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에선 늘 소금 마늘 레몬 냄새가 나고
이따위 엉터리 천국은 나도 만들겠어”
기괴하고 아름다웠던 지난 여름을 허물고
그 잔해로 지어 올리는 새로운 여름의 시
문학동네시인선 176번으로 주하림 시인의 두번째 시집을 펴낸다. “말하려는 바를 이미지로 변환해내는 능력과 의지가 돋보인다”(심사위원 박형준 진은영 신용목)는 평과 함께 2009년 창비신인시인상을 받으며 등단한 시인은 첫 시집 『비벌리힐스의 포르노 배우와 유령들』(창비, 2013)을 통해 “말 씀씀이가 재미있고 어조의 재빠른 선회에 늘 재치가 가득”한, “맨몸의 아름다움”(문학평론가 황현산)을 지닌 언어로써 “길들여지지 않는 다중적인 욕망”을 “생생한 자기의 드라마로 만들어 내놓았”(시인 박형준)다는 성취를 이룬 바 있다. 그런 시인이 9년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써내려간 시들 가운데 44편을 선별해 묶은 『여름 키코』는 기존에 시인이 축조한 욕망과 감각, 이국과 이종(異種)의 시세계를 인상적으로 펼쳐 보이는 동시에 여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시간은 흐르는 것이 아니라 변해”(「스웨터 침엽수림」)가는 것임을 알리듯 시인이 지나온 시간을, 변해온 궤적을 가늠해보게끔 한다. “계절이 지날 때까지 비난 속에 살 것임을 예감했”(「레드 아이」, 『비벌리힐스의 포르노 배우와 유령들』)던 주하림의 여성 화자들은 이번 시집에 이르러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화살촉을 관망하는 대신 그따위 “엉터리 천국은 나도 만들겠”(「몽유병자들의 무르가murga」)노라 외치며 새로운 계절을 그려 보인다.
테이블 위 케이크
케이크가 난방에 녹고 있다
동그란 어깨뼈를 드러낸 사촌 여자애들이 모여서 케이크를 먹는다
긴 흑발의 언니와 동생들
그만 먹자 키코, 크림은 몸에서 녹지 않아
왜 크림은 입에서 녹잖아 의자에 앉아서 먹자
여름에는 남자가 도망간다 멀쩡하게 같이 살던 남자가
그후로 의자를 모으는 취미가 생겼다 점점 좋은 의자를 모았고
언니는 의자를 쌓아놓고 의자 꼭대기에서 창을 바라보는 취미가 생겼다
(……)
마지막 꿈꾸기와 더 나은 꿈 기억의 두 가지 빛이 섞인다
누군가 포크로 케이크 바닥을 긁는다
동그란 어깨뼈에 맺히는 땀
중학교는 다니지 말걸 파란 대문 뒤에서 옆 남고생 애들을 대주던 여자애와 오토바이를 타다 종아리 화상을 입던 애들뿐이었거든
(……)
나는 너의 어느 쪽을 밀어도 만지고 싶은 미래
기억은 자기를 알아보는 누군가 나타날 때까지 기다린대
하지만 천국에도 지옥에도 그런 에피소드는 없었지
_「여름 키코」 부분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이번 시집에서 가장 주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여름이라는 계절 그 자체이다. “한 편을 갈기갈기 찢어놓은 영화”(「덴마크 입국소에서」)처럼 파편화된 이미지로써 감각되는 주하림의 시 속 여름은 생명이 약동하고 파도가 너울대는 ‘지금 이 순간’의 계절이 아니다. 여름은 지난날 어떤 ‘사건’이 일어났던, 피로 얼룩져 끈적거리고 썩어가는 것들로 가득차 비릿한 냄새가 진동하는 “조금 기괴한 분위기”(「컬렌 부인, 끝나지 않는 여름밤 강가에서」)의 계절이다.
