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명작을 그려낸 화가인가,
시대와 권력자가 띄운 ‘선량한’ 차별주의자인가”
《캔버스를 찢고 나온 여자들》 이유리 작가가
풀어내는 그림 속 권력 이야기
《화가의 마지막 그림》 《세상을 바꾼 예술 작품들》 등 그림을 매개로 사회의 모순을 드러내고 독자들과 꾸준히 소통해왔던 이유리 작가의 신간 《기울어진 미술관》이 출간됐다. 바로 이전 작 《캔버스를 찢고 나온 여자들》에서 남성 화가의 작품에 가려진 여성들의 이야기를 풀어냈다면 이번 책에서는 예술작품 속 여러 권력관계와 그에 숨겨진 ‘마이너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예로부터 예술이 돈과 권력을 떠나 독립한다는 것은 몹시 어려운 일이었다. 화가들은 자신을 후원해주는 권력자와 그림을 구입해주는 재력가들의 입맛에 맞게 그림을 그려야 예술가로서의 생을 유지할 수 있었다. 레오 10세의 후원을 받아 그린 라파엘로의 〈샤를마뉴 대관식〉, 스크로베니 가문의 후원을 받아 그린 조토의 〈최후의 심판〉, 구소련의 선전 화가였던 알렉산드르 게라시모프의 〈연설대 위의 레닌〉 등의 작품이 그러했다.
또한 그림은 자신을 잉태한 시대의 한계를 드러내기도, 당시를 틀어쥐던 권력자를 고발하기도 한다. 마네는 〈올랭피아〉라는 작품에서 성매매 여성인 올랭피아를 그림으로써 당시 부르주아 남성들의 위선적인 성 윤리를 고발했지만, 백인 올랭피아의 아름다움을 ‘강조’하기 위해 흑인 하녀를 배치함으로써 인종차별적 시선을 드러냈다. 툴루즈 로트레크는 물랭루즈 살롱의 여성들을 즐겨 그리며 〈물랭가의 살롱에서〉와 같은 명작을 남겼지만, 이는 ‘편견 없는 그림’이 아니라, 성매매 장부의 특급 고객으로서 포주를 ‘사업가’로 정당화한 것의 결과물이었다.
그 밖에도 작가는 ‘가련함을 활용당한 눈먼 소녀’ ‘부자들의 면죄부용 소품이었던 장애 소년’ ‘전시당하다 죽은 코뿔소’ ‘성소수자 예술가 릴리 엘베’ 등 총 24개의 흥미로운 이야기를 통해 마이너들의 존재를 세상 밖으로 끄집어내며 예술작품이 그려졌던 당대의 문화적 편협함과 무지를 고발한다.
“권력으로 빚어낸 예술작품 속에는
수많은 마이너들이 있었다”
무용수, 흑인 하녀, 장애 소년, 전시된 코뿔소까지
캔버스 속 소품이기를 거부하고 뛰쳐나와
마침내 해방에 이른 존재들에 대하여
총 4부로 구성된 이 책의 1부 〈기울어진 그림을 부수는 존재들〉에서는 화가의 그림 속 흑인, 장애인, 병든 사람, 성소수자 등을 조명한다. 흔히 미술계에서 흑인은 백인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장치’로 쓰였다. 이는 마네의 〈올랭피아〉와 루벤스의 〈거울을 보는 비너스〉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화가 바스키아는 이런 미술계에서의 흑인의 ‘쓰임’에 대해 비판하고 흑인들에게 제자리를 찾아주고자 〈올랭피아의 하녀〉를 그렸다.
안드레아 만테냐의 〈성 세바스티아누스〉와 뭉크의 〈병든 아이〉를 통해서는 우리 사회가 아픈 이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보여준다. 지금까지 병든 사람은 ’죄를 지어 벌을 받는 것’ 혹은 ‘지극히 개인적인 불행’으로 여겨왔다. 하지만 작가는 질병이란 불평등한 사회구조·문화·빈곤 문제 등이 스며있으며, 아픈 사람에게는 죄가 없다는 것을 꼬집는다.
