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을 대표하는 건축가들과 함께 떠나는 도시 건축 순례기
“관철동 삼일빌딩부터 동대문디자인플라자까지
도시의 기억을 읽는다!”
때로는 가이드북처럼 때로는 역사서처럼 건축물과 장소의 기억을 꼼꼼히 기록한 책
역사적 건축물에서 읽는 한 편의 장편소설
“당신의 삶은 제대로 지어지고 있습니까?”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 도시 건축은 어떤 의미를 지닐까? 도시에 처음 지어진 건축물은 단세포 생명체로 볼 수 있다. 이후 세포분열을 하며 생명체가 진화하듯 도시도 여러 건축물이 생겨나면서 수천 년에 걸쳐 진화를 거듭한다. 생명체에서 오래된 세포가 새로운 세포로 대체되듯 도시도 오래된 건축물을 부수고 새로운 건물을 만들어낸다. 이처럼 자생적으로 만들어지는 패턴들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과정은 도시를 살아 있는 유기체로 보기에 충분한 증거가 된다.
게다가 도시는 인간보다 수명이 길다. 인간은 길어야 100년을 살지만 도시는 수천 년을 산다. 생명체가 진화하면서 진화의 흔적을 DNA 코드로 남겨놓듯 도시는 진화의 흔적을 상하수도 시스템, 도로망, 광장, 각종 건축물에 남겨놓는다. 따라서 도시를 구성하는 건축물과 각종 기반 시설은 도시의 DNA를 구성하는 코드라 할 수 있다.
집단적 기억과 가치 체계와 문화적 기반을 전수받으며 존재해온 도시는 수천 년간 인간이 이루어낸 기술적, 사회적, 문화적, 경제적, 정치적 진화의 산물로서 오늘날에도 모습을 달리하며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다. 이런 배경 속에서 현대의 도시 건축은 기능은 물론 미학, 윤리, 환경과의 조화 등 또 다른 변화 요구 앞에 서 있다. 특히 본질적인 질문들이 늘고 있는 시기다. 유기체적 특성을 가진 도시의 건축물이 한 편의 장편소설과 같은 스토리를 갖게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도시와 도시인의 삶을 기록하는
건축물에 대한 인문학적 성찰
도시는 건축 박물관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600년이 넘은 도시인 서울은 인간이 100년을 살다가 다시 태어나도 여섯 번이나 살았을 엄청난 역사를 가진 곳이다. 그처럼 긴 시간 동안 현재의 우리 삶에 영향을 미쳐왔던 흔적들이 여기저기 남아 있다. 이 책은 서울을 비롯해 주변 도시에서 그 흔적들을 찾아 나선다. 길게는 수십 년 짧게는 수년 전에 지어진 건축물의 역사와 스토리를 소개하며, 때로는 가이드북처럼 때로는 역사서처럼 건축물과 장소의 기억들을 꼼꼼히 기록해 보여준다. 이 같은 흔적들을 읽으며 우리는 우리 삶의 안부를 다시 한 번 묻게 된다.
도시 건축물에는 시대의 가치관이 들어 있다. 역사의 아픔을 담은 폐쇄적 공간에서 시민을 위한 열린 마당으로 변신한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필로티 구조로 비어 있는 1층 공간을 통로 삼아 대학로 안과 밖을 드나들게 만드는 공공영역으로 자리한 샘터 사옥. 버려진 물탱크로 흘려드는 한 줄기 햇빛에서 영감을 얻어 시의 공간으로 빚어낸 윤동주문학관…. 이 책은 한국 최초의 현대적 빌딩인 관철동 삼일빌딩에서부터 역사적 논란이 끊이지 않는 동대문디자인플라자까지, 근대 이후 한국 건축 역사의 한 획을 그은 건축물들을 두루 살피며 그 안에 담긴 거대한 세계를 경험할 기회를 제공한다. 이와 함께 건축물과 건축가의 연관성에 대해서도 다각도로 평가할 것을 요구함으로써, 현재를 살아가는 건축가가 지녀야 할 가치관과 인성적 자질에 대해 고민하게 한다. 결국 건축은 인간과 사회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하게 하는 학문인 철학에 가까움을 강조하는 것이다.
한국을 대표하는 건축가들의 작품 소개와 현장 인터뷰
그들이 말하는 건축의 힘!
