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의 영어 전쟁은 계급투쟁이다!
“한국 사회에서 영어는 최대의 생존 무기”
한국인에게 영어는 무엇인가?
- 영어는 권력이자, 종교이자, 공포다
한국에서 영어는 어떻게 권력이 되었나?
영어는 이 땅에 들어오면서부터 ‘권력’이었다. 일제강점기 고학력층 사이에서 영어는 ‘인정 투쟁’ 수단이자 사교권 장악 수단이었으며, 미군이 새로운 지배자로 등장한 해방 정국에서 영어는 가장 강력한 생존 무기였다. 영어를 할 수 있는 통역관들이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기 시작한 해방 정국에서 영어는 시대정신이었다. 본격적인 ‘수출 전쟁’이 시작된 1970년대에 영어는 생존의 문제로 격상되었다. 수출을 하기 위해서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영어를 위해 수출을 지휘하는 정부의 중앙부처는 영어 붐 조성에 앞장섰으며 각 회사마다 자체 영어 교육을 실시하는 건 물론이고 사설 영어 학원들은 학생과 직장인들로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1990년대를 기점으로 불기 시작한 세계화 바람 속에서 영어는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되었다. 국제 경쟁력 강화를 명분 삼아 기업은 영어 열풍을 선도했으며 “토플과 토익만 잘해도 대학에 갈 수 있다”거나 “영어 하나만 제대로 배워오면 성공이지요”라는 말이 떠돌 만큼 영어는 한국 사회 최고의 자본이 되었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갓난아기까지 영어 교육에 휩쓸리기 시작했으며, 그래서 한국 사회에서 영어 배우기는 ‘국가적 종교’라는 말까지 나왔다.
2000년대 들어 영어는 정치와 유착했다. 광역자치단체는 물론이고 기초자치단체까지 경쟁적으로 영어캠프를 열거나 영어마을을 조성했으며, 2007년 대선에서는 대통령 후보들까지 영어 교육을 대선 공약으로 제시하기도 했다. ‘영어 지상주의’가 한국 사회를 휩쓸면서 ‘영어 망국론’까지 등장했지만 영어를 향한 한국인들의 숭배는 끝을 모르고 있다. 왜 이런 일이 생기는 것일까?
한국에서 영어는 ‘내부 서열 정하기 게임’이다
“다른 집 아이에 비해 뒤떨어지는 건 참을 수 없다.” 한국 영어 교육의 본질을 이처럼 잘 꿰뚫어본 말이 또 있을까? 이 발언이 시사하듯, 한국에서 ‘국가 종교’로까지 숭배될 만큼 대접 받는 영어는 ‘내부 서열 정하기 게임’이다. 한국에서 영어 수요는 실수요가 아니라 가수요다. 가수요의 정체는 물론 ‘내부 서열’이다. 즉, 내부 서열을 정하기 위한 용도로 한국인들은 영어 공부에 매진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계층 간 영어 격차는 필연이다. 영어 격차를 완화하기 위해 영어의 공용어화가 필요하다는 주장은 순진하거나 낭만적이거나 어리석거나 기만적이다. 영어 전쟁의 목적이 영어를 잘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내부 서열을 정하는 데에 있기 때문이다. 즉, 모든 국민이 영어를 모국어처럼 잘하는 날이 오더라도 누가 더 잘하는가를 따지는 서열은 건재하다는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영어 전쟁은 대학 입시 전쟁과 한 몸이다.
대학 입시 전쟁이 이른바 ‘능력주의meritocracy’의 가면을 쓴 적나라한 계급투쟁이듯이, 영어 전쟁 또한 그러하다. 영어 문제는 대학 입시 문제의 판박이라는 주장에 이견을 제시할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대학 입시 문제가 그대로 온존하는 가운데 영어 문제의 개선은 어려운 정도가 아니라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두 가지 문제 모두 그 핵심은 서열에 관한 생각에 있기 때문이다. 한국인에게 영어 전쟁은 대학 입시 전쟁처럼 숙명인 셈이다.
영어 예찬론과 영어 망국론의 타협을 위해
한국은 영어 예찬론과 영어 망국론이 공존하는 사회다.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일반적으로 보수주의자들은 영어를 예찬하고 있고 진보주의자들은 영어 망국론을 이야기한다. 둘 사이에 타협은 불가능한가? 그렇지 않다. 충분히 타협이 가능하다. 영어 광풍을 비교적 지지하는 보수파는 전체 초·중·고생 사교육비의 3분의 1이 영어 학습에 쏠리는 현실이 국가적 차원에서 초래하는 ‘기회비용機會費用’에 눈을 돌려야 한다. 영어 광풍은 기회비용의 관점에서 보자면 보수주의자들이 좋아하는 국제 경쟁력에 도움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큰 해악을 초래하고 있기 때문이다. 외국의 학생들이 배움에서 ‘깊이’를 추구할 때에 우리는 순전히 내부 경쟁용 변별 수단으로서 영어 교육에만 목매고 있는 상황이라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진보주의자들도 성찰이 필요하다. ‘전부 아니면 전무’식의 자세를 버리고 나의 욕망도 인정하는 수준의 타협이 필요하다. 서열 없는 사회를 꿈꾸는 건 아름답지만, 그건 종교의 비전과 비슷한 아름다움이다. 영어 광풍에 대한 비판과 비난은 백번 지당하신 말씀이지만, 이게 일반 대중 사이에 설득력을 갖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서도 성찰이 필요하다. 영어 전쟁에 비판적인 사람들은 다 영어를 잘했기 때문에 그렇게 발언할 수 있는 자리에 오른 사람들이다.
