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와 플랫폼은 우리를 더 많이 연결했지만, 같은 현실을 함께 바라보게 만들지는 못했다. 스마트폰 화면과 알고리즘이 각자의 현실을 따로 구성하는 시대, 공론장은 갈라지고 신뢰의 기반은 흔들리고 있다. KBS 기자와 보도책임자로 33년을 보낸 김종명은 신간 《전자동굴》(페이퍼로드)에서 이 위기를 자신의 현장 경험에 비추어 진단하고, 다시 함께 믿을 수 있는 공적 정보 인프라 ‘플랫폼 비컨’을 제안한다.
저자가 말하는 ‘전자동굴’은 플라톤의 동굴 비유와 월터 리프먼의 『여론』이 제기한 의사환경의 문제의식을 플랫폼과 AI 시대의 정보환경 속에서 새롭게 정리해낸 개념이다. 리프먼이 사람들이 현실 그 자체보다 미디어와 사회가 만들어낸 현실의 이미지에 반응한다고 보았다면, 이 책은 스마트폰과 알고리즘, AI 추천 시스템이 개인별로 설계하는 오늘의 정보환경을 ‘전자동굴’이라 부른다.
책은 전자동굴 속에서 시민들이 각자의 ‘취향의 감옥’에 갇히고, 알고리즘을 통해 확증편향이 더 빠르고 정교하게 강화되는 구조를 설명한다. 같은 사건을 두고도 서로 다른 현실을 믿게 되는 현상은 단순한 의견 차이를 넘어, 공통의 사실 기반이 약해지는 공론장의 위기로 이어질 수 있다. 미디어 이용자와 광고가 유튜브·OTT·AI 기반 플랫폼으로 이동하면서 전통 언론의 산업적 기반이 흔들리고, 정보 유통의 기준이 공익성보다 클릭과 체류 시간, 감정적 반응으로 기울어지는 흐름도 함께 짚는다.
이 책은 진행 중인 공영방송 정상화와 통합미디어법 논의도 공론장의 위기라는 더 큰 맥락 속에서 방향을 찾아야 한다고 본다. 제도 개편의 초점이 누가 공영방송을 지배할 것인가를 넘어, 공영미디어가 어떤 공적 서비스를 제공하고 그 책무를 어떻게 검증받을 것인가로 옮겨가야 한다는 것이다. 공영미디어를 방송 중심의 조직이 아니라 뉴스·지식·문화·재난·안전 정보를 연결하는 공적 플랫폼으로 전환하고, 이를 시민과의 새로운 공적 협약으로 제도화해야 한다는 제안이다.
그 실천적 해법으로 제시되는 ‘플랫폼 비컨’은 상업 플랫폼의 추천 질서에만 맡겨진 정보 생태계에 맞서, 시민이 믿고 참고할 수 있는 정보의 기준을 공적 인프라로 구축하자는 구상이다. 공영미디어와 전문가, 시민이 참여해 공공데이터를 기반으로 정보를 상시 검증하는 팩트체크 허브, 공익성·다양성·지역성·신뢰도·설명 책임을 반영한 공공 알고리즘, 그리고 인간의 최종 책임을 전제로 한 AI 뉴스룸이 그 핵심 구조다.
저자는 이를 통해 신뢰 생산 뉴스룸, 시민지식플랫폼, 문화 공공플랫폼, 생명정보 플랫폼을 연결하는 신뢰 생태계를 상상한다. 가짜뉴스를 하나씩 뒤쫓는 데 그치지 않고, 진짜가 더 빠르고 단단하게 작동하는 구조를 만들자는 제안이다. 《전자동굴》은 공영방송론을 넘어, AI 플랫폼 시대 저널리즘과 시민사회가 함께 고민해야 할 공론장 재설계, 나아가 지속 가능한 민주주의의 조건을 묻는다.
┃이 책에서 제기하는 주요 문제의식┃
1. 전자동굴과 취향의 감옥스마트폰과 알고리즘은 모두에게 같은 세계를 보여주는 창이 아니라, 각자의 취향과 분노, 두려움에 맞춰 조정된 정보환경을 만든다. 스티브 잡스가 말한 ‘연결’의 약속은 손안의 화면을 통해 실현된 듯 보였지만, 그 연결은 때로 서로 다른 현실을 강화하는 통로가 되기도 했다. 이 개인화된 현실의 구조가 책이 말하는 ‘전자동굴’이자 ‘취향의 감옥’이다. 우리는 과거 어느 때보다 많이 연결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서로 다른 화면 속에서 서로 다른 사실과 감정, 판단을 소비한다. 연결 과잉이 오히려 공통의 현실을 약화시키고, 공론장의 전제가 되는 공동의 사실 기반을 흔들고 있는 것이다.
2. 대형 미디어그룹의 경영 위기에서 공론장 위기로현실로 닥쳐온 대형 미디어그룹의 경영 위기는 개별 기업의 유동성 문제나 전통 언론사의 경영난에 그치지 않는다. 광고와 이용자가 상업 플랫폼으로 이동할수록, 사회적 의제를 발굴하고 시민들이 함께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의 기반도 약해진다. 시민들은 같은 사건을 두고도 서로 다른 정보와 해석을 접하게 되고, 공통의 사실 위에서 토론할 기회는 줄어든다. 책은 미디어 산업의 위기를 공론장 인프라의 위기로 읽는다.
3. 공영미디어의 공적 플랫폼 전환과 새로운 공적 협약방송 정상화와 제도 개편만으로 미디어에 대한 신뢰가 회복되지는 않는다. 공영방송은 먼저 “보지도 않는데 왜 수신료를 내야 하느냐”는 시민의 질문 앞에서 철저히 자기성찰을 해야 한다. 저자는 논의의 초점이 누가 공영방송을 지배할 것인가를 넘어, 공영미디어가 어떤 공적 서비스를 제공하고 그 책무를 어떻게 검증받을 것인가로 옮겨가야 한다고 본다. 뉴스·지식·문화·재난·안전 서비스를 연결하는 공공서비스 플랫폼으로 전환하고, 그 책무와 재원, 평가와 책임을 시민과의 새로운 공적 협약으로 다시 설계하자는 것이 책의 제안이다.
4. 가짜뉴스 대응보다 신뢰 구조 구축허위정보는 규제보다 빠르게 확산된다. 책은 가짜를 뒤쫓는 방식보다, 공영미디어와 전문가, 시민이 참여해 공공데이터를 기반으로 정보를 상시 검증하는 구조가 필요하다고 본다. 진짜가 더 빠르고 단단하게 작동하는 신뢰 구조를 만드는 일이 허위정보 대응의 출발점이라는 것이다. 허위정보 대응의 핵심은 시민이 믿고 참고할 수 있는 정보의 기준을 사회적으로 세우고, 그것이 작동할 수 있는 공적 신뢰 구조를 구축하는 데 있다.
5. AI 시대 뉴스룸과 인간의 책임AI는 자료 수집, 데이터 분석, 패턴 발견을 도울 수 있지만 질문 설정, 맥락 검증, 오류 수정과 설명 책임은 인간 저널리즘의 몫이다. 저자는 런던 특파원 시절 인터뷰했던 마크 톰슨 당시 BBC 사장의 혁신 사례를 예로 들며, 공영미디어의 디지털 전환도 결국 신뢰를 어떻게 지킬 것인가의 문제임을 강조한다. 책은 ‘휴먼 인 더 루프(Human in the Loop)’를 AI 시대 신뢰 뉴스룸의 핵심 조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