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왜 좌파가 노동계급에게 지지받지 못하는가?”
글과 삶이 일치한 작가 조지 오웰
지옥 같은 탄광 체험을 통해
‘설익은 좌파 지식인’들을 통렬히 비판하다!
1936년 서른셋의 청년 조지 오웰이 영국 북부 탄광 지대에 관한 르포를 청탁받고 그들과 함께 지내며 겪은 생생한 체험담. “실업을 다룬 세미다큐멘터리의 위대한 고전”으로 불리며, 2010년 한겨레출판의 초판 이후 15년간 노동·계급·자본주의 등 정치·사회문제에 관심 있는 독자들의 필독서로 사랑받으며 회자되었다. 이번에 오웰의 다른 에세이 『나는 왜 쓰는가』와 함께 새 장정을 입은 개정판으로 새롭게 선보인다.
지옥과도 같은 탄광 안의 모습, 비참한 주거 환경, 광부들의 임금과 가정의 생활비를 비롯해 주택 구성과 재건축 문제에 대한 메모까지, 단순한 기록을 넘어 번뜩이는 통찰과 특유의 위트를 바탕으로 노동계급의 실상을 치밀하게 그려냈다. 빈틈없는 취재와 날카로운 상황 묘사 덕에 역사학자들이 찾는 자료가 되었을 정도. 특정한 시기, 특정한 장소의 이야기지만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노동계급으로부터 지지받지 못하는 ‘설익은 좌파 지식인’들에게 던지는 메시지도 뼈아프다.
『동물농장』과 『1984』라는 대표작 이전의 오웰의 작품 세계에서 중대한 전환점이 되는 책이기도 하다. 이 작품을 쓴 시기와 관련하여 오웰은 「나는 왜 쓰는가」에서 이렇게 회고한 바 있다. “1936년부터 내가 쓴 심각한 작품은 어느 한 줄이든 직간접적으로 전체주의에 ‘맞서고’ 내가 아는 민주적 사회주의를 ‘지지하는’ 것들이다.” 그는 실제로 이 작품을 쓰던 무렵부터 보다 논쟁적이고 전투적인 작가로 거듭났다. 원고를 출판사에 넘겨주자마자 “파시즘에 맞서” 싸우기 위해 스페인내전에 참전하며 자신의 예술적·정치적 입장을 정리해나갔다.
“이렇게 1킬로미터쯤 가다 보면 도저히 참을 수 없이 고통스러워진다. 과연 끝까지 갈 수 있겠냐는 의문이 들기 시작하며, 그보다 더한 것은 도대체 돌아갈 때는 어떻게 하나 싶어진다는 것이다. 그럴수록 속도는 점점 느려진다. 이렇게 너무나 낮은 곳을 쪼그린 자세로 나아가기를 수백 미터. (…) 이제는 네 발로 기어야 하는데, 쪼그려 걷기에 질리고 나면 이것도 위안이 된다.”
