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문화가 제시할 수 있는 최고의 경지를 보여 준 세계문학의 대표자
20세기 초의 가장 위대한 작가, 토마스 만의 걸작 단편들
토마스 만은 독일 문학사상 전환점에 위치한 20세기의 위대한 소설가이자 비평가이다. 그가 작품 활동에 나선 1890년대는 독일에서 낭만주의와 피히테의 철학, 프랑스 혁명의 열정이 그 위력을 상실하고 과학 문명이 급속도록 발전하면서 소위 현대가 시작하는 시점이었다. 만은 독일 문화 전통의 막바지에 선 인물로서, 시와 희곡 중심의 독일 문학적 풍토에서 빈약한 독일 산문문학의 유산을 이어받았지만, 그것을 가꾸고 다듬어 독일 소설을 일약 세계적인 수준으로까지 끌어올린 작가이며, 그를 통해 독일 문학은 집대성되고 반성된다. 또한 제2차 세계대전과 나치를 거치는 독일 문화의 가장 어두운 시기에 진정한 독일적인 가치와 문학이 세계인의 가슴에 남을 수 있도록 기여했다. 1929년 『부덴브로크가의 사람들』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그는 카프카, 헤세와 더불어 독일 현대문학의 3대 거장으로 여겨지는데, 평론가 헬무트 코프만은 “세계문학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토마스 만의 작품들이다”라고 찬사를 보내기도 했다.
사상적인 깊이, 높은 식견, 연마된 언어 표현, 짜임새 있는 구성 등을 보여 주는 만의 단편들은 서구 부르주아지 문화의 본질을 향해 시종 의문의 시선을 던진다. 그리고 이 서유럽 문화의 불안정성과 붕괴의 위협에 대한 끊임없는 의식은 그 문화의 정신적 업적에 대한 인정과 세심한 관심으로 균형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중심 주제는 현실과 사고와의 관계, 사회와 예술가와의 관계, 현실과 시대의 복잡성, 정신성의 유혹, 에로스, 죽음 등 그와 관련되는 일련의 문제들을 둘러싸고 계속 다른 형식으로 반복된다.
이 단편선에 수록된 토마스 만의 초기작에 해당하는 열두 편의 작품은 철학자 쇼펜하우어와 니체, 작곡가 바그너의 영향을 받은 깊이 있는 것들로, 역시 가장 주요하게 다루고 있는 주제는 예술성과 시민성의 대립이다. 이 대립은 토마스 만의 태생적 뿌리에서부터 극명하게 드러나는데, 뤼베크 시 재무 담당 장관이었던 아버지는 독일 시민계급의 전통적 도덕률을 엄격히 따르는 전형적인 북부 독일인이었지만, 라틴계의 피가 흐르는 어머니는 도덕이나 세상사에는 관심이 없고 음악을 좋아하는 예술가적 기질의 소유자였다. 그는 소위 니체가 말하는 “아폴로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모순”을 유전적으로 물려받은 사람이었다.
만의 가장 훌륭한 단편으로 평가받는 「토니오 크뢰거」의 토니오 또한 그러한 인물이다. 시민성과 예술성을 동시에 내포한 토니오 크뢰거는 끊임없이 보통 사람들의 건강한 세계를 동경한다. 그들은 단정하고 성실하고 명랑하고 도덕적이며, 주어진 것을 의심 없이 받아들이고 하찮은 것에도 즐거워하고 남들과 어울리는 법을 안다. 아무리 애를 써도 그렇게 살 수 없는 토니오로서는 그들이 부러울 따름이다. 일반인들은 그를 이질적인 존재로 본다. 그가 자기들과는 다른 세계에 살면서 자신들의 속내를 꿰뚫어 보고 자신들을 경멸하고 있을 것 같은 느낌에 선뜻 그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리고 토니오는 늘 일반인들의 세계를 동경해 왔으면서도 정작 그들과 함께 있으면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 못하고 불편해한다. 일반인들의 편협함과 고루함, 속물근성이 속속들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토니오가 예술 세계로 쉽게 받아들여진 것도 아니다. 오직 미美를 최고의 가치로 여기고 숭배하는 예술가들은 시민적 양심을 가진 그를 감동도 도취도 없는 인간이라 여긴다. 미의 숭배자들은 현실적 인간들을 경멸하고 깔본다. 그러나 토니오는 ‘예술적인 것, 비범한 것, 천재적인 것 속에도 모호하고 수상쩍고 의심스러운 것이 담겨’ 있음을 깨닫는다. 이런 날카로운 지성의 눈을 가진 사람을 미적 허영에 빠진 이들이 고이 받아들일 리 만무하다. 어느 세계도 토니오를 받아들이지 않으며, 시민 세계는 그를 ‘체포하려’ 들고, 예술가들은 그를 ‘길을 잘못 든 시민’이라 부르며 경원시한다. 그가 안주할 곳은 없다.