내로라하는 건축가들이 설계한 건축물은 뭐가 다를까? 분명한 것은 기술의 역할은 점점 미미해져 간다는 사실이다. 건축 관련자들에게는 필수 순례 코스가 될 한국건축문화대상 수상작 탐방기와 설계자 현장 인터뷰를 보며 독자들은 이런 사실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이 책에는 한국 현대 건축의 1세대 건축가로 불리며 150여 개에 달하는 작품을 남겼지만 대중의 기억에서 사라져버린 고(故) 나상진의 작품도 소개된다. 40여 년간 서울어린이대공원 ‘교양관’이라는 이름으로 사용됐던 그의 작품 서울컨트리클럽하우스가 어떻게 리모델링되어 다시 그의 시간을 엿볼 수 있게 됐는지 숨은 스토리를 들려준다. 1세대 건축가를 대표하는 고(故) 김수근과 김중업의 작품들은 너무 유명해 빼놓을 수 없다. 2세대 대표 거장인 고(故) 김석철이 지은 한샘 시화공장은 준공된 지 20여 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국내외 건축가들로부터 미적 가치와 공간 효율성, 친환경 휴머니티를 동시에 충족시킨 건축물로 인정받는 비결을 들려준다.
3, 4세대 건축가들의 야심작들도 소개된다. 이들의 인터뷰를 읽다 보면 해당 건축물의 기능적, 미학적 요소가 특별한 환경 속에서 어떻게 활용되고 조화를 이루는지 문화적 맥락까지 이해할 수 있다. 파주 화인링크를 설계한 건축가 김수영은 서로 다른 조건의 사물들이 조화롭게 기능할 수 있도록 각 사물들을 포용하고 연결하는 동시에 빛과 공간을 다루는 일이 건축이라 말한다. 청평 게스트하우스 리븐델을 설계한 건축가 곽희수는 한국에는 한국인에게 맞는 리트리트(retreat) 공간, 즉 일상에서 벗어나 휴식을 취하는 펜션 같은 공간이 부족하다며 ‘한국적 리트리트’에서 앞으로 나아갈 방향성을 찾는다.
어느 시대든 집을 짓는 사람들은 있었는데, 그때마다 더 나은 삶의 공간에 대해 고민한 이들이 새로운 건축의 길을 열었을 것이다. 나상진부터 곽희수까지 한국을 대표하는 건축가들의 인터뷰를 통해 독자들은 다양한 삶의 방식만큼 그들이 생각하는 좋은 건축의 기준도 다양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다만 인간에 대한 깊은 관찰과 고민이 좋은 건축을 만들어낸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어 보인다. 이 책을 통해 한국을 대표하는 건축가들의 상상력과 통찰력의 힘이 건축을 통해 어떻게 발휘되고 있는지 확인해보는 일은 매우 의미 있는 경험이 될 것이다.
건축은 소통이다!
도시가 잃어버린 것들을 찾아서
현대 도시는 골목을 잃어버렸다. 골목은 마을 사람들이 문을 열고 나와 누구와도 소통할 수 있는 아름다운 공간이었다. 도시가 골목을 잃어버리자 집집마다 문을 닫아걸었고 이웃에 대한 관심도 끊어버렸다. 아파트와 광활한 도로 위의 자동차와 밤이 되어도 꺼지지 않는 불빛만이 가득했다. 벌집 같은 건물들에서는 말을 잃어버린, 핏기 없는 얼굴들이 하루 종일 바쁘게 움직였다. 오늘날 도시의 건축은 여전히 산업화 시대의 패러다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면이 있다. 자본주의 논리가 비재하는 건축시장이 여전히 굳건하기 때문이다.
다행스러운 것은, 따뜻한 공동체와 소통을 추구하는 건축가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공동체를 꿈꾸는 마이바움 역삼은 최근 지역 변화는 물론 주택시장 패러다임의 변화를 이끄는 도시형 생활주택의 대표 브랜드다. 마이바움 역삼과 기존 소형 주택의 가장 큰 차이는 ‘탱고하우스’라는 개념에서 온다. 탱고하우스는 수요자들과 건축주들의 요구를 동시에 반영해 마치 1 대 1로 탱고 춤을 추듯 공간 설계를 한 주택을 의미한다. 개개인의 특성과 취향이 모두 다르듯 이 주택에도 만인을 위한 만 가지의 공간 구성을 계획한 것이다. 이를 통해 아름다운 외관과 잘 설계된 공간이 골목 안으로 전해져 마을을 이루고 그 접점들이 도시 전체의 주거 패러다임을 변화시켜나가고 있다.
오랜 세월 충남 서천군의 중심을 지키고 있던 재래시장 자리에 조성된 ‘봄의 마을’도 건축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농·어업이 경제 활동의 주를 이루며 성장 동력이 부족했던 이 지역은 산업화를 위한 시설이 우선이라는 의견도 많았지만 주민들과 문화·예술이 빈 공간을 채우면서 오히려 돈으로 셀 수 없는 무형의 가치가 창출되고 있다. 이제 ‘봄의 마을’은 마을 공동체뿐 아니라 지역사회도 변화시키고 있다. 문화와 교육의 꿈을 심어주는 공간으로 거듭나고 있는 것이다.
