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학자 마이클 타우시크의 빛나는 이정표
인류학자 마이클 타우시크의 『벤야민의 무덤』이 문학동네에서 출간되었다. 남아메리카 콜롬비아와 볼리비아 등에서 수행한 다양한 현장 연구를 바탕으로 마르크스주의와 식민주의, 국가 폭력, 물신숭배에 관한 독특한 사유를 전개해온 타우시크는 오늘날 가장 화려한 명성을 지닌 학자 중 하나다. 사실과 허구, 민족지와 아카이브가 결합된 실험적인 문체는 그를 매우 논쟁적인 인물로 만든 동시에 일약 학계의 스타로 떠오르게 해주었다.
『벤야민의 무덤』은 이러한 마이클 타우시크의 문체가 매우 잘 드러나는, 여러 개의 짧은 챕터로 이루어진 복합적인 산문집이다. 각각의 텍스트가 주제적으로도 형식적으로도 독립성과 연결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데, 아카데미의 전통적 문법을 벗어난 이 같은 글쓰기 형태는 명료한 분석보다는 특정 장소에 편재해 있는 ‘공기’를 생생히 전달하기 위한 저자의 선택이다. 미국과 라틴아메리카, 신화와 제의, 경찰과 폭력, 마법과 감각, 예술과 해석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거대한 주제 스펙트럼들이 파편적이면서도 정교하게 얽혀 있다. 각 챕터는 독립적이지만, 전반적으로 “기억, 권력, 감각, 이미지, 신체”라는 타우시크의 핵심적인 문제의식을 변주한다. 이 책은 선형적인 논증이나 중심화된 이론을 제시하지 않는다. 타우시크는 벤야민의 글쓰기와 사유 방식, 특히 ‘파편적 글쓰기’와 ‘이미지적 사유’에 깊은 경의를 표하며, 그것을 자신의 인류학적 글쓰기와 조응시킨다.
벤야민의 의문에 싸인 무덤에서 시작되는 다채로운 지적 여정
『벤야민의 무덤』은 타우시크가 프랑스와 스페인 국경 피레네산맥 근처의 작은 마을 포르부를 방문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이곳은 1940년 9월, 나치 독일을 피해 도망치던 비평가이자 철학자 발터 벤야민(1892~1940)이 국경을 넘는 데 실패하고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한 장소다. 타우시크는 벤야민의 삶과 죽음에 얽힌 정치적 긴장과 실존적 불안, 그리하여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망명과 경계의 문제를 사유의 중심에 두고, 그 무덤에 대한 물리적, 상징적 접근을 통해 역사, 기억, 저항, 글쓰기의 윤리를 탐색한다. 단순히 벤야민의 일대기나 사상을 해설하는 것이 아니라, ‘무덤’을 찾아가는 여정 자체를 철학적·정치적 탐사로 전환시키는 참신한 형식이다. 타우시크는 단선적 내러티브를 거부하고, 기억의 조각과 장소의 잔향, 이미지의 파편들로 역사의 감각을 복원하려 시도한다.
이 글의 가장 큰 의의는 ‘무덤’이라는 장소를 통해 과거의 기억이 단순한 회고가 아닌 현재적 개입이자 윤리적 실천이 될 수 있다는 점을 환기하는 데 있다. 타우시크에게 벤야민의 무덤은 물리적인 장소인 동시에 역사적 침묵을 일깨우는 공간이며, 억압받은 자들의 말 없는 목소리가 응축된 장소다. 따라서 이 텍스트는 하나의 인류학적 텍스트를 넘어서, 전 지구적 불의와 유랑, 기억과 망각 사이에서 우리가 무엇을 기억하고, 어떻게 증언해야 하는지를 묻는 윤리적, 정치적 문서로 읽힌다.
책의 표제작이자 중심축인 ‘벤야민의 무덤’이 책 전체의 분위기를 설정하는 역할을 한다면, 이어지는 ‘아메리카를 구성하기’는 미국의 형성 신화를 비판적으로 고찰하고, 특히 국가와 헌법이 폭력과 추방 위에 세워졌다는 점에 주목한다. 특히 국가와 헌법이 폭력과 추방 위에 세워졌다는 점에 주목하면서 ‘구성constitution’이라는 단어가 지닌 이중성(법적 기반이자 억압의 도구)을 탐구하고, 미국을 하나의 “마법적 폭력”의 산물로 묘사하며, 정치와 신화, 의례가 결합된 방식으로 분석한다.
세번째 챕터 ‘태양은 받는 것 없이 준다’에서는 프랑스의 사회학자 조르주 바타유를 경유해 인간의 경제 시스템과 자연의 순환성 간의 차이를 조명한다. 태양은 무조건적이고 비생산적인 선물을 준다는 점에서, 인간 문명의 욕망 구조와 대조된다. 타우시크는 이를 통해 자본주의적 합리성과 효율성의 이면에 존재하는 과잉과 낭비, 축제를 다시 복권시키려 한다.
네번째 챕터 ‘해변(백일몽)’은 콜롬비아 해변에서의 관찰과 환상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해변이라는 공간은 현실과 비현실, 기억과 환상의 경계에서 작동하며, 저자에게는 백일몽의 장소이자 탈근대적 인류학의 무대가 된다. 감각적 묘사와 심리적 사유가 맞물려, 일종의 감각적 명상문처럼 전개된다.
