 벼락처럼 그의 삶 한가운데에 내리꽂혔다. 김진주는 기적적으로 마비가 풀렸고 다시 걸을 수 있었다. 그는 그날 직감한다. 인생이 송두리째 달라질 것이며, “더 이상 평범하게 살 수 없다”는 것을. 이게 기적이라면, 그는 새롭게 시작된 삶을 자신과 같은 범죄피해자들을 돕는 데 쓰기로 결심한다.
이 책은 김진주가 가해자와 가해자 중심주의적 사회, 법, 제도에 맞서 싸운 500일간의 투쟁기다. 소위 ‘묻지 마 범죄’로 분류되었던 사건은 김진주의 투쟁을 통해 ‘부산 돌려차기 강간 살인미수 사건’이라 명명되었고, ‘이상동기 범죄’ 혹은 ‘무차별 범죄’로 다시 쓰였다. 이 책은 범죄피해자라면 알아야 하는, 그러나 여태 범죄피해자 입장에서 생생하게 증언된 바 없던 일들을 쏟아낸다. 우리는 설마 나한테 그런 일이 생기겠냐며 태연스레 범죄 시사 프로그램을 시청하겠지만, 김진주는 단호히 말한다. “범죄피해를 당하지 않는 방법 따윈 없다. 우리는 피해자이거나 예비 피해자일 뿐이다.” 다만 범죄피해에 대처하는 방법은 있다. 피해자로서 살아남기 위해 그가 몸소 겪은 결정적인 이야기들이 피해자 중심주의적 관점으로 갈급히 전해진다. 범죄피해 생존자가 다음 생존자에게 전하는 긴급 생존 안내가 이 책을 빼곡히 채운다.
살인미수에서 강간 살인미수로
공론화로써 죄명을 바꾸다
상황은 악화 일로를 걸었다. 상해로 이전처럼 걸을 수 없었고, 트라우마로 기억을 잃은 김진주의 증언은 과장이거나 거짓이 아니냐는 의심을 받았다. 또한 사건이 검찰로 넘어가자 피해자는 사건 당사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수사 절차에서 소외됐다. 가해자의 구속 소식부터 재판 날짜까지 피해자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형사는 피해자에게 가해자가 성폭력을 시도했는지 물었고, 피해자가 확답할 수 없는 사안임에도 초동 수사는 진행되지 않았다. 김진주도 처음부터 문제 해결에 앞장선 건 아니었다. 심신이 불안정했고 두려움에 도망치고 싶었으며, 사건이야 어련히들 해결해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가해자의 얼굴이라도 알아야겠다고 작정하고 참석한 1심 첫 번째 공판에서 ‘사각지대의 7분’을 알게 된다. 여태 누구도 그에게 말해주지 않았던 이야기다. 증거 영상에서 가해자는 온몸이 뻣뻣하게 굳은 김진주를 CCTV에 잡히지 않는 사각지대로 끌고 간다. 검사는 이를 지적하며 속옷 DNA 재감정을 신청하지만 감정 결과 DNA는 나오지 않는다. 이에 안도하기도 잠시, 이후 사건 제보자는 그를 발견했을 때 하의가 벗겨져 있었다고 진술했으며, 김진주 또한 입원 당시 항문 출혈 증상이 있었다는 점을 미심쩍게 생각한다. 성범죄를 의심할 만한 심증이 하나둘 밝혀짐에도 가해자는 성범죄를 극구 부인했고, 2심 재판부 또한 공소장에 없는 죄명으로 성범죄 검사를 허용할 수 없다며 추가 DNA 감정을 불허한다.
하지만 김진주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그는 사건 해결과 피해자의 회복은 진실을 밝히는 것과 직결된다고 말하며, 살인미수를 제대로 처벌하려면 그 동기를 알아야 하고 그로써 양형 기준을 분명히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김진주는 사건 자료를 보기 위해 민사소송을 제기하고, 문서 송부를 촉탁해 1268장의 서류뭉치를 받아냈다. 한 줄 한 줄 밑줄을 긋고 진상을 파악하자, 거짓말로 점철된 가해자의 증언을 뚫고 진실을 길어 올리려면 더 철저한 조사가 이뤄져야 한다는 점과 따라서 강력히 진상 규명을 요청해야 한다는 점이 분명해진다. 그는 피해 사실을 구체적으로 명시하고 사진을 첨부해 온라인 커뮤니티에 글을 올린다. 지인들에게 ‘좋아요’를 구걸하는 자신이 비참하다가도 이를 악물고 공론화에 매진한다.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던 사건에 차츰 언론이 주목했고, 마침내 2심 두 번째 공판을 앞두고 판도를 바꿀 일이 일어난다.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해당 사건을 다룬 회차가 방영된 것이다. 프로그램은 성범죄에 제기된 심증을 상세히 다뤘고, 방송 이후 7만여 장의 탄원서가 모인다. 이윽고 재판부는 DNA 재감정을 허가했으며, 2023년 5월 31일, “가해자의 Y염색체가 청바지 안쪽 면의 허벅지 부분에서 검출”되었음이 발표된다. 진실을 좇는 집념은 과도한 집착이라는 핀잔으로 이어지기도 했지만, 김진주는 멈추지 않았고 포기하지 않았다. 그로써 ‘살인미수’ 사건은 ‘강간 살인미수’ 사건으로 재호명된다.