이제라도 우리가 잃어버린 공간을 찾는 노력은 소중하고 의미가 있다. 사방이 벽 같은 도시 건축물은 이제 사라져야 한다. 이런 건축물이 강제하는 규율은 우리 삶마저 바꿔놓고 있다. 한국근대문학관과 인천아트플랫폼 등 인천 개항장 지역의 도시 재생 사업에 대한 정책 제안을 내놓은 건축가 황순우는, ‘도시는 우리 몸과 같은 유기체’라며 좋은 의사라면 환자가 재활 의지를 갖고 스스로 노력하면서 고통을 이겨내도록 이끌어야 한다고 말한다.
살아 있는 건축물을 만나는 책!
다양한 건축 언어로 정형화된 이미지를 깨부순 사람들
지금이 건축의 춘추전국시대라 말하는 건축가들이 많다. 일반인들이 건축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이들의 다양한 욕구에 맞춘 건축가들의 어휘와 영역이 확장됐기 때문이다. 어떤 이유로든 획일화된 이미지를 깨부수는 건축가들이 늘고 있다는 것은 반가운 소식이다. 그동안 볼품없는 빌딩숲에 가려져 있던 도시 건축은 새로운 패러다임을 요구하고 있다.
이 책은 서울을 비롯해 주변 도시에서 특별한 기억이 남아 있는 건축물을 탐방한 기록물이다. 독자들은 역사적 배경을 가진 건축물과 공동체를 지향하는 건축물 그리고 새로운 형태의 전위적인 건축물 모두에서 다양한 의미들을 읽고 느낄 것이다. 여기에는 사회적 맥락과 관계된 거대 담론도 있고 작고 소박한 이야기들도 있다. 변화를 향한 이들의 열정이 없었다면 도시는 여전히 인간을 고려하지 않는 건축물들로 채워졌을 것이다.
도시적인 공공공간을 배려하고 살피는 건축물들이 많아질수록 우리 일상도 분명 변화할 것이다. 이 책을 통해 독자들은 한국 건축의 과거와 현재의 성과는 물론 미래를 향한 노력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짐작케 될 것이다. 그리고 어느 날 다시 골목이 생겨나 사람들이 문을 열고 서로를 다정하게 간섭하는 날들이 오게 되기를 기대할지도 모른다.
본문 맛보기
도시의 건축물은 도시와 도시인의 삶의 흔적을 기록하는 기억 저장소이자 시간을 담는 그릇이다. 중국의 채륜이 발명한 종이가 서쪽으로 전파되기 전에 수메르문명에서는 점토판에 쐐기문자를 찍어 남겼고, 이집트에서는 파피루스 식물 줄기로 만든 파피루스 종이에 글을 남겼다. 점토판은 깨지기 쉽고 파피루스는 부서진다는 문제가 있었다. 돌에 새기는 방식은 반영구적이었지만 운반이 너무 어려워 편지 같은 글은 양피지에 써서 전달했다. 그러나 양피지의 가격이 만만치 않았다. 양가죽을 벗겨 여러 번 문질러서 얇게 만든 양피지는 가격이 비싸, 부자들도 양피지 편지를 받으면 글을 읽고 글자를 지운 뒤 재활용했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새로 쓴 글자 아래 처음에 썼던 글자가 배어나오기도 했다. 이를 ‘팰림시스트’(원래의 글 일부 또는 전체를 지우고 다시 쓴 고대 문서)라고 하는데, 과거의 흔적이 현재의 도시 공간에 미친 영향을 설명할 때도 이 단어가 사용된다. 예를 들어 서울 강북에 구불구불한 길이 많은 것은 과거에 구불구불 흐르던 시냇물을 복개해서 길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구불구불한 시냇물이 구불구불한 도로로 남아 현재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로마의 대표적 광장인 나보나 광장은 동그랗거나 사각형인 대부분의 광장과 달리 가로로 긴 형태다. 나보나 광장이 이런 형태를 갖게 된 이유는 2000년 전 고대 로마시대 때 전차 경기장으로 사용되던 곳이었기 때문이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부지는 조선시대 왕실 관련 사무를 담당하던 종친부와 국군기무사령부(기무사)가 있던 곳이다. 특히 한국의 근현대사가 고스란히 녹아 있는 상징적인 공간이기도 하다. 현재 미술관의 사무동으로 쓰이는 붉은 벽돌의 기무사 건물은 일제 강점기인 1930년대에 근대식 병원으로 처음 세워졌다가 광복 후 육군통합병원을 거쳐 1971년부터는 국군보안사령부(이후 기무사로 개칭)가 사용했다. 1979년 10·26 사태 때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시신이 처음 안치된 곳이기도 하며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이 12·12 쿠데타를 모의한 역사적인 장소이기도 하다. 또 종친부가 있는 터는 조선시대의 규장각·사간원 등의 관청이 자리했던 곳이다. 종친부는 신군부 집권 당시 테니스장 건립을 이유로 인근 정독도서관으로 옮겨졌다가 미술관이 조성되면서 다시 제자리로 되돌아오는 우여곡절을 겪기도 했다. 이처럼 서울관 부지는 조선시대의 왕실 관청과 일제 강점기의 군 병원, 군사정권 시절의 기무사 등 권위적인 공간으로 사용되며 일반인의 출입이 전혀 허용되지 않았던 도심 속 외딴섬 같은 곳이었다.