그러나 이내 예술 세계가 반드시 일상과 동떨어진 천재적이고 비범한 것에 국한된 게 아니라 다른 길로도 나아갈 수 있음을 깨닫는다. “작가를 정말 작가답게 만들어 주는 것은 인간적인 것, 살아 있는 것, 평범한 것에 대한 시민적 사랑”이고, “일상의 환희에 대한 동경보다 더 감미롭고 가슴에 와 닿는 것이 없다”고 토니오는 말한다. 이처럼 삶에서 배제된 채 평범한 삶을 동경하고 꿈꾸는 이는 비단 예술가만이 아니다. 「키 작은 프리데만 씨」의 난쟁이 프리데만, 「굶주리는 자들」의 구걸하는 거지, 「루이센」에서 제 몸 하나 가누기 힘들 만큼 뚱뚱한 야코비 변호사도 마찬가지이다. 그 밖에 현실의 삶 앞에 허무하게 무너진 예술가의 허영심을 다룬 「어릿광대」, 디오니소스적 예술에 힘없이 무릎 꿇고 만 아폴론적 예술을 다룬 「베네치아에서의 죽음」, 현실과 언어의 채울 수 없는 간극을 그린 「환멸」, 의지와 삶의 문제를 다룬 「행복에의 의지」 등의 단편은 그 각각이 걸작이란 무엇인지를 유감없이 보여 준다.
-본문에서-
왜 나는 이런 별종으로 생겨 먹어서 늘 모든 것과 부딪치고, 선생님들과 사이가 안 좋고, 다른 친구들과 있으면 어색한 것일까? 친구들을 봐! 얼마나 선하고 평범해? 걔들은 선생님을 우습게 여기지도 않고, 시를 쓰지도 않고, 누구나 똑같이 생각하는 것만 생각하고, 누구나 큰 소리로 말할 수 있는 것만 생각해! 모두들 자신이 지극히 정상이고, 세상 모든 것들과 일치한다고 느껴! 아, 그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왜 이 모양일까? 앞으로 어떻게 되려고 이럴까?
- 「토니오 크뢰거」중
내가 너희를 잊었을까? 토니오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아냐.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어! 한스 너도, 금발의 잉게 너도! 내가 글을 쓴 것도 너희 때문이야. 나는 박수갈채를 받을 때면 혹시 너희가 그 자리에 없는지 몰래 주위를 살피곤 했어. 한스, 예전에 너희 집 정원 문에서 약속했던 것처럼 『돈 카를로스』를 읽었어? 읽지 마! 너한테 더는 그런 요구를 하지 않겠어. 외로워 눈물을 흘리는 왕이 너하고 무슨 관계가 있겠어? 너는 시와 멜랑콜리 같은 것으로 눈을 흐리고, 바보 같은 꿈에 젖을 필요가 없어…… 아, 너처럼 되고 싶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서 너처럼 자라고 싶어. 너처럼 성실하고 쾌활하고 소박하고 올바르고, 질서에 잘 따르고, 신이나 세상과도 아무 갈등이 없고, 천진하고 행복한 사람들로부터 사랑받고 싶어! 잉게 너를 아내로 맞아 한스 너 같은 아들을 낳고 싶어. 인식의 저주와 창작의 고통에서 벗어나 지극히 평범한 행복을 누리며 사랑하고 찬양하고 싶어……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설령 그게 가능하다고 해도 아무 소용이 없을 거야. 어차피 똑같이 될 테니까. 지금까지 그랬던 대로 똑같이 반복될 뿐이야! 세상에는 올바른 하나의 길을 아예 가지지 못한 사람들이 있는데, 그런 이들은 필연적으로 잘못된 길로 빠져들 수밖에 없어!
