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는 존재를 몰고 올 수 있을까
존재는 세계를 불러낼 수 있을까
이질적 어법으로 탄생한 질문의 시
첫 시집 『4월아, 미안하다』에서 경쾌한 감수성과 세련된 언어 의식으로 개성 있는 시 세계를 보여준 심언주 시인의 두 번째 시집 『비는 염소를 몰고 올 수 있을까』가 출간되었다. 시인은 원인과 결과가 불분명한 의문문을 통해 ‘답할 수 없음’이라는 유일한 결과로 수렴되는 공회전의 세계로 독자를 인도한다. 비는 염소를 몰 수 있는 주체가 아니며 염소 또한 비의 생래를 알지 못한다. 그 둘의 소통 가능성을 묻는 무심한 질문에서부터 시인은 언어와 존재, 존재와 세계의 탐구를 진행한다. 모든 관계는 각자의 입속에 있는 혀처럼 무관하지만, 계속되는 질문과 질문의 메아리는 결국 “구름다리를 놓”아, “출렁출렁 당신의 혀와 내 혀를 잇”는다. 시집 『비는 염소를 몰고 올 수 있을까』에서 언어와 존재 그리고 세계는 키스하는 연인의 혀처럼 분리 불가능한 관계를 맺는다. 이 모든 것의 시작은 질문에 있다. 『비는 염소를 몰고 올 수 있을까』는 대답을 요구하지 않는 질문이며 동시에 대답이 정해져 있는 질문이다. 진실로 우리는 소통할 수 있을까? 과연 비는 염소를 몰고 올 수 있을까? 심언주의 시는 “광장이 장미를 알아채지 못하게”, “온몸이 타오르기를” 기다리면서 이질적이고도 환상적으로 대답한다. 그 대답은 물론, 또 다시 의문형 문장일 것이다.
언어는 존재를 몰고 올 수 있을까
보름달이 둥둥
굴뚝 위에 걸린 밤.
이 얼굴입니까?
내가 알지 못하는 얼굴을 깎고, 메우고
몽타주는 쉽게 완성되지 않는다.
-「굴뚝들」에서
모든 질문에 확실한 답을 내릴 수 있다는 믿음은 의문과 대답, 양자의 비밀스러운 합의 하에 이뤄지는 승부조작에 가깝다. 조작된 승부는 진정한 스포츠가 아니듯이, 이러한 믿음 또한 허황된 공약에 불과하다. 언어는 발화자의 인격을 구축하는 얼굴 노릇을 하지만, 물리적 안면과는 다르게 발화되면 발화될수록 깎여지고, 메워져 “쉽게 완성되지 않는다”. 완성된 언어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본래 의미를 어렴풋하게 가늠할 수 있는 “몽타주”일 따름이다.
심언주의 질문은 이렇듯 언어가 존재의 (실패한) 몽타주임을 무의식적으로 폭로한다. 아무리 섬세한 몽타주일지라도 그것이 원본의 얼굴과 완전히 일치할 수 없다는 사실을 시인은 잘 알고 있다. ‘일치할 수 없음’은 결국 ‘소통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심언주의 시는 언어가 이룬 몽타주의 역설, 즉 ‘소통 불가능성’의 자리에 계속해서 질문을 던짐으로써, 실패를 예상하고 몽타주를 그림으로써, 그리는(쓰는) 행위 자체가 진정한 소통이라고 역설하고 있다. “이 얼굴입니까?”하고 묻는 질문에 “이목구비가 얼며 녹으며”를 반복할 때까지 확신을 유예시키며 머뭇거리는 일 자체가 존재를 몰고 올 수 있는 언어의 노력, 즉 시(詩)인 것이다.
존재는 세계를 불러낼 수 있을까
나는 엘리베이터 안내원이 된다. 당신이 건네는 지폐처럼 펼쳐지고 접힌다. 무늬가 흐려질 때까지 허리를 굽히고 펴면서 한 무더기 당신을 내려놓는다. 지정된 장소마다 당신을 흘린다. 나는 우거진다.
-「내년에」에서
여기 일치하지 않는 몽타주를 두고 소통 불가능한 대치를 벌이는 존재와 언어가 있다. 그리고 끝없는 질문을 던지며 이 둘을 한사코 이어 보려 애쓰는 시인이 있다. 이 시인의 목적은 무엇일까. 심언주의 시는 질문 자체가 목적이 되어 공회전하는 엔진처럼 보인다. 질문이 만든 공회전의 에너지는 질문의 조용한 소용돌이 속에서 존재와 언어의 ‘소통 불가능성’을 ‘분리 불가능성’으로 변화시킨다.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 「보시스의 풍경」처럼 각각의 요소를 떼어 낸 자리에 새로운 얼굴이 생기는 것이다. 그것을 본래의 얼굴이 아니라고 할 수 있겠는가? 본래의 얼굴이 있기는 한가?
시집이 던지는 숱한 질문들은 앞 문단의 질문들을 무화시키며 언어-존재, 존재-언어를 질문의 주체로 격상시킨다. 우리는 이렇게 심언주의 시를 통과하고서야 제대로 된 의문문을 준비할 수 있게 되었다. 의문과 대답이 벌이는 게임의 틀에서 벗어나, 의문에서 의문으로 이어지는 심언주의 이질적 화법은 오직 질문만이 인간의 열린 존재 방식임을 드러낸다. 언어-존재와의 문답 후에야 우리는 세계를 향해 다시 질문을 던질 수 있을 것이고, 그 출발은 시집 『비는 염소를 몰고 올 수 있을까』의 마지막 페이지에서 비롯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