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내다보는 경치는 무덤인 거야
비석을 세울 수 없는 묘지인 거야”
뭉근하게 피어오르는 애틋함의 온기,
상실감을 초과하는 그리움의 미덕
작별의 슬픔을 있는 힘껏 끌어안는 박규현 두번째 시집
2022년 한국경제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작품활동을 시작한 박규현 시인의 두번째 시집 『새 우정을 찾으러 가볼게』가 문학동네시인선 233번으로 출간되었다. 첫 시집 『모든 나는 사랑받는다』가 날카롭게 벼려진 언어로 여성 시인으로서 경험하는 현실의 단면을 내보였다면, 삼 년 만에 펴내는 이번 시집에는 커다란 상실을 겪고 난 뒤 죽음의 성질을 이해하고 삶과 연결해보려는 초연한 시도가 담겼다. 소중한 이들이 떠나갈 결심을 하도록 빌미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세상은 탓하고 증오해야 마땅한 대상이지만, 남아 있는 존재들이 발을 붙이고 살아갈 터전이기도 하므로 유지되고 지속되어야만 한다. 시인은 자신의 앞에 놓인 이 불가사의한 문제를 똑바로 응시하며 삶의 이유를 찾기 위해 분투한다. 떠나간 이들을 호명하는 것이 자신에게 주어진 일임을 묵묵하게 받아들인 뒤, 남겨진 자의 사명으로 오래도록 기억되어야 할 친구들의 이름을 힘주어 적는다.
공동묘지로 눈 구경을 갔다 작고 흰 언덕들이 촘촘하게 빛났다 친구가 비석을 닦으면서 말했다 잘 견뎠어 나는 신발을 털었다 축축해
멀리 바다가 보였다 바다에 빠지지 말자 바다에 지지 말자 살자 두 손을 모은 채 고개를 숙였는데
이미 죽고 없는 사람이 나오는 드라마 보는 거 앨범 펼치는 거 다 그만두고 싶었다
카약을 탄 채 환하게 올라간 입꼬리나
전구를 갈아 끼우다 찌푸린 미간
다시 데려오고 싶어지니까
_「되얼음」 부분
“떠난 친구를 위한 애도의 말 같은 것이 아니라, 친구 그 자체를”(문학평론가 최가은, 해설) 쓰는 이번 시집에는 실로 ‘친구’의 존재가 끊임없이 등장한다. 그에 따라붙는 ‘묘비’ ‘무덤’ ‘장례’와 같은 시어들로 가늠해보건대 그는 틀림없이 죽음과 깊이 연관되어 있는 듯하다. 1장 ‘쓰러질 준비를 한다 이동할 차례이다’에는 그러한 친구의 구체적인 정황이 담겼다. 친구는 “머리카락을 쥐어뜯”(「애프터 서비스」)으며 괴로워하거나 때때로 “베란다 창 가까이 서”서 “바깥을 내다보”(「선영(線影)」)는 등 위태로운 모습으로 그려지는데, 화자는 그를 말리거나 붙잡으려 하는 대신 얼마간의 거리를 유지한 채 지켜보고 있다. 그 거리감은 친구와 내가 다른 세계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암시하기도 하지만, 눈앞에 찾아든 유령 같은 친구가 자칫 사라지거나 망가질까봐 염려하는 마음으로도 읽힌다. 누군가 화자에게 “안 쓰고 살면 안 되니 보편적으로 지내볼 순 없겠어”라며 타박하자 화자는 “답을 알게 될 때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할 것”이라며 다만 때가 왔을 때 “쓰러질 준비를”(「선생님에게는 어떤 질문이 있었는지요」) 한다. 무너짐으로써 계속해야 하는 일이 있는 탓이다.