윤동주문학관의 원래 모습은 낡은 수도가압장이었다. 가압장은 높은 지대로 올라오면서 점차 약해지는 물살에 압력을 가해 다시 흐르도록 만들어주는 역할을 하는 곳이다. 낡고 작은 수도가압장을 윤동주문학관으로 다시 태어나게 한 인물은 이소진 아뜰리에리옹 서울 대표다. 설계 의뢰를 받고 고민하던 이소진 대표는 수도가압장이 자리 잡은 장소에 반해 프로젝트를 맡기로 결정했다. 이후 벌어진 우연의 연속으로 인해 윤동주문학관은 이소진 대표에게도 특별한 건축물로 기억되고 있다. 처음 구상했던 설계는 건물 옥상을 활용한 큰 정원을 만드는 것이었다. 좁은 실내 공간의 한계를 벗어나기 위해 고심한 방법이었다. 하지만 2011년 7월 집중 호우로 우면산 산사태가 발생한 이후, 윤동주문학관의 안전진단을 진행하던 중 감춰져 있던 두 개의 물탱크를 발견하게 된다. ‘바닥면적 55제곱미터, 높이 5.9미터’의 물탱크를 발견한 순간 이소진 대표는 작은 구멍을 통해 (물탱크 안으로) 빛이 들어오는 모습이 시적으로 느껴졌다고 회상한다. 주저 없이 물탱크 공간을 활용한 설계로 바꿨고 작업은 처음부터 다시 이뤄졌다. 이로써 물탱크 한 곳은 지붕을 걷어내고 ‘열린 우물’로, 다른 한 곳은 공간을 그대로 유지한 채 ‘닫힌 우물’로 재탄생했다. 열린 우물에서 하늘을 올려다봤을 때 빼꼼히 보이는 팥배나무도 우연이 남겨준 선물이었다. 공사 과정에서 뿌리가 절반 이상 외부로 드러났지만 끈질긴 생명력과 공사 진행팀의 노력으로 살아남았다. 살아난 나무는 열린 우물 안쪽으로 가지를 드리웠다.
흥국생명빌딩과 열린 갤러리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해머링맨’, 즉 망치질하는 사람이다. 해머링맨은 높이가 22미터로, 지금까지 발견된 공룡 중에서 가장 키가 큰 것으로 알려진 사우로포세이돈(16∼17미터)보다 크며, 무게도 50톤에 달해 세종로 사거리에서도 한눈에 들어온다. 해머링맨은 지난 2002년 6월 4일부터 망치질을 시작했으며, 오전 8시부터 오후 7시까지 1분에 한 번씩, 하루 660회 쉬지 않고 망치질을 한다. 과거에는 노동절인 5월 1일이 되면 망치질을 쉬었으나 최근에는 토요일과 일요일 그리고 공휴일에도 망치질을 하지 않는다. 2002년부터 지금까지 한 망치질을 계산하면 약 340만 번에 달한다. 이에 2015년 6월부터 8월까지 약 두 달간은 노동에 지친 해머링맨에게 12년 만에 처음으로 휴식을 주고 노후 부품 교체와 도색 작업을 했다. 해머링맨을 만든 미국 작가 조너선 브롭스키는 1976년 튀니지 구두 수선공이 열심히 망치질을 하는 사진을 보고 노동자의 심장소리를 듣는 듯했다고 말했다. 그는 이 사진에서 영감을 얻어 ‘노동의 숭고한 가치’를 표현한 해머링맨을 제작했고 1979년 미국 뉴욕에서 3.4미터 높이의 해머링맨을 처음 소개했다. 이후 독일 프랑크푸르트(21미터), 노르웨이 릴레스트롬(12미터), 스위스 바젤(13.4미터) 등 유럽 지역 세곳과 미국 시애틀(14.6미터), 캘리포니아(10미터), 댈러스(7.3미터) 등 미국 도시 7곳을 포함해 전 세계 11곳에 해머링맨을 설치했다. 아시아에서는광화문에 설치된 해머링맨이 유일하며 전 세계에서 가장 키가 크다.
