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너온 시절을 헤아리는 일
과거가 오늘을 살리는 방식
새 정부가 들어선 지 일년이 되었다. 내란의 극심한 혼란을 단기간에 진정시킨 성과는 분명하지만, 여러 변혁의 과제가 단번에 완수될 수 없다는 사실 또한 되새겨야 할 시점이다. 전쟁을 비롯해 국내외로 혼란스러운 사태들이 여전한 이 시점에서 강조할 점은 수구기득권이 기대온 “오래된 시스템을 변혁하는 일이다”(책머리에). 낡은 체제를 뛰어넘을 동력은 다름 아닌 시민들에게서 찾을 수 있다. 빛의 혁명 과정에서 우리가 확인한 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과 보편적 존엄을 향한 민(民)의 역동적 기세였다. 본지도 이 힘을 이어받아 민주주의와 평화의 가치가 공동체 내부에 더 굳건히 자리잡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것을 다짐한다.
『창작과비평』 2026년 여름호는 이러한 변혁과 연대의 문제의식을 공유한다. 특집 ‘과거가 오늘을 묻는 방식’에서는 역사와 기억을 둘러싼 다큐멘터리‧소설‧시 작품들을 살피며, 공동체의 시간을 사유의 지평 위에 세운다. 60주년 기획 ‘찾아가는 현장’은 일년 전 산불 화마를 입은 안동의 목소리를 청취하고, ‘한국문학과 K사상의 가능성’은 황석영 소설 『할매』가 보여주는 새로운 ‘생태-역사’서사의 가능성을 깊이있게 논한다. 전쟁국가 미국의 면모를 신랄하게 밝히며 ‘변혁적 중도의 국제연대’ 가능성을 타진하는 대화도 흥미진진하다.
[특집] 과거가 오늘을 묻는 방식 ---------------------------------------------------------------------
흘러간 시간은 과거가 되지만, 흐르지 못한 채 고여 있는 시간은 무엇이 될까. 이번호 특집은 공동체의 지난 사건과 기억을 현재의 시점으로 소환하는 문학적‧서사적 작업들과 그 의의를 조명한다. 문학평론가 정주아는 두 다큐멘터리 「먼지, 사북을 묻다」와 「1980 사북」을 중심에 두고 1980년 사북항쟁을 둘러싼 복잡한 실제를 들여다보며 민주화운동의 갱신과 확장을 요청한다. 문학평론가 한영인은 공동체의 역사적 기억마저도 자기 정체성의 입증과 성공을 위한 사적 도구로 유용하게끔 몰아가는 오늘날의 현상을 ‘개인서사 시장’이라는 명명하에 살핀다. 이 시장의 위력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동시에, 박솔뫼 소설 등을 통해 개인의 경험으로만 환원불가능한 문학의 실다운 재현능력을 곱씹어본다. 시인 윤은성은 두 여성시인 허수경과 조정의 시를 매개로 삼아 한국시사(詩史) 속 생태 공동체의 빛을 포착한다. 허수경의 지난 시편들 속에서 지역성과 문명비판의 사유를 길어올려 생태위기를 감각하고, 조정의 시를 통해 생태적 가치를 돌보는 시적 실천의 소중함을 일깨운다.
[대화] 미국의 전쟁, 새로운 국제연대 ----------------------------------------------------------------
대화는 최근 국제질서를 뒤흔든 미국의 베네수엘라 침공과 이란전쟁을 계기로 ‘미국의 전쟁, 새로운 국제연대’를 주제로 진행되었다. 이남주 창작과비평 편집주간의 사회로 국내외 정치 현장과 국제질서 변화에 대해 꾸준히 목소리를 내온 문희정 이해영 정현곤이 참여하여 미국 대외정책의 실체를 날카롭게 짚어내고, 새로운 국제질서의 흐름을 다각도로 분석한다. 미국 패권의 쇠퇴와 다극화의 흐름 속에서 극우정치의 준동에 맞설 ‘변혁적 중도의 국제연대’ 가능성을 모색하는 가운데 전작권 전환과 남북연합의 진전 가능성까지 현실적으로 논의한다. 한국이 국제질서의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응하고 자주성을 증대하여 국제사회에서 ‘좋은 국가’로서 책임을 다해야 함을 강조하는 흥미진진한 대화이다.
