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뚫고 지나갔던 공기가 다시 모이고
뚫고 갔던 몸이 다시 온전해지기까지”
고통과 상처 위에 돋아나는 '너와 나'라는 감각,
부스러지고 깨어진 세계를 메우는 회복의 언어
김수영문학상 수상 작가 손미 세번째 시집
끝없는 고통과 폭력의 구조 위에 섬세한 회복의 언어를 직조해내는 손미 시인의 세번째 시집 『우리는 이어져 있다고 믿어』가 문학동네시인선 219번으로 출간되었다. 제32회 김수영문학상을 수상한 첫 시집 『양파 공동체』(민음사, 2013)와 두번째 시집 『사람을 사랑해도 될까』(민음사, 2019)를 통해 “고통을 받아 적는 사람”(시인 이영주)으로서 “살아 있어서 아프”(시인 김행숙)다는 사실을 일깨워주고, “머나먼 은유를 불러와 사물의 공간을 드넓게 만”(시인 김혜순)든다는 평을 얻은 손미의 이번 시집에는 녹록지 않은 세계 속에서도 타인과의 연결을 도모해보려는 노력의 과정이 담겼다. 그 연결은 비록 매끈한 접합이 아니라 쓰라리고 불편한 흉터를 남기는 봉합에 가까울지라도, 갖가지 ‘너’와 ‘나’의 만남이 축조해낸 거친 구조물이 ‘우리’의 삶이라는 사실을 실감하게 만든다.
우리는 공간을 메우기 위해 계속 말을 했다
너와 나의 거리가 너무 멀어서
사람이 지나가고
잔이 깨지고
피투성이 바람이 지나가고
우리는 멀어지는 사이를 메우기 위해
계속 말을 했다
말은 떠다니고
그러다
너는 박차고 일어나
걸어 나가고
말이 끝나면 정말 끝이 날까봐
나는 계속 말을 했다
_「혼잣말을 하는 사람」 부분
‘너와 나’가 있다. 둘은 모여서 ‘우리’를 구성한다. 1부 ‘마주보면서 멀어진다’에는 주로 ‘너’의 안부를 묻고 확인하려는 ‘나’의 시도가 담겨 있다. 아마도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듯한 ‘너’를 찾아 헤매며 “네가 돌이 됐다고” 하면 “아무 돌이나 붙들고 안아”보고(「몽돌 해수욕장」), “깨진 너에게/ 나의 얼굴을/ 맞대고 문질러보”(「주전자」)기도 한다. 「혼잣말을 하는 사람」의 화자는 “이쪽과 저쪽”이 갈라지고 “하늘이 찢어지는 것을 보면서” 필사적으로 “연고처럼 끈적한 말”을 건네고 있다. 이렇듯 멀어져버린 ‘너’와의 간격을 좁히기 위해 노력하는 사이, 화자는 쪼개지고 쪼개져 “원자가 되고” “소금 한 개의 알갱이”(「점점 크게」)만큼 작아지는 무력감을 느낀다. 김수영문학상 수상 당시 “시를 쓸 땐 죽었던 심장과 눈동자와 입술과 손가락에 다시 생기가 오르는 것을 느낀다”고 소감을 밝힌 시인의 이번 시집에서는, 생기를 가진 것들이 빛을 잃고 사라지는 일들이 반복된다. 도처에 죽음이 있음을, 그럼에도 자신만은 태연하게 살아 있음을 아프게 감각하며 “하루는 죽고 싶다가/ 하루는 살 만하다가/ 매일/ 알알이 살”(「포도」)아간다.
태어나려는 뱃속 빗방울과
죽으려는 사람이 한 식탁에서 고기를 먹고 있음
오래전부터 죽는다던 사람이 죽지 않고 있음
(……)
괴롭히는 사람은 언제부터 괴롭히는 사람이 되었을까?
마취된 소는 내 뱃속으로 떨어졌음
나에게 다정해줘
안 그럼 죽어버릴 거야
아무도 구할 수 없음
움직일 수 없음
뱃속에서 마취된 몸에 팔다리가 생김
죽겠다던 사람이 계속 이어지고 있음
아무도 구할 수 없음
사람은 계속 이어지고 있음
_「이어지는 사람」 부분
상실을 자각하는 일은 다른 생명체에 가해지는 폭력에 관한 사유로 이어진다. 2부 ‘별처럼 터진 몸들에게’는 인간이 인간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야기하는 폭력을 다룬다. “사람이 사람에게 왜 그럴까”(「파라라라라라」) 사유하고, “괴롭히는 사람은 언제부터 괴롭히는 사람이 되었을까?”(「이어지는 사람」) 자문하는 사이사이에 죽음이 계속된다. 수많은 사람 혹은 동물이 매장당하거나 학살되고, 유희를 위해 희생된다. 「수술」의 화자는 “조용히 끌고 온 잘못들을 머리맡에 개어놓고” 한 사람이 저질러온 죄를 해부하고 복기하면서, 다른 존재의 고통에 기대어 명맥을 이어온 인간이라는 존재의 무게를 느낀다.
