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미를 밀어내고 스스로 진화하는
몸뚱어리의 말, 시 이후의 퍼즐
대상 속으로 스며드는 “몸 바꾸기의 언술”
최규승의 두번째 시집 『처럼처럼』이 출간되었다. 2000년 계간 『서정시학』 신인상으로 등단한 후, 2006년 첫 시집 『무중력 스웨터』가 나온 다음 다시 6년 만이다. 여기와 저기, 남자와 여자, 시인과 대상처럼 대칭되는 지점에 놓인 존재들이 서로 몸을 섞으며 배치를 바꾸는 최규승 특유의 시 쓰기는 『처럼처럼』에 이르러 더욱 조밀해졌다. 이 시집에서 최규승은 대칭과 순환을 통해 일상에서 느끼지 못하는 언어와 의미, 언어와 언어의 ‘사이’를 짚어내며 시의 프랙털을 자아내고 있다.
최규승의 시는, 시라고 불리는 제도적 문법 이후의 시이며, 시와 세계가 사라진 이후의 다른 삶의 보존이다. 지시하지 못하는 언어를 통해 다른 삶의 감각을 전달하는 시는 이미, ‘시 이후의 스캣’의 가능성에 접근해 있다. 그의 언어들은 언어가 실재에 닿을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다른 언어의 세계를 낳는다. 그것이 궁극적으로 향하는 것은 아마도 아주 고요한 시 이후의 침묵일 것이며, 고통 이후의 다른 고통의 감각일 것이다. _이광호(문학평론가)
퍼즐처럼―“시가 무엇인지 기억나지 않는다”
최규승은 시에서 대칭 구도를 자주 이용한다. 통념과 달리 오른쪽부터 읽게 씌어진 「이상한상이」 에서, 의미가 도출되는 방향으로 읽어야 한다는 생각과 익숙한 왼쪽(보이지 않는 축)부터 읽어야 한다는 관성이 충돌하면서 독자는 혼란을 경험하게 된다. 최규승이 주목하는 것은 이런 충돌에서 벌어지는 틈, 언어의 ‘사이’다.
다본라바미러끄물를나은인시의속울거
이없도임직움히용조도무너
다진만를귀은인시속울거
―「이상한상이」 부분
최규승의 대칭은 바로 맞은편, 정반대의 것을 되비추는 데 그치지 않는다. 가운데 축(사이)을 기준으로 양 옆으로 펼쳐지는 시 「은유」는 거울과 거울이 맞비추듯 다방향으로 서로를 무한히 반사하고 새로운 차원, 거울 속의 길을 열며 “읊조림”들을 ‘나’로 수렴한다.
전위의 읊조림 읊조림의 전위
이것의 부재 부재의 이것
나의 너 너의 나
나의 나 나의 나
나의 나
나
의
나
의
ㅇ
ㅡ
ㅣ
―「은유」 부분
또한 “물빛이다” [……] “내일은 다시 물빛이다”(「하루」), “여자는 나무의 그림자를 안고 있다” [……] “나무는 여자의 그림자를 안고 있다”(「왈츠」)같이 첫 행에서 시작한 문장을 마지막 행에서 변용해 닫는 구조도 빈번히 등장한다. 수미상관이나 대칭을 활용한 시는 흔히 놀이 혹은 게임에 비유되곤 하지만 시집 전반을 아우르는 고요한 장악력 덕에 최규승의 시는 놀이나 게임보다 용의주도하게 구획해놓은 ‘퍼즐’에 더 가까워 보인다.