2장 ‘가장 환한 곳으로 가자’는 가상의 공간인 ‘아오타다라’를 펼쳐 보인다. 수록된 여덟 편의 작품에 부여된 제목이 모두 ‘아오타다라’로 동일하다는 점에서 장 전체가 별도로 존재하는 하나의 세계처럼 느껴진다. 이곳에서 친구는 “삼작년 스스로 유령의 길을 택”했다고 설명되는데, 부당함으로 가득한 세상을 홀연히 버리고 떠난 그 선택을 두고 화자는 “그것은 그의 용기”였다며 치하한다.
나는 친구를 수습한다
친구는 나로 인해 정돈되어간다
이해라는 말 들어본 적 있니 그런 질문 들을 때마다 마음이 멀리 가버린다
절룩이게 된다 거기서부터 대낮은 이어졌다 친구의 얼굴 들어올려 품에 안은 채
어느 강물에 휩쓸려왔던 친구를 떠올렸다 친구는 떠올랐다 친구를 건져냈던 그날
생각했다 가장 환한 곳으로 가자 제일 트인 데로 안전한 장소로
_「아오타다라」 부분
“친구의 이마는 차고 물렁하다는 사실”이나 “친구의 맨발이 창백하다는” 사실을 고요히 발견해내면서, 함께 사랑도 하고 “미래를 그려볼 수”도 있었을 수많은 가능성을 꿈결처럼 그려보다가도 화자는 “양지바른 자리에 친구를 천천히 뉘일” 준비를 한다. 그렇게 친구는 애도의 대상으로 남겨지는데, 이런 상실의 경험은 역으로 삶의 빈틈을 채우는 과정이 된다. 무엇보다 ‘나’는 아직 “살아 있”기에, “선풍기를 틀어놓은 채 수박을 베어먹”고 끈적해진 손을 “찬물로 헹구는 개운함”도 느낄 줄 아는 사람이기에. 박규현의 시에서 친구란 부재를 통해 이러한 생의 감각을 더욱 낱낱이 실감하게 해주는 존재로 작용한다.
3장 ‘나를 껴안은 친구를 껴안아’에 이르러 화자는 매정한 현실 세계와 본격적으로 마주한다. “크리스마스 나이”라고 칭해지거나 “손목 부러뜨릴 수 있겠다”(「저 사람들」)는 차별적 언행이 난무하는 폭력적인 세상 속에서, 숨 쉬듯 무례함을 일삼는 타인들의 틈에서 홀로 살아가야만 함을 피부로 느낀다. “멀쩡한 세상과의 부당한 단절 속에 갇혀 있다”(해설)는 이러한 인식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살아서 “서서히 늙어갈 수 있음을”, “오래 버티는 거 해야”(「지속되는 어떻게」) 함을 받아들이며 생의 무게를 실감하는 일로 나아간다.
이건 시니까 나는 해가 저물지 않는 해변에 며칠이고 앉아 있을 수 있다 조개껍질로 모래사장을 가득 채울 수 있다 아무리 털어도 먼지 한 톨 안 나오는 몸이 될 수 있다 다시 볼 수 없게 된 친구들을 다시 만날 수 있다 친구들이 비척거리며 나타나는 순간 사라지도록 할 수 있다 이건 시니까
_「계류자들」 부분
무수히 많은 삶의 부조리 틈에 계류된 채로 머무는 친구들과 자신을 위해, 시인은 시에서나마 이상적인 세계를 창조해낸다. “단란하고 풍요롭고 서로를 공평하게 대할 줄 아는 여자 어른들”로 자라난, 자랑스러운 나의 친구들과 함께 사는 「계류자들」 속 세계는 그러나 “시니까” 가능한 것이다. 이어지는 4장 ‘애써 사랑하고 있다 이 모든 장면을’에서 시인은 “월경 컵 때문에 구급차 부를지 말지 고민”(「돌멩이 나누기」)해야 하는 일상과 “여자는 음기 있는 동물이다” “여자가 남자 시선 가리는 거 아니다”(「가족 모임」)라는 폭력적인 말로 점철된 외부의 세계를 다시금 맞닥뜨린다. “사년제 대학”을 나오고 “신체 장애도 정신 질환 이력도” 없기를 강요하는 사회적 분위기를 감지하며, 시인은 “선발되어”진 ‘이상적’ 인간의 표상들을 “낭떠러지”(「컷오프」) 앞에 데려다놓는다. “이건 시니까”(「계류자들」), 그런다고 해서 실재하는 고난이 사라지지는 않겠지만 어떻게든 “고집스럽게 살아남아”(「자꾸만꿈만꾸자」) “이 모든 장면이 낯설”지만 “애써 사랑하고 있다”(「휴가객」)고 선언해본다.