김진주는 언론에 자료를 제공하면서도 과연 이 방법이 맞는지, CCTV 영상처럼 범죄 장면이 여실히 담긴 자료를 노출해도 되는지 고민을 거듭한다. 대중에게 호소했을 때 자칫하면 자극적인 이야깃거리로 소모되기만 할지도 모르고, 자신을 내세우고 피해를 까발리는 일에는 위험 요소가 도사렸다. 그럼에도 김진주는 공론화의 힘, 나 말고 여럿이 모여 공론장을 만들 때의 힘을 믿었다. 혼자서는 가닿을 수 없는 진실도 언론과 사회가 제대로 조명할 때 그 실마리를 잡을 수 있다는 것을 그는 몸소 증명해낸다.
가해자 중심주의에서 피해자 중심주의로
진정한 회복적 사법을 외치다
가해자의 상고로 3심이 열렸다. 피해자 측은 양형이 부당하다는 사유로 상고할 수 없기에, 가해자 단독으로 상고한 재판이었다. 여기까지 오며 김진주를 가장 분노케 했던 것은 사회적 시선과 법, 제도 모두 가해자 중심이라는 것이었다. 익명의 사람들은 “중립 기어 박는다”는 댓글을 달고, 가해자 권리 보장을 위한 커뮤니티 ‘옥바라지’가 신설되는가 하면, 가해자는 사건의 당사자라는 이유로 사건 자료의 열람 등사권이 보장되지만 피해자는 재판일조차 고지받지 못한다. 가해자의 인권 보호 절차는 마련되어 있는데, 피해자는 진술 오염 가능성 때문에 정보 공유에서 배제될뿐더러 일관된 진술을 요구받고, 때로는 심문당하듯 자신의 피해를 증명해야 한다. 가해자가 제출한 반성문은 감형 사유가 되고, 가해자가 공탁이라도 하면 피해자 지원금은 줄어든다. 피해자를 향한 눈초리와 위선은 피해자를 고립시키며 사방에서 옥죄여온다.
가해자는 이전에 저지른 범죄에서도 매번 항소했고, 이번에도 같은 패턴을 그렸다. 감옥에서는 재소자들에게 김진주의 집 주소를 읊으며 보복하겠다고 으름장을 놓거나 피해자를 향한 욕설과 모욕으로 허세를 부렸다. 그가 김진주의 개인 정보에 접근할 수 있었던 건 김진주가 사건 자료를 얻고자 민사소송을 제기함으로써 고소인의 개인 정보가 공개된 탓이었다. 피해자 보호가 간절했지만 김진주가 맞닥뜨린 현실은 가혹했다. 117억 원을 들여 만들었다는 스마트워치는 아무 때나 울려서 사용자를 난처하게 만들었고, 그마저 일정 기한 사용하면 반납해야 했으며, 여타 피해자 지원 제도는 신청에만 산더미 같은 서류를 요구했다. 제도 신설은 고사하고 기존 제도마저 피해자들에게 직접 검토받지 않은 탓에 형식적인 구제를 이어나가고 있었다. 김진주는 이 모든 과정에 부딪히며 진정한 회복적 사법과 피해자 구제를 위한 대안을 모색한다. 방송국이든 국회든 달려갔고 피해자들이 바라는 실질적인 도움이 무엇인지, 구체적인 개선안이 무엇인지 알릴 기회를 잡았다. 그가 마침내 당시 법무부 장관과 연락이 닿았을 때도 김진주의 유일하고도 분명한 목적은 그 자신만이 아닌 피해자들을 위한 ‘범죄피해자 지원의 단계별 개선안’을 관철하는 것이었다. 그는 이 책에 피해자들의 요구안을 옮겨 적으며 이것이 제대로 반영되어 작동하려면 무엇보다 모두의 꾸준한 관심과 감시가 필요하다고 재차 강조한다.
김진주가 가장 자주 하는 말은 ‘나 말고’다. 그의 행보는 단 한 번도 길을 잃은 적이 없다. 목소리 내지 못하는 수많은 범죄피해자를 위해, 언제 범죄피해자가 될지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어쩌다 맨 앞줄에 섰을 뿐인 그가 뒤이은 사람들을 위해 할 수 있는 건 다 해보겠다는 마음뿐이다. 먼저 고통받은 자로서 다음 고통은 줄여보자는 게 김진주가 내세우는 전부다. 범죄피해자보호법의 목적은 피해자의 복리 증진이지만 실제 형사사건에서 범죄피해자는 소외되고 권리는 유리된다. 그가 발로 뛰며 만난 ‘인천 스토킹 살인 사건’ ‘바리깡 폭행 사건’ ‘인천 강화도 유기 사건’의 피해자와 유가족들도 처음에는 고립된 피해자였지만, 김진주와 더불어 싸우는 피해자로 그리고 연대하는 피해자로 공동체를 넓혀나갔다. 사건은 반복되고 변화는 요원해 보여도 김진주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길을 냈다. 그리고 그곳에 ‘범죄피해자 지원의 단계별 개선안’ ‘범죄피해자 원스톱 솔루션 센터’ ‘스토커 위치 정보 피해자 알림 시스템’이 들어섰다.
사건으로부터 1년 4개월이 지나 마침내 20년 형이 확정되었고, 김진주는 그간 모든 일의 양면을 봤다고 말한다. 변호사를 고용했을 때와 혼자일 때, 언론이 주목할 때와 외면받을 때, 피해자로서 목소리 냈을 때와 움츠러들었을 때. 모든 일을 겪고도 그는 ‘세상에는 좋은 사람도 많다’고 말한다. 그가 내린 모든 선택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과 사람을 믿음으로써, 나로부터 시작될 변화를 믿음으로써 이어졌다. 그는 지금도 ‘부산 돌려차기 사건’ 피해자의 투쟁은 끝나지 않았다고 말한다. 어제의 그가 오늘의 우리에게 이 책을 통해 현현히 선언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