몸을 던지는 글쓰기, 르포르타주의 위대한 고전
문학적 감동과 역사적 면밀함을 모두 갖추다
버마에서의 제국 경찰 활동을 참회하는 의미로 자신이 체험한 부랑자 생활을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에 담아 명망을 얻어가고 있던 조지 오웰은, 그를 눈여겨보고 있던 출판인 빅터 골란츠로부터 청탁을 받는다. 당시 영국 북부 지역에 만연해 있던 탄광 노동자들의 실업 문제에 대한 르포를 써달라는 것이었다. 오웰은 1936년 초 두 달에 걸쳐 위건, 리버풀, 셰필드, 반즐리 등 랭커셔와 요크셔 지방 일대의 탄광 지대에서 광부의 집이나 노동자들이 묵는 싸구려 하숙집에 머물면서 면밀한 조사 활동을 벌인다. 꼼꼼한 조사 내용과 생생한 상황 묘사 덕에 옥스퍼드 대학의 역사학자였던 존 스티븐슨 교수는 “실업을 다룬 세미다큐멘터리의 위대한 고전”이라 부르기까지 했다. 청결하지 못한 하숙집 풍경과 그곳 사람들(1장), 지옥과도 같은 탄광 안의 모습(2장), 광부들의 임금과 실업자 가정의 생활비 등(3, 5, 6장)과 각각의 주택 구성과 재건축 문제에 대한 메모(4장)까지 그 모습들을 하나씩 살펴보면 참혹한 실상에 충격을 감추기 어렵다가도 문득 지금 우리의 현실은 얼마나 더 나을까 되돌아보게 된다. 오웰은 “광부들이 일하는 모습을 보노라면, 다른 세상에 다른 사람들이 살고 있구나 하고 문득 깨닫게 될 것”이라며 “저 아래 누가 석탄을 캐고 있는 곳은, 그런 곳이 있는 줄 들어본 적 없이도 잘만 살아가는 이곳과는 다른 세상”이지만 “지상에 있는 우리의 세계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나머지 반쪽”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역자 이한중은 오늘날에도 “문명의 안락을 누리는 계층이 있으려면 누군가 죽도록 위험한 환경에서 기막힌 노역에 시달리는 착취를 당해야만” 한다며 “하청회사의 비정규직, 양산되는 실업자와 취업포기자, 기본 생활이 안 되는 숱한 영세 자영업자, 내국인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일을 받아 하는 외국인 노동자” 등 90여 년이 지난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노동문제를 지적한다. 책에 추천의 말을 보낸 박노자 교수는 책 말미에 나오는 명언 “연합해야 할 사람은 사장에게 굽실거려야 하고 집세 낼 생각을 하면 몸서리쳐지는 모든 이들”이라는 말에 주목한다. 오웰의 사회주의란 결국 “노동하는 인간을 ‘윗사람’ 앞에서 굽실거리는 ‘개미’로 만드는 자본 독재에 대한 모든 상식적, 양심적인 사람들의 반란”이라는 것이다.
“나는 심지어 지금도 만일 임신한 여자들이 땅속을 기어다니지 않으면 석탄을 얻을 수 없다고 한다면, 우리가 석탄 없이 살기보다는 그들에게 그런 일을 시키리라 생각한다. 어떤 육체노동이든 다 그렇다. 그것 덕분에 살면서도 우리는 그것의 존재를 망각한다.”
진보 세력을 위한 ‘악마의 대변인’ 조지 오웰
『1984』의 씨앗을 내비치다
책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탄광 지대에서의 체험담을 바탕으로 한 르포가 1부(1~7장)라면, 2부(8~13장)는 당시 영국의 정치 상황에 대한 오웰의 에세이다. 이 부분에서 오웰은 당시 사회주의 운동을 이끌어가던 좌파 ‘지식인’들을 호되게 비판하는데, 이 때문에 이 책의 출판인인 빅터 골란츠는 2부의 내용이 출판인의 견해와 상당한 차이가 있음을 밝히는 서문을 덧붙여 출간하게 된다. 그뿐만 아니라 후에 『카탈로니아 찬가』와 『동물농장』에 대해 출간을 거부하기까지 한다.