주하림의 여성 화자들은 그 여름에 그들이 겪었던 사건을 다시금 가져와 증언한다. “파란 대문 뒤에서 옆 남고생 애들을 대주던 여자애”(「여름 키코」), “그가 여자를 죽인 것은 처음이 아니다”(「Port of Call」), “집안 물건들이 부서졌고 그녀 날개도 피투성이가 되었죠”(「팔월 모래 무덤」) 등의 구절에서 짐작되듯 사건이 인물들에게 끼친 세기가 만만치 않아 보임에도, 그들은 그 기억에 잠식되지 않고 사건 이후 그들이 서 있는 곳을 짚어 보인다. “긴 흑발의 언니”는 이제 “머리카락에 크림 닿는 것이 싫어 단발이 되었”으며, 졸업식 사진의 프레임 너머로 하반신을 잘려나가게 했던 “종아리 화상”은 “벚꽃 잎처럼 보인다”(「여름 키코」). 미술학교에서 ‘정신병자’로 불렸던 또다른 ‘언니’는 그럼에도 끝내 그림 그리기를 포기하지 않고(「덴마크 입국소에서」), “도망치지 못하도록 발이 잘린 여자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지내왔던 ‘나’는 자신과 같은 시간을 보냈던 이를 데리러 고통이 묻어 있는 거리로 나선다(「비간 시티 거리에서」).
창이 그리워 생트샤펠성당에 갔어 천장의 스테인드글라스, 장미창 굴절된 빛들이 창을 통과하고 갑자기 유리들이 와장창 머리 위로 쏟아진대도, 나는 피하지 않을 것이다 어둡고 아름다운 것들을 믿어왔던 일을 그것이 쏟아지는 것을
_「모티바숑motivation」 부분
그러므로 “희미하지 않게 아름답게 용기 내어 여기까지 살아온 내가 고맙다”라는 ‘시인의 말’은 더욱 귀중하게 느껴진다. 스스로의 “힘으로 떠올라/ 다른 이의 힘을 더해 육지에 이를 수 있었”(「심연의 아침」)다고 말하는 주하림의 화자들은 “주어진 곳에 머물지 않고 더 먼 장소로 나”(문학평론가 양경언)아갈 것이며, 여름이 사라지고 그 자리를 대신하는 것은 “색색의 빛 색색의 타일”(「론드리」 「July」)이듯 『여름 키코』를 통해 주하림이 만들어낸 새로운 여름은 지난 여름이 허물어진 자리에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찾아올 것이다.
나는 이제 살길을 행복하게 갈구할 거야
역경이 오면 그땐 다시 떠돌이 개처럼 뜨거운 침을 흘리며 잠깐 경련하겠지만
그전까지 나는 모든 행복한 시간을 통틀어
그것을 전부 가지고 있는 여름이 되어 있을 테니
공원에서 터진 입안을 헹구고
어두웠다 천천히 빛으로 가득해지는 장면처럼
초여름, 얼굴이 상처투성이인 네가 평온하게 돌계단 아래에 기댄다
_「천엽벚꽃」 부분
「여름 키코」의 ‘키코’는 피하지 않는 사람이다. 「심연의 아침」에서 ‘나’ 또한 키코와 마찬가지로 “끔찍했던 일들”에 “끝장을 내자고” 쉽게 말하는 사람들과 다른 편에 선다. ‘나’는 여전히 “끔찍했던 일들”의 이후를 겪어내는 중이다. 그 일은 ‘나’를 “심연에 가라앉”게 만들지만, ‘나’는 ‘나’가 가라앉도록 가만두지 않는다. ‘나’ 는 심연에서 “내 힘으로” 떠오름으로써 어떻게든 ‘나’를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애를 쓴다. 자신에게 닥친 상황을 피하지 않는다. 그러니 “나는 결코 멍청이가 아니다!”라는 외침은 ‘나’를 심연에 가라앉히고 서서히 부패하게 만드는 외압을 뚫고 “목구멍 깊숙이 숨은 나”를 건져올리려는 힘에 의한 것이다. 시에서 ‘나’는 “떨어질 것을 각오하고 우스꽝스럽게 짚고 올라갈” “벽”으로 다가가는 일에서 물러서지 않기로 한다. 지나간 일과 내내 싸워야 한다는 사실을 짊어지기로 한다. 날로 희박해져가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 매섭도록 정직한 방식으로.
_양경언, 해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