한때 그는 나와 극장에서 연극을 보고 칼국수를 먹고 커피점에서 한참을 떠들었지 그러나 마지막엔 박제되는 쪽을 택했다 그것이 최후의 퍼포먼스였던 것이다 생계형 예술가였던 우리는 성탄절 무렵 백화점 앞을 지나칠 때마다 중얼거렸다 나도 비싼 것을 좋아하는데……
(……)
친구는 그 백화점의 상징이 될 것이다 누구도 넘볼 수 없게 내가 지금 그렇게 썼으므로 난 이렇게 값을 지불한다 모두 그를 보아라 지금 그곳에 한 세기의 용감함이 눈을 부라리고 있다
_「백화점에 갔다 그곳에서 22세기를 기념하는 행사가 열렸기 때문이다 나는 이미 성공해 그 건물의 쇼윈도와 에스컬레이터와 푸드 코트와 조명 가운데 몇 개쯤은 가뿐히 살 수 있었지만」 부분
5장 ‘한 세기의 용감함이 눈을 부라리고 있다’에서 세상을 저버린 친구의 결정은 ‘나’에게 ‘용감함’으로 아로새겨진다. 세상살이에 관해 나는 여전히 “아는 바가 없”(「실화가 왜곡되어 괴담화된 사례」)지만, 뜯어내도 자꾸만 생겨나는 손톱 위 거스러미처럼 어떤 필연적인 일은 반드시 “생겨나고 일어나”(「휴일에는 영업시간이 다를 수 있습니다」)기 마련이라는 것만은 안다. 그래서 떠나가는 친구들을 그저 “양지바른 곳으로 가야 해”(「휴일에는 영업시간이 다를 수 있습니다」) 내지는 “살펴/가세요”(「아카이빙」)라는 인사말로 전송할 따름이다.
남겨진 이로 하여금 마음을 추스르고 추억을 정리할 수 있도록 격려하는 일이 흔한 ‘애도’의 과정인 반면, 박규현에게 애도란 그리운 이를 끊임없이 불러들여 계속해서 연결되어 있기를 꿈꾸는 일이다. 1장에서 5장, 그리고 ‘추신,’으로 마무리되는 총 여섯 장의 편지와도 같은 이번 시집은 그렇게 우리에게로 전송되어온다. 영원히 기억될, 지속 가능한 이야기가 되어. “이승에서 저승까지”(「아카이빙」) 아우르는 새로운 우정의 형태를 띤 채로.
박규현의 친구는 기억되기 위해 쓰이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죽음 바깥으로 미루고, 어루만지고, 궁극엔 다시 불러오기 위해 쓰인다. 이때의 친구 쓰기는 친구를 사라지거나 반대로 생생하게 살아남는 존재로 머물게 하지 않기 위해, 축제의 한 문장으로 박제하지 않기 위해, 다만 매일같이 그들과 함께 눈 구경을 가기 위해 행하는 가장 내밀하면서도 밀접한 접촉의 형식이다. 이제 우리는 박규현의 시가 죽은 친구의 관을 끌고 가는 손이자 묘지의 흙을 밟는 발이며 우리의 반짝거림 앞에 친구들을 불러다 놓는 끝나지 않는 문장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의 시가 친구 그 자체를 쓸 때, 친구는 아직 없는, 그리고 언제나 도래중인 ‘그것’으로 바로 여기 있다. _최가은, 해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