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노동은 어떠십니까?
우리는 매년 5월 1일을 노동절로 기념하고 있다. 노동자의 권리를 보호하고, 그것이 부당하게 침해당하거나 유린되지 않도록 감시하는 일은 이제 민주 사회의 상식이 되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다시 한 번 물어야 한다. 노동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우리의 삶에서 노동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우리에게 노동은 단순한 강제인가? 재화를 벌어들이기 위한 수단일 뿐인가? 자아의 실현인가? 즐거운 활동인가? 어쩔 수 없이 선택하는 필수적 과정일 뿐인가?
여기에 현대 사회에서 노동의 의미를 따져 묻는 독일의 젊은 철학자 스베냐 플라스푈러가 있다. 그녀에 의하면, 현대인에게 노동은 더 이상 고통이 아니다. 노동은 원죄를 가진 인간에게 주어진 형벌도 아니고 신의 뜻에 따라 살아가는 인간의 의무도 아닌 것이다. 우리는 일이 좋아서 하고, 필요이상의 에너지를 일에 쏟아 붓기도 한다. 자신의 능력에 따라 하는 일이 정해지고 사회적 지위가 달라진 이래로, 노동은 행복의 약속이 되었다. 이 과정은 물론 우리가 선택한 것이다.
그러면서 노동은 동시에 쾌락의 다른 원천들까지 몰아내고 있다. 성욕을 비롯한 인간의 다양한 에너지와 열정이 노동으로 승화되는 것이다. 스마트폰을 침대로까지 가져가 수시로 메일을 체크하고, 휴가를 가서도 휴대전화를 손에서 놓지 못하며, 불안한 여가시간보다 차라리 야근이 마음 편하며, 밤이 되어도 쉬지 못하고 완전히 탈진할 때까지 머리를 굴려야 한다. 이것은 중독이다. 마약 중독, 알코올 중독, 골초처럼 자기 파괴자와 달리 기업과 국가가 나서서 칭송하고 이상화 하는 노동 중독 혹은 일중독인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자신이 혹사당한다고 전혀 느끼지 않는다. 오히려 “난 할 수 있어!”라고 쉬지 않고 외친다. 고통의 한계를 느끼는 감각마저 잃어가며 탈진의 위험이 있는 과도한 노동으로 우리는 자기 자신을 착취한다.
쾌락은 어떻게 노동이 되었나
저자 스베냐 플라스푈러에 따르면,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라는 표어에 집약적으로 표현되어 있듯이 본래 의무였던 노동은 우리의 결심에 의해 쾌락과 향락의 자리로 이동했지만 이때 노동은 우리의 본래적 욕구와 관계 맺지 않는다. 우리 시대의 노동이 가지는 향락은 오직 “가상으로서의 향락”일 뿐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향락이 아닌 것을 향락으로 가장함으로써 자신을 기만하고 그럼으로써 우울한 노동을 이어가고 있는 자가당착의 향락 노동자들이다.
우리 시대의 노동은 주체적 자아와 비틀어진 관계에 놓여 있다. 나는 나를 발현하고 실현함에 의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을 억제하고 희생함으로써 일과 관계 맺는다. 왜냐하면 나는 나 자신을 희생할수록 더욱 사랑받기 때문이다. 저자 플라스푈러는 이를 “강박적인 사랑”이라고 표현한다. 나는 일을 통해서 나 자신을 부정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타자 혹은 공동체 혹은 자본의 사랑을 탐한다. 따라서 이는 개인의 주체적인 의지에 의한 자유롭고 열정적인 사랑이 아니다.
죄 없는 향락은 칼로리가 없다
인간의 쾌락은 동물의 충동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동물은 오로지 자연적인 필요만을 느끼지만 인간은 문화적 경계를 넘는 일을 매력적으로 느낀다. 스스로 깨트리면서 유지하는 금기들은 인간에게 강한 충동을 선사한다. 다이어트 처방에 따른 집단적 굶주림과 뷔페 식당들의 집단적 과식 등, 오늘날 자본주의의 인간은 “조금 덜”에서 느끼는 쾌감과 “조금 더”에서 느끼는 쾌감을 동시에 만끽한다. 금욕이 클수록 향락은 더욱 커지기 때문이다.
플라스푈러에 의하면, 욕망을 자제하면 쾌락은 더욱 커지지만 과도한 금욕은 향락을 왜곡시킬 수 있다. 모든 것을 자제하기만 하면 참된 세계를 경험하지 못한다는 발터 벤야민의 말처럼, 문명화된 현대인의 자발적 금욕의 코스프레로 인해 우리는 점점 향락에서 멀어지고 이런 방식으로 향락은 다시 노동으로 변질되는 것이다.
워커홀릭의 강박적 사랑
사랑받고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가 좋아서 온 힘을 쏟아 붓지만 사랑하는 상대로부터 그 사랑을 되돌려 받지 못하는 사람은 두려워서 온 힘을 쏟는다. 상대의 사랑이 불안할수록 더 많은 에너지를 상대에게 투자하는 것이다. 워커홀릭은 이런 강박적 사랑을 하는 사람이다. 사랑받지 못한다는 느낌 때문에 늘 불안하고 자신이 언제나 대체가능하다고 느끼기 때문에 미리 알아서 복종을 한다. 탈진에 이르기까지 일을 하는 것도 결국 일의 만족이나 자아실현 때문이 아니라 경쟁에서 살아남아 타인의 인정을 받고 싶어서이다. 얼핏 보면 일에 대한 열정처럼 보이지만 일중독자에게 노동은 그자체로 순수한 의미를 잃어가고 있다. 채워지지 않는 사랑에 목말라하며 모든 외적 자극에 적극적으로 반응을 나타낸다.
현대인들은 통증과 같이 몸이 보내는 이상신호에도 진통제나 각성제를 복용함으로써 신체를 노동에 최적화시키고 있다. 이로써 고통을 모르는 그의 신체는 타인의 고통 또한 공감할 수 없게 된다. 고통은 쾌락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으며 또 고통을 경험한다는 것은 현실을 경험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놓아 두기”와 단순한 삶을 꿈꾸며
지금 우리의 모습은 어떠한가. 아침마다 허둥거리며 하루를 시작하고 초조히 시계를 보며 출근하고 점심때는 뭘 먹는지도 모르고 허겁지겁 음식을 입속으로 밀어 넣고 전화를 받으면서 이메일을 체크하고 해가 져도 퇴근할 줄을 모르다가 겨우 집에 와서는 쉬기는커녕 또다시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있지 않은가. 대체 우리는 왜 이렇게 아등바등 힘겹게 살고 있는가. 삶을 즐길 줄 아는 유일한 생물종인 인간이 말이다.
저자 플라스푈러는 이 책에서 현대의 노동이 가상의 향락 노동으로 전락한 문명적 과정을 면밀히 해부하고 그 정신분석적 토대를 분석하고 있으며 마지막 장에서 이 우울한 상황을 부정할 수 있는 길까지 모색하고 있다. 무의미하게 끝없이 동일한 노동을 반복하는 시지푸스도, 허기를 식욕을 억제하지 못해서 자신의 살을 뜯어 먹던 에리직톤도, 물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빠져 있던 나르시스도 일하는 더 이상 우리의 자화상이 아니어야 한다. 일에 대한 강박적 사랑을 내려놓고 자기 자신에 대한 자유로운 사랑의 가능성에 대해 사유하고자 하는 모든 이들에게, 그리고 성과 중심의 이 사회에서 탈진과 중독이 아닌 자유와 행복의 가능성에 대해 사유하고자 하는 모든 이들에게 이 책을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