이 밖에도 작가는 미켈란젤로의 〈가니메데스의 납치〉라는 그림을 통해 미켈란젤로가 청년 톰마소를 사랑했지만 자신을 이성애자로 ‘커버링할’ 수밖에 없었던 이야기를 들려준다. 반대로 게르다 베게너의 〈하트의 여왕〉 속 트랜스젠더 릴리 엘베의 삶을 통해 ‘정상성’이란 무엇이며, 커버 따위 없어야 할 세상에 관해 되묻는다.
2부 〈그림 속 소품이기를 거부한 여성들〉에서는 여전히 끝나지 않은 여성혐오적 시선과 차별에 관해 이야기한다. 철학자 플라톤에 따르면 자궁은 “짐승 안의 짐승”이었다. 얀 스테인의 그림 〈의사의 왕진〉을 살펴보면 ‘자궁 혐오’에 대한 오랜 역사를 알 수 있다. 아직까지도 여성은 ‘월경을 하면 호르몬의 작용으로 인해 히스테릭해진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이는 여성을 열등한 존재로 위치시키기 위해 자궁을 혐오해왔던 역사가 이어져오는 것이라고 작가는 말한다.
사회는 여성에게 바람직한 어머니상’을 강요하기도 한다. 세간티니는 〈욕망의 징벌〉을 통해 ‘성모 마리아’와 같지 않은 ‘부도덕하고 나쁜 어머니들’에게 벌을 내렸다. 그와 반대로 휘슬러는 〈회색과 검정의 조화〉에서 평생을 헌신했던 어머니를 매정하고 차갑게 그렸다. 작가는 모성이란 지나쳐도 모자라도 안 된다는 ‘이상한 모성 신화’의 강요가 여성들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애나 블런던의 〈단 한 시간만이라도〉와 피터르 얀선스 엘링가의 〈네덜란드 집의 내부〉에서는 사회 안팎으로 착취당하는 여성들의 노동 현실을 드러낸다. 작가는 이 그림들을 통해 ‘여성은 최후의 식민지다’라는 말에서 벗어나 여성의 사회적 노동과 가사노동에 정당한 지불을 해야 할 때라고 말한다.
3부 〈뒤틀린 권력에 균열을 내는 그림들〉에서는 어린이 혐오, 노인 혐오, 전염병에서 비롯된 혐오, 재개발로 인해 쫓겨나는 사람들에 관해 살펴본다. 어른들은 어린이에게 어수룩할 정도의 순진함을 기대하고, ‘어린이다움’을 강요한다. 어린이는 당연히 ‘어른의 소유물’로 생각했다. 이는 윌리엄 호가스 〈그레이엄 집안의 아이들〉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당시 부유한 집안의 어린이들은 어른처럼 코르셋을 입거나 꽉 조이는 정장을 입어 소화 장애에 시달려야 했다. 반대로 가난한 집안의 어린이들은 값싼 임금으로 부릴 수 있는 ‘인간이 덜 된 인간’으로 생각했다.
미켈란젤로의 조각상으로 유명한 〈피에타〉 상에는 노화를 죄악으로 생각함이 나타난다. 그는 죽은 예수를 고요하게 끌어앉은 성모 마리아 상 〈피에타〉로 예술계에서 큰 찬사를 받았지만 “여인이 늙은 것은 죄악이 있기 때문”에 성스러운 성모 마리아의 모습을 소녀로 조각했다. 그러나 반대로 옥준의 〈농암 이현보의 초상〉에서는 이현보의 얼굴에 드리워진 주름과 검버섯을 그대로 그렸다. 이는 노인이 되어야만 갖출 수 있는 미덕과 학식, 인품과 지혜 등을 드러내고자 함이었다.
4부 〈선전 도구에 저항하는 예술가들〉에서는 예술권력에 저항하고자 했던 예술가들의 이야기와 동물권·환경 문제·투기 등 좀 더 다양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권력자들은 언제나 그림의 힘을 활용해 자신들의 통치 지배의 정당성을 확보하려고 했다. 이는 미국 CIA의 선전 도구로 활용된 잭슨 폴록의 삶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는 〈가을의 리듬〉이라는 아름다운 추상표현주의 작품으로 거장의 반열에 올랐지만 그의 자유로운 화법은 CIA의 계획에 의해 소련의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공격하기 위한 도구로 활용됐다.