잘 알려졌듯 서울월드컵경기장은 전통적인 방패연을 형상화한 건축물이다. 경기장을 위에서 내려다보면 커다란 사각 방패연 모습이다. 이는 승리를 향한 희망과 한국의 이미지와 문화 그리고 통일과 인류 평화에 대한 희망의 이미지를 표현한 것이다. 실제로 월드컵 개막식에서는 플라스틱 연에 풍선을 달아 하늘로 날려 보내는 퍼포먼스도 보여줬다. 하지만 애초의 설계는 이와 달랐다. 어렵게 설계 용역을 따낸 류춘수 이공건축 회장이 한 달여 동안 가다듬은 형태는 잠실 종합경기장 또는 여타 축구경기장과 같은 원형이었다. 세부 도면작업을 넘기고 프랑스 월드컵경기장을 보러 가던 비행기에서 그는 무심코 잡지를 폈다가 무릎을 쳤다. 첫 페이지를 가득 차지한 방패연 사진을 본 것이다. 케이블과 직물로 공간을 구성한 건축이 트레이드마크인 그에게 방패연은 그야말로 딱 들어맞는 이미지였다. 앉은자리에서 그는 바로 스케치를 했고, 파리에 도착하자마자 본사로 팩스를 넣었다.
황순우 대표는 도시 재생을 설명할 때 ‘10 + 10’ 개념을 강조한다. ‘10년 정도에 걸쳐 새로운 도시를 만들고, 이후 도시가 운영되고 정착하는 데 추가로 10년 정도 걸린다는 것’이 이 개념의 핵심이다. 60∼70년에 걸쳐 노후화하고 슬럼화된 도시를 재생하려면 이 정도의 긴 시간이 필요하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도시 재생 현주소는 이와 다르다. 그는 “도시 재생과 관련해 정부는 선도사업을 정하고 사업 목표에 따라 3∼5년의 짧은 기간에 성과를 내려다보니 성급하게 건물을 헐고 새 건물을 지으면서 많은 오류와 부작용을 낳고 있다”고 말한다. 이 과정에서 기존 도시의 공동체와 문화·생태계에 대한 고민 없이 땅값을 올리고 관광상품을 만들려는 보여주기식 작업만 난무한다는 지적이다. 황순우 대표는 도시 재생을 위한 자금은 오랜 기간 조금씩 투입되는 게 바람직하다고 말한다. 단기간에 막대한 자금이 투입되면 지역 공동체가 분열되고 사업이 망하는 경우가 많아 도시 재생 관련 기금을 만들거나 특별 회계를 통해 자금을 지속적으로 집행하는 게 중요하다는 설명이다. 주민들의 자발적 참여 역시 성공적인 도시 재생을 위한 필수 요소라고 강조한다.
르네상스호텔은 건축가 고 김수근의 유작이다. 1988년에 완공된 이 호텔은 김수근이 세상을 떠나기 1년 전인 1985년 병상에서 스케치한 마지막 작품 중 하나다. 비슷한 시기에 설계한 서울역 인근의 벽산빌딩(현 게이트웨이타워)도 르네상스호텔처럼 곡선 형태의 모서리가 특징이다. 이런 특징은 당시 김수근의 작품 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작은 단서가 된다. 그의 제자인 승효상 이로재 대표는, 르네상스호텔은 단순히 하나의 건축물로 볼 것이 아니라 그 건축물이 가지고 있는 전체적인 ‘질서’를 봐야 한다고 강조한다. 승효상 대표가 말하는 질서는 바로 맥락이다. 좁은 의미에서는 르네상스호텔이라는 건축물이 갖고 있는 맥락이고, 넓은 의미에서는 도시라는 공간에서 설계자가 구현하고자 했던 맥락이다. 승효상 대표는, 설계 측면에서 볼 때 르네상스호텔의 가장 큰 특징은 코어를 중심으로 두 개의 ‘켜’로 보이도록 설계한 점이며, 저층부까지 합치면 세 개의 ‘켜’로 이뤄져 있는데 이것이 주변의 다른 건물로 이어지며 또 하나의 켜가 생긴다고 설명했다. 김수근의 제자들은 이렇게 스승의 철학을 이어가고자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