다섯번째 챕터 ‘본능적 신체성, 신앙, 그리고 회의주의: 마법에 관한 또다른 이론’은 ‘마법’을 단지 전근대적 신앙으로 보지 않는 타우시크의 시각을 잘 보여준다. 그에게 마법은 근대성의 이면에 존재하는 신체적 지식과 감응의 체계로, 회의주의와 신앙이 공존하는 복합적인 양식이다. 타우시크는 라틴아메리카에서의 민속적 신앙과 의례, 신체의 리듬과 감각을 통해 ‘마법의 합리성’을 재구성한다.
여섯번째 챕터 ‘위반’에서는 법과 금기의 경계를 넘는 행위인 ‘위반transgression’에 대해 다룬다. 타우시크는 위반을 단순한 일탈이나 범죄가 아니라, 규범의 존재를 드러내고 그 의미를 갱신하는 제의적 행위로 본다. 특히 바타유의 영향을 받은 이 사유는, 성性, 폭력, 권위에 대한 문화적, 상징적 위반의 정치성을 강조한다.
일곱번째 챕터 ‘NYPD 블루스’는 미국 경찰의 언어, 몸짓, 제스처에 대한 민속학적 관찰을 담고 있다. 경찰이라는 제도 안에서 사용되는 말과 태도는 법의 권위뿐 아니라, 은밀한 권력 행위의 연극적 연출을 포함한다. 저자는 경찰과 ‘법적 폭력’을 일상적 수행practice으로 파악하고, 그것이 만들어내는 사회적 연극을 분석한다.
책의 마지막 챕터인 ‘꽃들의 언어’에서는 죽음과 신체의 물질성, 그리고 식물 사이의 기묘한 연결을 탐색한다. 에차바리아의 뼈로 만든 꽃 사진 작품과 무티스의 삽화 작품, 그리고 맨드레이크와 같은 전설적 식물의 이미지를 통해, 꽃은 더이상 낭만이나 상징의 기호가 아니라 죽음과 관련된다.
현시대 가장 독창적인 인류학 에세이
마이클 타우시크는 한국의 독자들에게 보내는 글에서 몸소 겪어낸 근현대사의 맥락 속 격동과 폭력의 경험을 대중문화가 지닌 강력한 힘과 결합해낸 대한민국의 강력한 이야기 전통을 언급한다. 이렇듯 여전히 존속하는 서사의 힘과 그 풍부한 흐름을 근거로, 그는 1930년대 즈음 벤야민이 점차 사멸해가는 것이라 여겼던 스토리텔링의 전통이 여전히 살아 있음을 조심스레 이야기한다. 미래를 향해 굽이치는 이 스토리텔링의 전통은 대문자 역사보다는 책 속에서 언급되는 남아메리카 노동자들의 어려운 삶에서, 샤먼들의 속임수와 믿음 사이에서, 뼈로 만든 꽃이라는 독특한 예술 작품을 통해서 생생하게 현현한다.
『벤야민의 무덤』은 타우시크라는 작가의 아름다운 인류학적 글쓰기 방식을 만날 수 있는 좋은 기회인 동시에, 벤야민이라는 철학자를 과거의 사상가가 아닌, 오늘의 불안과 저항을 사유하는 살아 있는 존재로 다시 읽게 하는 계기를 제공한다. 또한 ‘기억의 장소’와 ‘경계의 정치학’을 매개로, 한국 사회에서도 여전히 해소되지 않은 역사적 상처와 망각의 문제를 재조명하는 철학적 거울이 되어준다. 우리는 무엇을 잊고 있으며, 무엇을 기억해야 하는가? 그리고 우리는 어떤 무덤을, 어떤 언어로 쓰고 있는가? 이 책은 불안정한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절실한 질문이자 제안이 되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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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글에서 풍경이 역사를 압도하기를 원했다. 여기서 풍경은 비극이 그대로 드러난 곳이자 말들이 일종의 구원을 갈망하며 흩어져 있는 장소다. 설령 내가 나 자신의 이야기를 가질 수 없다고 해도 적어도 내 글 속에는 일종의 빗나감을 품은 어떤 이야기가 있어야 할 것이다. 이야기가 바로 이론이며 그러한 빗나감이야말로 바로 이 구불구불한 세계에서 사유를 비틀거리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_‘저자의 말’에서
“생동감 넘치고 도발적인 통찰을 담고 있으며 사건의 빛깔과 음악을 품은 매혹적인 산문. ‘나는 태평양 연안으로 향한다’고 말하는 타우시크는 우리를 호주의 해변으로, 뉴욕시의 법원으로 데려간다.”_알폰소 링기스(펜실베이니아 주립대학교 철학과 명예교수)
“문화 분석, 더 나아가 사회비평의 정수를 담은 이 책은 이성이 길을 잃은 듯 보이고 폭력은 통제 불능의 상태로 치닫고 있는 이 시대에 더없이 시의적절하다.”_마크 C. 테일러(컬럼비아 대학교 종교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