이와는 정반대로 현실의 부조리함을 꼬집은 화가들도 있었다. 매리 커샛이 그 예이다. 커샛은 가부장적이었던 아버지를 거스르고 비혼을 선택하며 스스로의 주체적인 삶을 선택했다. 이러한 모습은 그의 그림 〈마차를 모는 여인과 소녀〉를 통해서도 드러난다. 피에트로 롱기의 〈베네치아에서 열린 코뿔소 전시회〉라는 그림에서는 오랫동안 인간들의 ‘구경거리’였던 동물들의 고통이 그대로 드러난다. 그가 의도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인간에게 끌려다니며 전시되다 죽은 코뿔소 클라라와 이를 구경하는 사람들을 화폭에 그대로 담아 비판적 시각을 자아낸다.
환경오염에 대한 현실을 화폭에 그대로 담은 인물도 있었다. 마네의 〈아르장퇴유〉가 그 예이다. 그는 센 강에 뜬 보트를 배경으로 한가로운 파리지앵을 그린 것 같지만, 사실은 아르장퇴유의 염색 공장에서 배출된 폐수로 인해 강물이 쪽빛으로 변한 것을 그림을 통해 보여주고자 했다.
“지금까지의 예술 세계는
권력자들의 시선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이제는 그 기울어진 판도를 뒤집을 때다”
그림이 빚어지기까지 묵인돼왔던 희생들,
불평등이 아름다움으로 박제된 순간
사라진 이들을 복원하려는 작가의 노력은 이 책 전반에 드러난다. 당연하다고 여겼던 아름다움이 진실이 아님을 알았을 때, 독자들에게도 ‘낯설게 보기’가 시작된다. 작가는 그동안의 예술 세계가 남성중심적․권력적 시선으로 기울어져 있었던 것, 아무런 거름망 없이 자연스럽게 흡수해왔던 것들에 독자들이 의문을 품기를 바라며 이 책을 집필했다. 옳고 그름에 관해서도 단순히 이분법으로 나누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술의 참모습을 다각도로 살펴보고, 그 안에서도 회색지대가 있음을 드러내고자 했다. 일례로 마네는 여성을 성상품화하는 사회를 고발하기 위해 〈올랭피아〉를 그렸지만 흑인 인권을 생각하지 못했다. 존 에버렛 밀레이는 〈눈먼 소녀〉를 통해 애처롭고 아름다운 장애인의 모습을 표현하고자 했지만, 우리가 장애인에게 ‘바라는’ 시선에 대해 생각지 못했다. 작가는 힘없는 자들이 역경을 딛고 무언가를 해내는 것에 감동을 얻는 시선이 과연 이들을 동등하게 바라보는 시선인지를 되묻는다. 그리고 그림이 빚어지기까지의 묵인돼왔던 희생들과 불평등이 아름다움으로 박제된 순간을 끊임없이 포착하며 그림 속 존재들을 해방에 이르도록 끄집어낸다. 나아가 자본 권력에 저항하는 오늘날의 예술가들에게 이 책이 작은 힘이 되기를, 이 기울어진 판도가 뒤집히기를 소망한다.
본문 중에서
예술이 돈과 권력을 떠나 독립하기는 너무나 힘들다. 예로부터 화가가 자신을 후원해주는 권력자와 그림을 구입해주는 재력가들의 도움을 외면한다는 것은, 직업 화가가 되지 않겠다는 선언과도 같았다. 순수한 취미로서의 회화가 등장한 근대 이전에는 그림이란, 주문자가 있어야만 비로소 그려지던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화가들은 대체로 권력과 밀월 관계를 유지했다.
막달라 마리아는 남성 제자 공동체 안에서 ‘왕따’ 신세였다. 특히 베드로는 막달라 마리아를 드러내놓고 적대했다. 이렇게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었으니, 예수의 죽음 이후 막달라 마리아가 철저히 배제된 건 당연한 수순 아니었을까. 베드로가 초대 교황이 되어 교회 제도를 이루고, 부활에 의심을 품었던 사도들마저도 교회 주류 전통 속에서 왕좌에 올랐을 때, 예수의 가장 신실한 사도였던 막달라 마리아는 열두 제자에도 포함되지 못한 채 제도권 밖으로 밀려났다.