이러한 고뇌는 3부 ‘잉크는 번지고 커지고 거대해져’를 통해 시쓰기로 발화되기 시작한다. 3부를 여는 시 「불면」의 “이렇게 사는 게 맞습니까”라는 질문을 시작으로 푸른 멍 위에 치열하게 눌러쓴 듯한 시편들이 이어진다. 일상 속에서 피해자와 가해자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타인에게 가하는 폭력이 만연해지는 와중 서로가 서로에게 긋는 선은 때로는 교차되고 때로는 상대의 영역을 침범하며 “엉켜서/ 밧줄처럼 뻑뻑해”(「카페트」)진다. 어떠한 의무나 결심을 느낀 듯 “백지 위에서 깊고, 두꺼워”진 화자는 “마음에서 툭 하고 떨어”(「흰 점」)지는 말들을 고요하게 기록해보려 한다. “이제 다시는 못 쓸 것 같”다고 낙담하다가도 끈질기게 “몇 번이나 쓰고 지”우며 “펜을 깊게 눌러 찍”(같은 글)는다. 문학평론가 김보경이 해설에서 “상처를 기록한다는 것은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방증”이지만 “기록을 통해 자신의 상처를 대면하며 객관화려는 노력”이라고 짚었듯이, 그렇게 “상처를 꾹꾹 눌러”쓴 행위는 일종의 “지혈”(「회복의 책」)이 되고, 눌러쓴 기록들은 ‘회복의 책’이 된다. 나아갈 힘을 얻은 화자는 “불타는 너”가 있는 곳을 향해, “매일 불타고/ 매일 죽어버리는/ 거기로”(「불타는 의자」) 가까이 다가가겠다고 결심하면서 ‘우리는 이어져 있다고 믿어’보기로 한다.
마음에 걸리는 게 많아
팔과 팔이 부딪쳐
사람들은 잠시 돌아보지
우리는 같이 있다고 믿어
어떤 하루는 너무 길어
팔에 붙여보았지
긴 팔 사이로
못 지나간 바람은 몸에 걸려 있다
팔을 뻗어 팔을 잡았어
손바닥 가득한 편서풍
우리는 이어져 있다고 믿어
_「원숭이 옆에 원숭이」 부분
편집자와의 사전 인터뷰에서 시인은 “살아 있던 사람이 한순간에 죽어버리는 것이 이상하게 느껴졌”던 경험을 이야기하며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게 된 이들의 흔적을 찾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러한 마음이 담긴 듯한 3부의 마지막 시 「별자리」에는 이따금 “머리를 쓰다듬고 지나는 거대한 손가락”이 등장하는데, 그 손가락은 마치 외계에서 들려오는 듯한 목소리로 “곧, 만나게 될 거야”라고 말을 걸어온다. 그에 화답하듯, 이어지는 4부 ‘세계의 빙과들이 녹는다’에는 현실의 경계 너머를 응시하고자 하는 시인의 마음이 고스란히 담겼다. “안과 밖”의 구분이 모호해지고, 나는 흘러내릴 듯이 녹아 “점점 물렁해지면서” 경계 바깥으로 “이제는 나갈 수 있을 것 같”(「오로라는 못 봤어도」)은 마음이 된다. 저마다의 녹진한 마음들이 쌓여 높다란 층을 이룬 벽 앞에 선 채로, 「고체」의 화자는 ‘너와 나’ 사이를 가로막은 그 단단한 벽에 틈을 내보려 한다.
나는 담벼락에 기대서
벽돌에 욱여넣었던
휴지와 시계와 굴뚝들을
담배꽁초와 한 사람의 얼굴과 병뚜껑을
이렇게 텅 빈 벽돌에
쑤셔넣었던 일주일과
벽돌을 쥐고 벌벌 떨던 벽돌의 울음이
딱딱하게 박혀 있는 것을 보면서
맨 밑의 벽돌을 빼려고 한다
거기에 초를 꽂고
박수를 치고
칼로 자르고 자르고 잘라
후-
불어보려 한다
_「고체」 부분
이러한 틈은 견고하게 구축되어 있는 세계를 무너뜨리는 결함이 아니라, 그 사이를 촘촘하게 메울 새로운 결심이 피어나게 하는 기제가 된다. 헐거워진 벽돌 사이사이 수많은 종류의 감정이 충돌하고 굴절되고 튕겨지며 오가는 것을 시인은 헤아린다. 뻥 뚫린 틈새를 다시 울퉁불퉁하게 메워 회복하는 것이 삶임을, 매일 새로운 단념 하나 결심 하나씩을 번갈아 쌓아내는 것이 ‘너와 나’가 함께 해야 할 일임을 전하는 손미의 시가 어느새 뭉클하게 마음을 흔든다.
상처가 우리를 훼손하면서 동시에 우리를 강하게 만들듯, 손미의 시는 이러한 ‘나’의 이야기가 회복하는 ‘우리’의 이야기가 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나’와 ‘너’ 사이에 얽힌 의존, 상처와 훼손의 역사를 응시하고 기록하는 것은 ‘나’가 언제나 ‘나’이면서 ‘너’로서 존립해왔음을 일깨우는 일이다. 그렇게 만들어지는 공동의 삶이라는 직물(textile)에 짜인 무늬는 전에 없던 것일 테고, 기묘하고 아름다울 것이다. _김보경, 해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