탄광 노동자들의 고된 작업과 실업자 가정의 처참한 생활환경을 확인한 오웰이 선택한 해법은 사회주의다. 하지만 현실에서 사회주의는 “파시즘의 맹공에 후퇴”하고 있었고, 오웰은 “지금처럼 계급문제를 어리석게 다룬다면 사회주의자가 될 수 있는 많은 사람들을 쫓아버려 파시스트로 만들어버릴 수” 있다고 경고한다. 그는 2부의 전반부(8~10장)에서 ‘하급 상류 중산층’(그는 스스로를 “상류 중산층 가운데 하급에 속한다”고 소개한다)이었던 자신의 예를 들며 계급문제를 감상적인 접근으로 해결할 수 없음을 분명히 한다. 그리고 2부의 후반부(11~13장)에서 본격적으로 사회주의의 문제를 이야기한다. “생각 있는 보통 사람”들이 사회주의에 적의를 보이고 있는 현실을 직시하고 “사회주의를 방어하기 위해 … 사회주의를 공격”한다. 11장에서는 “이론적으로는 계급 없는 사회를 위해 애쓰면서도 실제로는 자신의 구질구질한 사회적 위신에 악착같이 매달린다는” 중산층 사회주의자의 문제를 집중적으로 비판한다. 12장에서는 보다 심층적으로, 산업화와 분리해서 생각하기 힘든, 사회주의 자체가 가진 위험성을 지적한다. “기계가 압도함에 따라 손상되지 않을 인간 활동이 ‘과연’ 있겠느냐”는 질문은 사회주의 역시 산업화에 대한 성찰 없이 물질적인 진보에 안주하게 될 때 파국을 맞이할 수밖에 없다는 예견이고, 이는 바로 『1984』의 문제의식이기도 하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발전된 형태의 사회주의가 중산층에게만 국한된 이론이라는 점이다. 전형적인 사회주의자는 두려움으로 덜덜 떠는 노부인들의 상상과는 달리 기름투성이 작업복에 목소리가 걸걸하며 인상 험악한 노동자가 아니다. 그보다는 5년 뒤면 부잣집 딸과 결혼하고 가톨릭교도로 개종할 가능성이 다분한 젊고 속물적인 과격파다.”
추천사
오웰은 ‘비판적 개인’의 대명사가 된 지 오래다. 자기 자신을 포함한 모든 것에 대해서 매서운 비판정신을 보였던 오웰은 자본주의도, 자본주의와 싸우는 시늉만 했던 스탈린주의도 동시에 비판할 줄 알았다. 20세기 문학 전체를 통틀어 가장 선명하게 ‘비판적 개인’의 위치를 고수해온 오웰이 죽을 때까지 자신을 ‘사회주의자’라고 생각했던 것은, 이 세상의 모든 사회주의자들에게 하나의 희망으로 보이지 않을 수 없다. 이는 ‘민주적 사회주의’와 ‘비판적 개인’의 독립성 사이에 그 어떤 적대적 모순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의미하기 때문이다.
오웰의 사회주의를 이해하자면 『위건 부두로 가는 길』은 필독서다. 오웰은 이 책에서 노동자에게 인간적 존엄성을 허락하지 않는 비참한 노동과 생활의 여건을 묘사할 뿐만 아니라 노동자에게 인간다운 삶을 가져올 사회주의의 요체도 잘 설명한다. 그의 사회주의는 기본적으로 ‘상식적’이다. 이 책 말미에 나오는 명언대로 “연합해야 할 사람은 사장에게 굽실거려야 하고 집세 낼 생각을 하면 몸서리쳐지는 모든 이들이다”. 그들이 마르크스주의를 믿든 안 믿든, 육체노동자든 사무직 노동자든, 어떤 문화적 배경을 가지든 상관없다. 사회주의란 결국 노동하는 인간을 ‘윗사람’ 앞에서 굽실거리는 ‘개미’로 만드는 자본 독재에 대한 모든 상식적, 양심적인 사람들의 반란일 뿐이다. 전태일의 외침대로 ‘기계’로 살고 싶지 않은 모든 사람들의 연대는 바로 오웰이 원했던 바다. 각종 ‘이론가’와 ‘정파’들이 오랫동안 티격태격하면서 노동자들의 연대를 불가능하게 만들어온 한국과 같은 땅에서 오웰의 이야기는 특히 절실하다. 그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사회주의적 미래로의 길을 보여준다.