작가 에밀 졸라는 마네가 올랭피아에서 흑인 하녀를 그린 것은 ‘검은 터치’가 필요했기 때문이라며 다음과 같이 분석했다. “마네가 작품 속에 몇몇 오브제와 인물을 조합시켜 놓았다면, 그것은 마네의 철학적 사고 때문이 아니라 아름다운 색채와 대비를 이뤄내고 싶다는 그의 욕망이 표현된 것이다.” 즉 별다른 역할 없는 흑인 하녀를 등장시킨 것은 두 인물의 피부색을 강하게 대비시켜 그림에 색채 감각을 더하려는 의도였다는 것이다.
외모가 아름답거나 장애를 ‘극복’해 대중에게 감동을 주는 ‘슈퍼 장애인’, 혹은 기괴한 외양으로 대중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흥미를 줄 수 있는 장애인은 사회에 나올 수 있었다. 여기에 부합하는 대표적 슈퍼 장애인으로는 헬렌 켈러를 들 수 있다. 인형을 품에 안고 선생님의 손바닥에 ‘doll’이라고 쓰는 소녀, 무릎 위에 점자책을 펼쳐놓고 장미꽃 향기를 맡는 천사 같은 여자, 시각·청각 장애를 뛰어넘은 인간 승리의 주인공. 우리가 아는 헬렌 켈러의 모습이다. 그러나 이는 사실 의도된 것이다.
자줏빛 짧은 원피스를 입은 사람이 ‘하트의 여왕’ 카드를 꺼내 들었다. 하트의 여왕은 ‘미인’을 뜻하는 카드. 담배를 문 채, 무심하게 시선을 던지는 그는 진정 하트의 여왕 같다. 날렵한 눈썹, 탐스러운 붉은 입술, 당당한 표정과 대담한 자세까지, 덴마크의 화가 게르다 베게너Gerda Wegener, 1886∼1940는 릴리 엘베라는 이름의 이 사람을 정성을 담아 그려냈다. 당연했다. 릴리는 게르다가 사랑하는 ‘남편’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남편! 릴리는 당시 생물학적으로는 남자였다.
툴루즈 로트레크는 이런 성 구매 경험을 토대로 자신을 엄숙한 성도덕으로부터 ‘해방된’ 예술가로 포장했고, 19세기 프랑스를 지배하던 성 보수주의 규범에 반항한 화가로 평가받는 데 성공했다. 그렇지만 의도했든 아니든, 툴루즈 로트레크가 그린 ‘노동으로서의 성매매’는 성 구매자를 ‘서비스 이용자’로, 포주를 ‘사업가’ 혹은 ‘관리자’로 은연중에 정당화한다. 결과적으로 툴루즈 로트레크의 그림이 성매매 현장의 폭력성을 가리는 역할을 했다고 하면 너무 박한 평가일까.
일찍 어머니를 잃어서인지 세간티니는 어머니를 ‘성스러운 성모 마리아’처럼 묘사하는 등 모성을 미화하는 그림을 많이 그리곤 했다. 고아로 설움을 받으면서 ‘내게 어머니만 있었더라면, 어머니가 보호해주는 정상적인 가정이 내게 있었더라면’이라며 한숨을 수도 없이 쉬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억울한 마음은 엉뚱한 곳으로 튀었다. 자애로운 어머니를 너무나 원했던 그였기에, ‘일탈하는 어머니’들을 곱게 볼 수 없었던 것이다. 그에게 ‘성모 마리아’가 아닌 여성들은 ‘부도덕하고 나쁜 어머니’였다.