[논단] --------------------------------------------------------------------------------------------------
논단에서는 시인 김형수가 백낙청 50년 공부의 결정체 『서양의 개벽사상가 D. H. 로런스』를 ‘근대적응과 근대극복의 이중과제’라는 렌즈를 통해 깊이있게 들여다보며 독자들을 새로운 깨달음의 세계로 이끈다. 20세기 영국 작가 로런스의 문명비판과 한반도의 개벽사상이 회통한다는 백낙청의 발견과 사유를 지금 여기의 삶을 변혁하는 ‘현하(現下)의 사상’으로 호명해 비추며, 문명대전환을 향한 우리의 주체적 실천의 길을 질문한다. 정치철학자 진태원은 한국 근현대사의 얼룩진 과거들과 지난 12‧3 친위쿠데타를 돌아보며 『반헌법행위자열전』의 출간 의의를 힘있게 전한다. ‘헌정을 파괴하는 헌정의 수호자’라는 역설이 작동해온 헌정사의 기원에 파시즘이 있음을 강조하며, 민주적 헌정의 원리를 갱신할 ‘상호증언의 연대’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현장] 60주년 연간기획 ‘찾아가는 현장’ ① ---------------------------------------------------------
현장란에서는 지난호 대화를 통해 예고된 창간 60주년 특별기획 ‘찾아가는 현장’ 연재가 막을 올린다. 첫 순서로 인류학자 백영경과 주현우가 2025년 대형 산불 피해를 입은 안동지역을 찾아 주민들과 현장활동가들의 목소리를 기록하고 지역사회의 진정한 회복의 의미를 묻는다. 산불 이후의 삶이 단순히 피해 복구나 보상금 지급만으로 설명될 수 없음을 드러내며, 마을 단위의 돌봄과 자치의 실천을 지원하는 장기적 회복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공동체의 삶을 새롭게 ‘수선’해가는 과정의 중요성에 주목해 재난 이후에도 무너지지 않고 이어지는 지역의 삶과 관계의 결을 생생하게 전한다.
[창작] 시ㆍ소설 ---------------------------------------------------------------------------------------
신예시인선 특집에서는 강우근 강지이 김유수 김진선 김혜연 남현지 박지일 신준영 여세실 임유영 장혜령 주민현 열두 시인의 신작 시편들이 우리 시대를 아름답고도 서늘하게 그려낸다. 60주년을 기념하며 한해 동안 이어질 중편 특집의 두번째 순서는 김기태의 소설이 자리한다. 금희 김소라 편혜영의 신작 단편 역시 이번 계절 독자들의 마음에 깊은 여운을 남길 것이다.
[문학평론] 60주년 연간기획 ‘한국문학과 K사상의 가능성’ -----------------------------------------
60주년 연간 연속기획 ‘한국문학과 K사상의 가능성’ 연재는 두번째 순서를 맞아 문학평론가 백지연이 황석영의 『할매』를 통해 세계문학 속 한국문학의 역할과 중요한 책임을 점검한다. 황석영의 소설이 어떻게 세계적 생태서사의 지평을 더욱 너르게 열어나가는지, 또 그 바탕에 어떠한 한국적 사유와 심성이 자리하고 있는지 생생하게 소개한다.
작가 인터뷰ㆍ문학초점 -------------------------------------------------------------------------------
작가 인터뷰에서는 문학평론가 조대한이 신작 시집 『러브 온 더 락』으로 평단과 독자의 관심을 한몸에 받고 있는 시인 고선경과 만난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청년들의 사랑과 슬픔을 반짝임으로 세공해내는 고선경의 시세계를 조명한다. 이번 계절의 주목할 신작을 소개하는 문학초점에서는 문학평론가 황사랑이 송진권 연정모 유병록의 신작 시집을, 문학평론가 민가경이 손원평 백온유의 신작 소설집을 선정해 각각의 결을 세심히 펼쳐보며 그 의미를 짚어준다.
산문ㆍ촌평ㆍ독자의 목소리 --------------------------------------------------------------------------
산문 연재 ‘내 삶을 돌본 것’에서 소설가 백온유는 무거운 삶의 과제를 마주하며 사는 것이 인간의 숙명이라면, 어떤 기억은 ‘망각’하는 것이 도리어 버틸 힘이 되어준다는 깨달음을 이야기한다. 무엇이든 자주 깜빡한다는 소설가의 일상을 지켜보는 즐거움 끝에 잔잔한 여운이 감돈다. 계절마다 출간되는 신간을 조망하는 촌평란도 충실하게 꾸려졌다. 시인 신경림의 유고 산문집부터 비인간 담론, 웨딩산업 르뽀르따주, 트럼프 2.0, 지역 현실 등을 짚는 다양한 도서를 다룬 8편의 촌평이 오늘의 독자들이 함께 고민해야 할 문제들을 촘촘히 짚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