_박노자(오슬로국립대 교수)
내가 사랑하는 작가 리베카 솔닛은 조지 오웰의 열혈 독자였다. 나는 솔닛을 따라 오웰을 읽기 시작했다. “그의 가장 암울한 글에도 아름다움의 순간들이 있다. 그의 가장 서정적인 에세이들이 현실의 문제들과 씨름하는 것처럼.” 솔닛이 『오웰의 장미』에서 한 말이다. 그녀는 정확했다. 아름다우면서도 철저히 현실적인 글들이라니, 그런 글을 쓰는 재능은 몹시 드물다. 오웰은 축복 같기도 하고 저주 같기도 한 재능을 가지고 이 어려운 일을 해낸다. 에세이, 소설, 르포르타주, 이 모든 장르에서!
_진은영(시인)
본문 중에서
아침 식사 때 식탁 밑에 가득 찬 요강단지가 있는 것을 본 날, 나는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있다 보면 더 우울해질 것 같았다. 더럽고 냄새나고 음식이 형편없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무의미하게 정체되어 썩어간다는 느낌, 사람들이 지하에 갇혀 바퀴벌레처럼 같은 자리를 빙글빙글 기어다니며 끊임없이 비열한 불평불만만 늘어놓고 있다는 느낌이 더 견디기 힘들었다.
그들이 하는 일은 보통 인간의 기준으로 보자면 거의 초인적이라 할 만큼 엄청나다. 그것은 그들이 어마어마한 양의 석탄을 퍼 담을 뿐만 아니라, 두세 배 힘든 자세로 작업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계속해서 기는 자세를 유지해야만 하는데(무릎을 펴려고 했다간 천장에 머리를 부딪치지 않을 수 없다) 그게 얼마나 힘든지는 시늉만 해봐도 쉽게 알 수 있다. 삽질은 서서 할 때 더 쉬운 법이다. 삽을 움직일 때 무릎과 허벅지를 이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무릎을 꿇게 되면 그 부담을 팔과 배 근육으로 다 떠안아야 한다.
이렇게 저열한 불편과 냉대를 당하고, 늘 기다려야 하고, 모든 걸 상대방 편한 대로 해야 하는 것은 노동계급의 생활에선 당연한 일이다. 무수히 많은 영향력이 끊임없이 노동자에게 압력을 행사하여 ‘피동적인’ 역할로 축소시켜버린다. 그는 행동하는 게 아니라 무엇에 따라 처신하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신비로운 권위의 노예임을 자각하며, 자신이 이것이나 저것이나 다른 그 무엇을 원해도 ‘그들’이 결코 허용하지 않으리라는 확신을 갖고 있다.
글이란 게 그렇게 미약한 것이다. ‘지붕 샘’이나 ‘여덟 식구에 침대 넷’이란 짤막한 문구가 무슨 소용이겠는가? 흘려 보면서 아무 인상도 남기지 못할 말에 불과하다. 그런가 하면 이 짧은 말들에 얼마나 비참한 현실이 담길 수 있는가! 이를테면 과밀 문제를 보자. 방 셋인 집에 식구가 여덟이나 열인 경우가 꽤 흔하다. (…) 내가 가본 어떤 집에서는 장성한 딸 셋이 한 침대를 쓰면서 모두 다른 시간대에 일을 나갔으니, 서로 일어나거나 쉬러 들어올 때 곤하게 자는 사람을 깨워야 했다.
그런데도 그들은 왜 자기 재능을 좀처럼 발휘하지 않는 걸까? 누구보다 시간이 많은 그들이 왜 차분히 앉아 글을 쓰지 못하는 걸까? 그것은 글을 쓰기 위해서는 안락과 고독뿐 아니라(노동계급의 집에선 고독하기도 어렵다) 마음의 평화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실업이라는 암울한 그림자가 드리운 상황에서는, 무엇엔가 전념한다는 것도 무언가를 창조하는 데 필요한 ‘기대감’을 발휘한다는 것도 거의 불가능하다.