피터르 얀선스 엘링가가 〈네덜란드 집의 내부〉를 그렸던 17세기부터 해나 컬윅이 살았던 19세기를 거쳐 우리가 사는 21세기에 이르기까지 변화가 없는 것이 있다. 바로 가사노동에 대한 인식이다. 가사노동은 남성들의 임노동처럼 시장에서 팔리는 상품을 생산하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무시당하는, ‘저평가된 노동’이다. 돌봄을 포함한 가사노동은 ‘여성의 본능’으로 할 수 있는 일이기에 당연히 여성 몫이 되었고, 본능의 발로에서 하는 일이기에 대수롭지 않게 여겨졌다.
‘어린이답게’란 무엇일까? 어른이 정한 테두리 안에 있으라는 말이다. 어른들은 어린이에게 어수룩할 정도의 순진함을 기대하는데, 그 기대의 테두리를 넘어서면 당장 ‘어린이스럽지 않다’는 판결이 내려진다. 대체로 어른은 어린이를 독립 개체로 바라보지 않기 때문이다. 어른 눈에 비친 어린이는 합리적으로 판단하고 능동적으로 행동하기에는 미숙한 존재이고, 어른의 소유물이며, 과도기의 인간일 뿐이다.
아이들이 보는 서양 전래동화집 삽화에서 늙음은 대놓고 악의 이미지로 등장했다. 매부리코, 듬성듬성한 치아, 곧 튀어나올 것 같은 핏발 선 눈, 봉두난발을 한 백발의 꼬부랑 할멈. 전형적인 마녀의 모습 아닌가. 늙음이란 순수하지 못한 것이고 악하다는 생각은 이 정도로 사회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다. 그러니 노인이 되면서 변하는 외모가 ‘징벌’로 받아들여진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이는 르네상스의 거장 미켈란젤로가 24세 때 제작한 대표작 〈피에타〉에서도 엿볼 수 있다.
부자들은 천국행 티켓을 사 모으듯 가난한 이들에게 자선을 베풀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증거를 그림으로 남기고 집에 걸어두었다. 리베라의 〈내반족 소년〉도 그런 ‘선행의 증거’ 중 하나다. 소년이 왼손에 쥔 쪽지엔 보란 듯이 또렷하게 “(당신이) 신의 사랑을 받으려거든 저에게 자선을 베풀어주세요”라고 라틴어로 적혀 있다. 이 그림의 의뢰자는 자신이 쪽지의 내용을 잘 실현하고 있음을 과시하고 싶었으리라.
‘코로나19’라는 전대미문의 바이러스가 전 세계를 휩쓸고 있다. 전 지구적인 위기라 할 만하다. 역시나 이번에도 약속이나 한 듯이 분노와 불안을 쏟아낼 ‘희생양’을 찾아 어슬렁거리는 하이에나를 세계 곳곳에서 목격할 수 있다. 인종차별이 제일 먼저 등장했다. 중국의 우한 지역에서 첫 환자가 발생하자, 중국인과 동양인들은 서구에서 “네 나라로 가라”고 욕을 먹고 신체적 폭력까지 당하곤 했다.
야생동물들이 인간종의 시각적 쾌락을 위해 전시될 동안, 다른 한쪽에서는 가축들이 인간종의 미각에 봉사하기 위해 대규모로 도륙당했다. 16세기 네덜란드 화가 피터르 아르천의 〈푸줏간〉은 동물이 제물이 된 현장으로 우리를 데려간다. 그림 전면에는 갓 도살된 듯한 날고기들이 적나라하게 진열돼 있다. 피투성이로 관객을 직시하는 소의 눈을 보는 순간 우리는 죽음과 정면으로 마주하게 된다. 소뿐이랴. 돼지의 몸도 낱낱이 해체돼 있다.
요즘 적어도 집 밖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막는 제도적 장벽은 없다. 하지만 여성들이 남성만큼 한적한 둘레길을 안심하고 혼자 걸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거리를 걷는 여성들은 ‘캣콜링Catcalling’을 당하기도 한다. 캣콜링은 남성이 길거리를 지나가는 불특정 여성을 향해 휘파람 소리를 내거나 성희롱적인 발언을 하는 행위를 뜻한다. 이 모든 게 거리가 여전히 남성이 주도하는 공간이며, 여성인 당신은 지금 ‘잘못된’ 장소에 있다는 가부장 사회의 신호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