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은 충분하지 않다
그러나 선의도 충분하지 않다
텅 빈 매점과 윙윙거리는 자판기
2025년 어느 날 점심시간, 나는 울산고등학교에서 잔인할 만큼 대조적인 두 개의 풍경을 마주했다. 한쪽에는 제자들과 피땀 흘려 만든 학교협동조합 매점 ‘씨앗나무’가 있었다. “우리 아이들에게는 몸에 좋은 것만 먹이겠다”는 교사의 선의(Goodwill)로, 최고급 우리 밀과 친환경 재료로 만든 식품을 매대에 가득 채워 넣었다. 하지만 그곳은 아이들의 발길이 끊겨 적막만이 흐르고 있었다. 반면 바로 옆, 교정 한구석에서 기계음을 내며 윙윙 돌아가는 ‘자판기’ 앞에는 아이들이 길게 줄을 서 있었다. 아이들은 주머니 속 낡은 동전을 털어 대기업이 만든 자극적인 음료와 달콤한 과자를 뽑아 먹으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 순간, 나는 경제 교사로서 거대한 ‘패배감’을 맛보았다. 아이들의 반응은 냉정하고도 정확했다. “선생님, 좋은 뜻인 건 알겠는데요. 자판기가 더 싸고, 더 빠르고, 솔직히 더 맛있잖아요.”
공급자의 오만: 도그마에 빠지다
나는 평생 강단에서 애덤 스미스를 가르치며 “시장은 효율적이다”라고 외쳤다. 스미스가 당시 왕들이 믿던 ‘금과 은’이 아니라, “국민들이 먹고 입는 생필품의 양이야말로 진정한 국부(Wealth)”라고 정의했듯, 나 역시 생산만 하면 부가 창출된다고 믿었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케인스가 대공황 때 경고했듯, 아무리 물건을 많이 만들어도 사줄 사람(유효수요)이 없다면 경제는 멈춘다. 나는 “공급은 스스로 수요를 창출한다(세이의 법칙)”는 낡은 도그마에 갇혀 있었다. “몸에 좋으니 사 먹어라”라고 강요하는 ‘꼰대 공급자’였을 뿐, 아이들(수요자)이 진짜 원하는 ‘맛’과 ‘재미’라는 니즈를 읽어내는 데는 처참하게 실패했던 것이다. 경제는 결국 공급자가 아닌, 그것을 사용하는 소비자의 삶에 기여할 때 비로소 의미를 갖는다는 단순한 진리를, 텅 빈 매점은 나에게 뼈아프게 가르쳐주고 있었다.
나 홀로 천재는 없다: 자유로운 연대의 힘
이것은 비단 학교 매점만의 문제가 아니다. AI 시대를 살아가는 거대 기업들도 똑같은 딜레마에 빠져 있다. 아무리 뛰어난 기술(공급)을 가져도 인간의 욕망(수요)을 읽지 못하면 도태된다. 그리고 이제 혼자서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독불장군’은 살아남기 힘들다. 거대한 자본으로 성을 쌓고 효율성만 추구하는 조직은 빠를지는 몰라도 오래갈 수는 없다. 우리 매점의 살길도 여기에 있다. 자판기라는 차가운 기계와 싸워 이기려면, 우리도 학교 담장을 넘어 동네 빵집, 지역 서점과 연대하여 아이들이 원하는 ‘대체 불가능한 가치’를 만들어내야 한다. 홀로 고립되지 않고 연결되는 것, 그리고 정부의 지원금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의 힘으로 서는 것. 그것이 진정한 ‘자유(Freedom)’다.
시장은 충분하지 않다, 그러나 선의도 충분하지 않다
이 책은 그 처절한 실패와 반성, 그리고 다시 일어서는 희망의 기록이다. 10년의 실험 끝에 나는 깨달았다. 시장(Market)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하지만 선의(Goodwill)만으로도 충분하지 않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앨프리드 마셜이 말한 ‘차가운 머리(이성)’와 ‘뜨거운 가슴(공감)’, 그리고 무엇보다 험난한 파도를 헤쳐 나갈 ‘튼튼한 다리(기업가정신)’다. 우리는 시장의 효율성을 인정해야 한다. 동시에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끊임없이 혁신하는 ‘린 스타트업’의 정신으로 무장해야 한다. 그리고 그 단단한 실력 위에서, 나 혼자가 아닌 이웃과 손잡고 함께 성장하는 ‘자유로운 연대’의 길을 걸어야 한다.
미래를 향한 나침반
이 책에는 정답이 없다. 대신 교과서보다 더 치열했던 ‘현장의 질문’들이 있다. AI가 모든 것을 대체하는 시대, 인간의 경쟁력은 무엇인가? 나만 잘 사는 ‘각자도생’이 아니라, 함께 잘 사는 ‘공생’은 가능한가? 나는 200년 전의 경제학자들을 소환해 그들에게 묻고, 울산의 작은 학교 매점에서 아이들과 부대끼며 그 답을 찾아 나갔다. 이 책은 단순히 돈을 버는 법을 가르치지 않는다. 대신, 자원의 희소성이라는 경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시장의 효율성을 빌려오되, 그 한계를 ‘협력’으로 채우고, ‘혁신’으로 완성해 나가는 방법을 이야기한다. 자, 이제 교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자. 차가운 자판기 옆에서, 따뜻한 빵 냄새가 피어오르는 그곳. 우리가 함께 만들어갈 ‘충분한 세상’으로의 여행을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