- 「토니오 크뢰거」중
“명심하라, 파이드로스여. 아름다움만이 사랑스러운 동시에 눈에 보이는 것이다. 그러니까 미는 감각적인 것의 길이고, 예술가를 정신으로 이끄는 길이다. 얘야, 너는 감각을 통해 정신의 길로 들어가려는 사람이 언젠가 진정한 남자의 품위와 지혜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면 판단은 너에게 맡기겠다만, 그게 오히려 정말 위험하고 불쾌한 길이자, 필연적으로 오류에 빠질 수밖에 없는 그릇된 죄악의 길이라 생각하느냐? 너도 이제 알아야 한다. 에로스가 길동무가 되고 길을 인도해 주지 않으면 우리 작가들은 결코 미의 길을 걸을 수 없다는 것을. 그래, 우리도 나름의 방식으로 건실한 전사와 영웅이 될 수 있지만, 우린 본질적으로 여자와 같다. 우리에게는 정염이 영혼의 행복이고, 사랑이 영혼의 그리움이기 때문이지. 이게 바로 우리의 기쁨이고 수치다. 이제 알겠느냐? 우리 작가들은 지혜로울 수도, 품위 있을 수도 없다는 것을? 우리 작가들은 어쩔 수 없이 사도에 빠지고, 방탕과 감정의 일탈로 흘러들 수밖에 없다는 것을? 우리들이 쓰는 대가다운 문체는 모두 거짓이고 허튼짓이고, 우리가 누리는 명성과 존경은 한마디로 소극이고, 우리에 대한 대중의 믿음은 지극히 같잖은 짓이고, 예술로 대중과 아이들을 교육하겠다는 것은 해서는 안 될 무모한 시도다. 태어날 때부터 개선될 수 없는 타락의 성향을 타고난 사람이 어떻게 교육자로 적합하겠느냐? 물론 우리도 그런 타락의 나락을 거부하고 품위를 지키고 싶지만, 아무리 방향을 돌리려 해도 그 나락이 우리를 끌어당긴다. 우리는 분석적인 인식을 거부한다. 왜냐하면 파이드로스여, 인식에는 품위도 엄정함도 없기 때문이다. 인식은 신조도 형식도 없이 그저 알고 이해하고 용서하는 것이고, 타락의 나락에 호의적이다. 아니, 나락 그 자체다. 따라서 우리는 단호하게 인식을 배격한다. 대신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오로지 미뿐이다. 달리 말해서 그것은 단순함과 위대함, 새로운 엄격함, 또 거기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움과 형식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파이드로스여, 형식과 자유로움은 도취와 탐욕으로 이끌고, 타락의 나락으로 인도하고, 고결한 자까지 끔찍한 감정의 죄악으로 이끈다. 엄정한 아름다움이 극악한 것으로 여기고 배척하는 그런 감정의 죄악으로 말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 작가들이다. 우리는 고상하게 위로 올라갈 능력이 없고, 단지 일탈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나는 간다, 파이드로스여. 너는 여기 남아라. 내 모습이 더는 보이지 않거들랑 그때 너도 떠나거라.”
- 「베네치아에서의 죽음」중
내가 남들처럼 사회적으로 보탬이 되는 일을 하지 않고 남들과 연을 맺지 않는 삶을 설계한 것은 어쩌면 그런 외적 행복을 현실적으로 포기했음을 의미할지 모른다. 물론 어떤 순간에도 내 삶에 불만을 토로한 적은 없다. 내 삶에 대한 만족감은 흔들려서는 안 되고 의심받아서도 안 된다. 반복건대, 아니 필사적인 심정으로 강조컨대, 나는 행복해지고자 하고 행복해져야 하기 때문이다. 행복을 업적과 천재성, 고귀함, 사랑스러움으로 여기고, 불행을 추악한 것, 빛을 두려워하는 것, 경멸적인 것, 한마디로 하찮은 것으로 여기는 관념은 내 속에 너무 뿌리 깊이 박혀 있어서, 만약 내가 불행하다면 나는 결코 나 자신을 존중할 수 없을 것이다.
