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많은 여러분께 묻습니다.
당신의 묘책은 무엇인가요?
고양이는 자기 자신을 가장 사랑합니다.
여기에 묘책이 있지 않겠어요?
박연준 시인이 쓴 책 중 가장 재미있고 밝고 따뜻한 이야기, 박연준 열번째 산문집 『묘책』이 출판사 난다에서 출간되었습니다. 열여덟 편의 산문 ‘묘생묘책猫生猫策’과 열여덟 편의 ‘집사묘시執事猫詩’를 수록했죠. 몇 해 전 봄날 처음 만나 식구가 된 첫 고양이 당주를 화자로 내세워 시인 부부와 함께하는 고양이의 일상을 그리고, 고양이는 인간을 어떻게 바라볼지 상상해서 썼습니다. 산문 뒤에는 고양이를 소재로 쓴 시를 한 편씩 곁에 두었어요. 연준, 석주 부부는 이 책에서 연집사 석집사로 분해 나를 눈빛으로 묶어두고 꼬리로 친친 감아두는 상전, 사랑을 모르는 사랑의 신, 고양이의 시선으로 인간세상을 들여다봅니다. 연준 시인은 사는 게 어렵다고 느낄 때마다 ‘고양이처럼 살자’고 다짐합니다. 좋아하는 것을 하고, 싫어하는 것은 하지 않고, 싫은 존재 앞에서는 하악질하고, 무서울 땐 숨고, 창밖 풍경을 오래 바라보고, 잠을 푹 자고, 사랑하는 이에게 가서 얼굴을 비비며 살아가는 작은 존재. 고양이 눈으로 보기에 인간들은 이상하고 어리석은 구석이 있습니다. 인간들의 고민에 당주가 내놓는 묘책은 영 틀린 말도 아니어서 읽는 이를 빙긋 웃음짓게 하지요. 당주는 이른 새벽이면 먼저 깨어나 집사들을 관찰합니다. 발가락을 깨물어 깨워보려 해도 한번 움찔할 뿐 그대로 자는 어지간히 둔한 동물. 눈은 작고 털도 없고 근사한 수염도 없이 잘도 살고 있는 이 집사들에게선 친숙한 체취가 납니다. 안심하고 골골송을 부르게 만드는 냄새죠. 고통의 무게도 희망의 음역도 작은 고양이들은 우리 인간에게, 너무 커 그 형태나 의미를 알기 어려운 사랑이 아니라 겨우 모래 한 알 크기만한 사랑을 가르쳐줍니다. 제 딴엔 작은 우주를 담은 커다란 모래 한 알을.
사랑이 뭔데?
츄르보다 좋은 건가?
첫 집사에게 파양되어 거리를 떠돌다 다시 입양을 갔지만 또 내쫓기고 임보처에 머무르다 연집사의 집에 오게 된 당주. 연집사는 나중에 꼭 기르자 하고는 자꾸 미루지 않았냐며 이 아이의 눈을 한 번만 들여다보라며 호소하지만 석집사는 큰 책임이 따르는 일을 상의하지 않고 연집사가 혼자 결정한 데 화를 냅니다. 냉랭해진 두 집사 사이에서 싱숭생숭해진 당주는 첫번째 묘책을 내지요. “누군가와 잘 지내고 싶은데 관계가 냉랭해져 고민이라고? 상대의 발치로 가서 엉덩이를 대고 먼저 잠들어버려. 적어도 나는 이 방법이 통하지 않은 적이 한 번도 없었거든!” 그렇게 당주는 석집사의 발치에 자리를 잡습니다. 냉혈한인 줄 알았던 그의 발은 의외로 따뜻하네요. 마음고생을 하고 집에서 잠든 첫날, 석집사는 사실 몇 번이나 당주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답니다. 조금씩 휘어지기 시작한 그의 마음은 “고양이야”에서 “당주야” “우리 당주”로 발전하며 둘도 없이 친한 사이가 되어가지요.
높은 곳을 오르내릴 수 있는 튼튼한 네 다리, 백팔십도 이상 회전하며 작은 소리도 감지하는 한 쌍의 귀, 커다란 두 눈의 뛰어난 동체시력, 부드러운 새하얀 털에 옥색 눈, 깜찍한 분홍색 작은 코, 시옷 모양으로 다문 입매는 얼마나 귀여운지! 당주에게 쏟아지는 집사의 호들갑입니다. 완벽한 당주와 달리 고양이의 눈으로 본 인간은 모자란 구석이 많아요. 두 개나 있는 귀는 큰 소리든 작은 소리든 제대로 듣지 못하고 꼬리도 수염도 없어 균형 잡힌 움직임이나 민첩한 몸놀림을 기대하기도 어렵지요. 그런가 하면 발소리는 크고 물건은 허구한 날 떨어뜨려 깜짝 놀라게 하고 기껏 그루밍해놓은 털을 헝클어놓습니다. 사랑하는 마음이 덜했다면 참아주기 힘들었을 일들이죠. 집사들은 스스로를 ‘엄마’ ‘아빠’라 칭하며 자신들을 돌본다 생각하지만 실은 당주가 그들을 보살피고 있답니다. 거기에다 모든 면에서 다른 육체파 검은 고양이 헤세와 사느라 오늘도 고생이 많은 당주죠.