랭커셔에 가서 타고난 성한 이를 가진 노동계급을 만나보려면 한참을 찾아봐야 한다. 실제로도 아이가 아닌 한 이가 성한 사람은 아주 드물다. 그리고 아이들일지라도 이가 무르고 푸른빛이 도는데, 내가 보기엔 칼슘 부족이 아닌가 싶다. 치과의사 몇몇은 내게 산업 지대에서는 서른 넘은 사람치고 이빨이 성한 경우는 비정상에 가까워지고 있다고 했다. 위건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내게 치아는 되도록이면 일찌감치 “없어져버리는” 게 상책이라고 했다. 한 여인은 “이는 곧 불행”이라 했다.
노동계급의 가정에는(실업 상태 아닌 비교적 살 만한 가정을 말한다) 다른 데서는 찾아보기 쉽지 않은 따스하고 건전하고 인간적인 공기가 있다. 나는 일거리가 꾸준하고 벌이가 괜찮다면(그러기가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지만) 육체노동자가 ‘배운’ 사람보다는 행복할 가능성이 많다고 감히 말하겠다.
어떤 호감도 혐오감도 ‘몸’으로 느끼는 것만큼 근본적일 수는 없다. 인종적 혐오, 종교적 적개심, 교육이나 기질이나 지성의 차이, 심지어 도덕률의 차이도 극복할 수 있다. 하지만 신체적인 반감은 극복 불능이다. (…) 평균적인 중산층 사람이 노동계급은 무식하고, 게으르고, 술꾼이고, 상스럽고, 거짓말쟁이라 믿도록 교육받고 자란다 해도 큰 문제가 아닐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이 더러운 존재라 믿도록 교육받는다면 대단히 해로운 일이다.
그때 내가 진심으로 원한 것은 번듯한 세계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길을 찾는 것이었다. 나는 그 방법에 대해 오랫동안 숙고했고, 세부적인 부분을 계획하기도 했다. 말하자면 어떻게 모든 걸 팔아버리며, 가진 걸 다 버려버리며, 이름을 바꾸며, 입고 있는 옷 말고는 아무것도 돈 한 푼도 없이 새출발을 할 것인지를 꼼꼼히 헤아렸던 것이다. (…) 일단 그들 사이에 섞여서 그들에게 받아들여진다면 나는 밑바닥까지 내려간 것일 테고, 그러면 죄책감을 얼마간 떨쳐버릴 수 있으리라.
직시해야 할 사실은, 계급 차별을 철폐한다는 것은 자신의 일부를 포기하는 것을 뜻한다는 점이다. 여기 중산층의 전형적인 일원인 내가 있다. 내가 계급 차별을 없애기 바란다고 말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고 행하는 거의 모든 것은 계급 차별의 산물이다. 나의 모든 관념은(선악에 대한, 유쾌와 불쾌에 대한, 경박과 경건에 대한, 미추에 대한) 어쩔 수 없이 ‘중산층’의 관념이다.
런던에서 열린 독립노동당의 한 지회에 처음 참석했다가 맛본 소름 끼치는 충격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그때 나는 ‘이따위’ 쩨쩨한 것들이 노동계급을 위해 싸우는 투사란 말인가, 하는 생각을 했다. 거기 모인 사람들이 남녀를 불문하고 우월감 가득한 거만한 중산층 중에서도 가장 질 나쁜 성흔(聖痕)을 지닌 이들이었던 탓이다. 진짜 노동자가, 이를테면 탄광에서 막 퇴근한 시커먼 광부가 그들 가운데로 갑자기 걸어 들어왔다면, 그들은 몹시 난처해하거나 화를 내거나 역겨워했을 것이다.
더 급한 문제는 파시스트 세력이 유럽을 장악할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사회주의를 효과적인 형태로 널리 그리고 빨리 확산시키지 못한다면, 파시즘을 타도할 가망은 없어진다. 사회주의야말로 파시즘이 상대해야 할 유일한 적수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