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 G. 웰스의 SF 고전 『모로 박사의 섬』
19세기 멕시코를 무대로 다시 태어나다!
공포, 판타지, 역사, 누아르 등을 누비며 발표하는 작품마다 장르에 새로운 활력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작가 실비아 모레노-가르시아가 SF 장편 『모로 박사의 딸』로 돌아왔다. 고딕 소설의 전통과 라틴아메리카라는 배경을 결합한 『멕시칸 고딕』으로 영국환상문학상을 수상한 저자는 이번에는 『우주 전쟁』, 『타임머신』으로 잘 알려진 H. G. 웰스의 또 다른 대표작 『모로 박사의 섬』을 새로운 관점에서 재해석했다. 동물 생체실험으로 탄생한 기이한 피조물들이 사는 섬을 다루며 과학만능주의와 인간중심주의에 대한 경종을 울린 원작의 무대를 멕시코로 옮겨 반식민주의적 메시지를 보다 강화한 동시에, 가부장제의 모순을 깨닫는 젊은 여성을 새로운 주인공으로 제시하며 여성주의적 색채를 더했다. 한편 작품의 배경으로서 지배 계급과 원주민 사이의 분쟁으로 혼란스러웠던 19세기 중반 멕시코의 역사가 생생히 그려진다. 『모로 박사의 딸』은 《뉴욕 타임스》, 《타임》, 《NPR》 등 유수의 언론에서 올해의 책으로 선정되고 휴고 상과 로커스 상 최종 후보작에도 올랐으며, 현재 제임스 완 감독의 제작사 아토믹 몬스터와 유니버설 스튜디오 산하의 UCP에서 판권을 획득하여 드라마로 개발 중이다.
‘세상의 끝’에 자리한 위태로운 안식처
그곳에 생긴 균열을 통해 깨어나는 한 여성의 성장기
1871년, 멕시코. 고국을 떠나 라틴아메리카를 떠돌던 영국인 몽고메리는 그의 채권자이기도 한 대농장 지주 리잘데의 소개로 ‘세상의 끝’이라 불리는 유카탄반도 야샥툰의 외딴 저택으로 향한다. 마을과 동떨어진 저택에는 인간과 동물을 결합하는 실험에 매진 중인 모로 박사와 그의 외동딸 카를로타가 살고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병약하여 주기적으로 모로 박사의 치료를 받아야 했던 카를로타는 존경하는 아버지가 마련해 준 책과 실험에 의해 탄생한 동물인간들을 벗 삼아 바깥세상에 대한 궁금증을 키워 나가고 있었다. 몽고메리는 카를로타를 지켜 주는 안전한 공간이자 후에 대농장에 제공할 일꾼을 만드는 연구가 진행되는 이 기이한 저택의 집사 자리를 수락한다. 그로부터 6년 후, 세상과 단절되어 있던 저택의 평화는 원주민 반란군을 추격하던 리잘데의 아들 에두아르도와 그 사촌 이시드로가 당도하며 흔들린다.
배가 좌초되어 섬까지 표류한 에드워드 프렌딕이라는 영국인 화자의 시점으로 그려지는 웰스의 작품과 달리, 『모로 박사의 딸』은 카를로타와 몽고메리라는 두 인물을 축으로 전개된다. 두 인물의 시점이 번갈아 가며 진행이 되지만, 고립된 환경에서 자라 미숙하고 나이브했던 혼혈 여성 카를로타의 각성과 성장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고립된 작은 세계에서 마치 신과 같이 군림하는 모로 박사에게 순종하기만 하던 카를로타는 외부에서 온 충격을 계기로 감정의 격랑을 겪으며 비로소 아버지에게서 벗어나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정립해 나가고, 불완전한 기술로 짧은 수명을 타고난 동물인간들과 연대한다.
반세기 넘게 피가 흐른 땅,
유카탄반도의 알려지지 않은 역사
『모로 박사의 딸』은 실제 분쟁이 있던 멕시코를 뒷배경에 두고 사건이 펼쳐집니다. 유카탄은 반도지만 위치상 멕시코의 다른 지역과 연락을 유지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때때로 섬처럼 느껴집니다. 몇몇 오래된 스페인 지도에서는 유카탄이 정말 섬으로 표시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이 소설을 쓰는 계기가 되었습니다._작가 후기 중에서
『모로 박사의 딸』이 배경이 되는 멕시코 유카탄반도는 19세기에 장장 50년 넘게 분쟁이 끊이지 않는 지역이었다. 국가적으로는 제국주의 열강의 침탈과 내부의 계급 차별 심화로 매우 혼란스러운 상황이었고, 특히 유카탄반도에서는 주로 유럽계 후손과 혼혈인으로 구성된 대농장 지주들이 최하 계급인 마야 원주민을 폭력과 채무로 억압하고 노동력을 착취하면서 갈등을 빚었다. 1847년, 노동 환경 개선을 요구하던 마야인 혁명가 마누엘 안토니오 아이가 사형을 당한 것을 계기로 시작된 대규모 반란인 ‘카스트 전쟁’은 1901년까지 이어져 결국 멕시코 정부군이 마야인들의 중심지 찬 산타 크루즈를 점령하며 끝을 맺는다. 『모로 박사의 딸』은 치열했던 마야 원주민의 투쟁을 이야기의 뒷배경으로서만이라 후반부 서사의 중요한 한 축으로 그려내고, 카를로타와 동물인간으로 대변되는 약자들을 통해 당시 억압받는 존재들이 처했던 현실을 은유한다. SF 역사에 한 획을 그은 명작의 플롯을 통해 상대적으로 조명되지 않은 동시대 다른 세계의 비극을 담아낸 이 작품은 현대적 감각으로 그린 고전 재해석의 의의를 되새기게 할 뿐 아니라 신선한 충격과 깊은 사유를 동시에 선사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