힌트처럼―“사이와 사이를 가득 채운 사이”
그녀는 수평선을 허리에 두르고 마치 사실인 듯
피처럼 붉은 물을 뚝뚝 흘리며
온몸에 전구 같은 심장을 수없이 달고
박동 소리로 말한다
마치 기계처럼, 쇳소리 같은, 소리를 내며 냉정한 여자인 듯,
처럼에게 끝까지 다가가려는 처럼처럼
그러나 처럼이 되지 못하는 처럼처럼
같은에 한 발 물러선 같은 같은
그래도 같은이 되지 못하는 같은 같은
인 듯은 인 듯에 붙어서 인 듯인 듯
어쩌면 인 듯인 듯이 아닌 듯
처럼도 아닌 것처럼
같은도 아닌 것 같은
인 듯도 아닌 듯인 듯
그녀는 수평선을 허리에 두르고
붉은 물을 뚝뚝 흘린다
온몸에 반짝이는 심장을 달고
심장박동으로 말한다 냉정하게
―「처럼처럼」 전문
최규승의 퍼즐은 난해하지만 아예 풀 길이 없는 것은 아니다. 표제시인 「처럼처럼」에서는 힌트를 슬쩍 내주며 “언어와 대상, 언어와 실재 사이의 거리를 감추기보다는 그것을 날카롭게 드러낸다”. 첫 연에서 “마치 사실인 듯/피처럼 붉은 물을 뚝뚝 흘리며/온몸에 전구 같은 심장을 수없이” 달고 “기계처럼, 쇳소리 같은, 소리를 내”는 “냉정한 여자인 듯”했던 “그녀”는, 마지막 연에서 덕지덕지 붙은 연결어들을 떼내 “상징도 리얼리티도 진정성도 내러티브도/모두 잘려나간 퍼즐”(「안개도시국제카페」) 답게 정돈된다. 힌트는 두번째, 세번째 연에 있다. “처럼” “같은” “인 듯”이 의미 포착을 돕기보다 오히려 실재에 끝내 다가가지 못하고 맴돌게 했음을 보여준다. 첫 연과 마지막 연은 언뜻 같아 보이지만 다르다. 독자들에겐 불친절하지만 의미 앞에서 가장 정직한, 그 차이를 만들고 잉여를 쳐내며 껄끄러워진 틈을 타 또 한 번 ‘사이’가 내비친다.
몸뚱어리처럼―“눈을 떠도 나는 내가 아니다”
시인이 직접 쓴 뒤표지글에서 행갈이로 강조한 부분을 임의로 떼내 읽으면, “썼다”에서 시작해 “고쳤다” “만들었다” “버렸다”를 거쳐 “없다”로 끝난다. “썼”던 시가 의미에 다가가다 뒤섞이다 흐려지다 결국 의미가 “없”어지던 순간, 최규승의 시가 시작한다. “시가 무엇인지 기억나지 않는다”(「치매」). 그리고 ‘나’ 역시 아무도 아니다. 나는 “지우개”이자 “문고리”며 숨 쉬고 죽기도 하지만 결국 “내가 아니”(「나는」)라서, 거울에 비추어봐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거울이 있던 자리」). “유일하게 되고 싶은 것은/아무것도 되지 않는 것”(「조사」), 나는 아무도 아니기에 무엇이든 될 수 있다.
나를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
내가 바라보는 사람들
그들의 몸에 내가 새겨진다
서서히 움직이는 사람들
내가 웃으며 나를 떠나간다
나를 노려보며 내가 달아난다
나를 새겨 나르는 수많은 몸뚱어리들
―「견인」 부분
‘나’는 “땅콩”도 “티백”(「나는」)도 될 수 있으니, “견과류의 날”도 “찻잔의 날”도 나의 것이다. “너의 날도 그의 날도/개와 쥐의 날도/모두 내 것”(「고통」)이라, 내가 사라진 자리에 파고드는 모든 몸뚱어리‘들’의 고통은 개인의 파편이 아닌 진의에 가장 가까운 고통 자체다. 나도 시도 고통도, 무엇이 무엇인지 기억나지 않아도, 아니 그러므로 최규승은 시를 쓴다. “시의 화자는 침묵조차도 말해야” 하므로.
뒤표지 글
나는 방 안에 있다
내가 있는 방은 벽이 없다
나는 방을 그대로 묘사해서 시를
썼다
시를 본 평론가 A씨는
시에 리얼리티가 부족하다고
시를 내게 다시 돌려주었다
그의 비평이 너무 고마워
나는 그 밤 시를
고쳤다
벽이 없는 방
리얼리티를 상상하여
벽을 만들고 문을 만들고
햇살 쏟아지는 창도
만들었다
고친 시를 평론가 B씨에게 보여주었다
이번에는 나의 부족한 상상력을
걱정하며 시를 돌려주었다
나는 나의 부족한 리얼리티와 상상력에 절망하여
그 시를 태워
버렸다
벽 없는 방이 탄다
방이 타자 벽이 생긴다
나는 벽 안에 갇힌다
내가 있는 벽 안에는 방이
없다
시인의 말
시는
시다
짜지 않아야
달지 않아야
쓰지 않아야
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