고양이 모르게 무언가를 하는 건 불가능해
고양이는 모든 것을 그냥 알거든
고양이의 눈에 비친 인간은 중심을 잡고 사는 데 어려움을 느낍니다. 스스로 뭘 좋아하고 뭘 싫어하는지 아는 대신 무엇처럼 보이고 싶거나 보이기 싫은 것, 좋지만 하면 안 되는 것과 싫지만 해야 하는 것 사이에서 허우적대는 이상하고 가여운 존재지요. 애를 쓸 필요 없이 창문을 열고 새, 나무, 바람을 보고 느끼면 될 텐데 지나치게 노력하는 우스꽝스러운 ‘벌’을 받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 현재의 주인이란 뜻에 걸맞게 과거나 미래엔 관심이 없고 언제나 현재를 향유하는 고양이 당주當主는 중요한 것은 따로 있다고 인간들에게 말합니다. 우리는 지금 여기, 이 순간을 살고 있음을 믿으면 된다고. 고양이를 좋아하면 여기, 존재하는 나를 보면 되는데 액정 속의 고양이를 보고, 여행을 가고 싶으면 떠나면 되는데 액정 속에서 다른 누군가가 여행하는 모습을 보는 인간들. 당주는 묻습니다. 진짜 삶이 어디인 거야? 세상이 이렇게 크고 넓은데 사람들은 왜 수그린 채 스마트폰 화면만 보는 거야? 그 세상은 아주 작고, 깨지기 쉬운데.
비가 오거나 바람이 불면 들리는 독특한 소리. 음악이라고 할 순 없지만 분명한 음률을 고양이는 느낍니다. 오늘 아침의 날씨, 창문 새로 들어온 바람 냄새, 석집사가 책상에 펼쳐준 오래된 책 냄새, 어젯밤 먹은 북어 트릿 냄새를 꼼꼼히 음미하며 우리에게 본래 하루는 길고, 하루는 충분하다는 사실을 보여주지요. 그러나 천재묘 당주에게도 묘책이 떠오르지 않는 문제는 있어요. 잃어버려서 사라져서 헤어져서 만날 길 없는 가족…… 가족 때문에 마음이 아플 땐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말에는 그냥 아프며 지나가야 하는, 방법이 없는 일도 세상엔 있는 법이라 말을 아낍니다. 길고양이들에게 밥을 주는 것도 사람, 독을 주는 것도 사람, 고귀한 존재를 감히 버릴 수 있는 것도 사람. 사람이 사람으로 태어난 것처럼, 고양이로 태어나 고양이로 살아가고 있는 존재들에게 좋고 싫다고 평가하는 것도 사람들입니다. 고양이는 책을 읽지 않아도 사는 일의 녹록지 않음을 직관으로 파악하지요. 이게 바로 고양이가 하는 독서 아닐까요. 삶을 읽는 일. 집사들이 『논어』를 읽는다 해도 다 알 수 없는 것을 고양이는 몸으로 느낍니다.
평화에는 내가 좋아하는 것
평범하고 작은 것들이 들어 있네
당주에 따르면 고양이들은 자신의 미래를 점치며 원하는 곳에 안착할 수 있도록 염원을 품는다고 해요. 그 염원이 우리를 어떤 곳에 도착하게 한다고요. 사람을 좋아하지만 사람에게 안기는 건 딱 질색인 고고한 영혼. 마음 귀퉁이를 조금만 내준다는 건 결국 몸과 마음 전부를 내주는 일임을 고양이도 집사들도 서로를 통해 배워나갑니다. 아무 바람 없이 그저 존재해주어 감사하다고 고백하게 되는 사랑, 세상에서 가장 무지몽매한 신하 되기를 자처하게 되는 사랑을. 교양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천둥벌거숭이 헤세, 세상 이치에 밝고 영특한 두뇌를 가진 천재묘 당주. 검은 돌과 흰 돌처럼 달랐던 두 고양이는 이제 눈만 마주쳐도 서로의 마음을 압니다. 식구가 된 것이죠. “가족과 함께 있는 것, 나는 아무래도 그것을 가장 좋아하는 것 같아”(173쪽). 연준 시인은 노래합니다. “너는 땅을 찢고 태어난 초록도 아니고/가지 끝에서 터져나오는 열매도 아니지/공룡처럼 알을 깨고 나오지도 않았어//너는 어떻게 우리에게 왔지?”(「도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