- 「어릿광대」중
인간은 모두 자기 자신에 대한 문제에만 지나치게 집착하기에 남에 대해서는 진지한 의견을 갖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다. 사람들은 크게 내켜하지 않으면서도, 너 스스로 존중하는 만큼 너를 존중한다. 네가 원하는 대로 살아라. 뻔뻔할 정도로 확신을 보여 주고, 양심의 가책 같은 건 버려라. 너를 경멸할 만큼 도덕적인 사람은 없다. 네가 너 자신과 하나 되지 못하고 스스로에 대한 애정과 만족감을 잃으면 그리고 스스로를 경멸하는 모습을 보이면 남들도 당연히 너를 그렇게 대할 것이다. 나는 그 점에서 실패했다.
나는 이제 펜을 던지고 글쓰기를 끝낸다. 역겹고 구역질 난다. 삶에 종지부를 찍는다는 것은 어릿광대에겐 너무나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 아닐까? 두렵다. 내가 이대로 살아가고, 먹고, 자고, 아무 일이나 조금 하고, 그러면서 내가 불행하고 한심한 인간이라는 것에 시나브로 둔감하게 익숙해질지도 모른다는 것이.
빌어먹을, 누가 생각이나 했을까? 어릿광대로 태어난다는 것이 이런 액운과 불행일지 말이다.
- 「어릿광대」중
-시리즈 소개-
세계문학을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 <세계문학 단편선>
문학 출판의 명가 현대문학이 새로운 시리즈 <세계문학 단편선>을 펴낸다. 이번에 시리즈의 첫 번째 분으로 나온 책은 어니스트 헤밍웨이, 윌리엄 포크너, 토마스 만, 데이먼 러니언, 대실 해밋의 단편선집이다. 세계문학을 바라보는 장편소설 위주의 관습에서 벗어나 단편소설에 포커스를 맞춘 이 시리즈는 그동안 단편이라는 이유만으로 우리에게 제대로 소개되지 않았던 거장들의 주옥같은 작품들과 단편소설이라는 장르의 형성과 발전에 불가결한 대표 단편 작가들을 소개할 것이다. 아울러 지구촌 시대에 걸맞게 여태까지 우리에게는 문학의 변방으로 여겨져 왔던 나라들의 대표적 단편 작가들도 활발히 소개해 단편소설의 발전이 문화의 중심지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도처에서 이루어져 왔음을 독자들이 확인할 수 있게 할 것이다. 현대 대중문화의 성장은 전 세계적으로 미스터리, 호러, SF 등 문학 장르의 분화를 촉진했는데 이러한 장르문학의 형성에도 단편소설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러한 장르문학의 형성과 발전에 크게 기여한 작가들의 단편 역시 새롭게 조명할 것이다.
21세기인 현재에 이르기까지 단편소설은 그리스 신화가 그러했듯이 삶의 불변하는 단면을 촌철살인의 관찰력과 응축된 예술적 형식으로 꾸준히 생산해 왔다. 작가들이 저마다의 개성으로 그린 칼로 베어낸 듯 날카로운 인생의 다양한 단면들은 시공을 초월해 오늘의 우리에게도 깊은 감동을 준다. 새로운 문학적 기법과 실험의 도입을 통해 단편소설은 현재도 계속 진화, 확장되고 있다. 작가의 예술적 열정이 가장 뜨겁게 투영된 다양한 개성의 다채로운 단편들을 통해 문학이 제공할 수 있는 최고의 통찰과 재미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에드거 앨런 포는 문학작품은 독자가 앉은자리에서 다 읽을 수 있을 정도로 짧아야 한다고 말했다. 바쁜 일상의 삶을 사는 현대인들에게 <세계문학 단편선>은 중심을 잃지 않고 삶과 사회, 나아가 세계를 바라볼 수 있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친구가 될 것이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