우선 좋은 대학을 나오기 위해서라도 영어를 잘하는 건 꼭 필요한 일이었을 테고, 이후의 경쟁에서도 영어라고 하는 관문을 거쳐야만 사회적 발언을 할 수 있는 지위에 오를 수 있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나와 내 자식은 예외로 하면서 사회를 향해 당위를 외치는 건 무력하거니와 위선이라는 말을 듣기 십상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서열 유동화가 필요하다
서열 타파는 가능한가? 그건 불가능하다. ‘서열 미화’도 위험하지만 ‘서열 타파’ 주장도 실현 가능성이 없는 주장이다. 강준만 교수가 이 책에서 주장하는 핵심적인 논지는 ‘서열 미화’와 ‘서열 타파’ 사이에 중간지대를 만들자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서열 유동화’다. ‘서열 미화’와 ‘서열 타파’라고 하는 양극화된 대립구도 속에서 ‘서열 유동화’라고 하는 제3의 길을 통해 한국 사회가 직면한 영어 문제를 해결하자는 것이다.
강준만 교수는 그간 학벌, 서열, 경쟁을 비판하면서도 학벌과 서열을 깨거나 없앨 수는 없다는 점을 지적하며 ‘서열 유동화’를 대안으로 제시해왔다. 그는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건 ‘다원적 경쟁 체제’라고 강조한다. 그래야만 경쟁의 병목 현상에서 벗어나 합리적인 평생 경쟁 체제로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즉, 대학의 기존 ‘고정 서열제’를 노력하기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변동 서열제’로 바꿔야만 학벌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는 게 강준만 교수의 주장인 셈이다.
영어 전쟁을 해결하기 위한 해법 역시 이와 다르지 않다. 사실상 학벌과 한 몸인 영어 문제 역시 서열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 강준만 교수가 “영어 광풍에 너그러워지자”는 대안을 내놓은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서열 미화’와 ‘서열 타파’라는 양 극단의 주장을 넘어설 수 있는 ‘서열 유동화’에 주목하는 게 필요한 시점이다.
책속으로 추가
정부의 조기 유학 전면 자유화 방침에 따라 학부모들이 앞다투어 유학 설명회에 몰려들었다. 초등학교 6학년인 아이를 미국으로 조기 유학 보내려는 김 모 씨(37)는 “영어 하나만 제대로 배워오면 성공이지요”라고 말했다. 이런 원리에 따라 젊은 주부들을 중심으로 태어난 지 2~3개월 된 아기에게도 선생님을 고용, 과외를 시키는 것이 유행처럼 번져나갔다. 일주일에 한 번 방문하는 선생님에게 ‘장난감 갖고 놀기’를 지도받는 전 모 군은 생후 6개월인데, “좀더 일찍 시작하지 못한 걸 후회한다”는 어머니 김 모 씨(27)는 “남편은 ‘아기에게 뭐하는 짓이냐’며 나무라지만 주변의 아기에 비해 뒤떨어지는 건 참을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한국 영어 교육의 본질을 이처럼 잘 꿰뚫어본 말이 또 있을까? “다른 집 아이에 비해 뒤떨어지는 건 참을 수 없다”는 교육 원리에 따라 불법 조기 유학도 급증했다. 「“영어 하나만 제대로 배워오면 성공이지요”」(본문 중에서)
2004년 초 국내에서 최초로 문을 연 경기도 안산의 영어체험마을은 문을 연 지 3주 만에 2005년 2월까지 예약이 완료되었다. 이에 자극 받은 각 자치단체들은 벤치마킹을 통해 앞다투어 영어마을 조성에 총력을 기울였다. 서울시는 백제 초기의 토성터가 있어 ‘유적지 훼손’ 우려와 비난에도 불구, 송파구 풍납동에 (구)외환은행 합숙소를 활용한 약 1만 6,730제곱미터(5,061평) 규모의 거대한 영어마을을 2004년 11월 개장하기로 했으며, ‘제2의 영어체험마을’을 유치하기 위한 성북구와 노원구, 도봉구, 서대문구 등 강북 지역 자치구들의 경쟁이 치열하게 벌어졌다. 전라남도는 도청 이전지인 무안군 남악 신도시에 총 151억 원을 투입, 2006년까지 대규모 영어마을을 조성하기로 했다. 그 밖에도 부산시, 강원도, 인천시, 제주도, 대전시 등 광역 지자체·교육청, 소규모 지자체들도 영어마을이나 비슷한 시설 건립을 추진했다. 「영어캠프?영어마을 붐」(본문 중에서)
2012년 6월 3일 한국개발연구원이 내놓은「영어 교육 투자의 형평성과 효율성」보고서에 따르면 부모 소득에 따라 영어 사교육 노출 비율이 극명하게 대비되었다. 월 소득 100만 원 이하 가구의 학생은 영어 사교육 참여율이 20퍼센트 수준이지만, 500만 원 이상 가구의 학생은 70퍼센트였다. 서울 강남권은 영어 유치원 참여 비율이 24.6퍼센트인 반면에 비강남권은 1.1퍼센트에 불과했다. 영어캠프와 영어 전문 학원 참여 비율의 격차는 물론 도·농 간 영어 성적 격차도 두드러졌다. 이런 불평등 구조는 대학 수학 능력 시험과 토익 점수, 연봉 격차로 이어졌다. 부모 소득 100만 원 당 수능 영어 점수 백분율이 2.9계단 상승해 국어(2.2계단), 수학(1.9계단)을 앞질렀다. 소득 100만 원 당 토익 점수는 16점 차이가 났다. 또 토익 점수 100점이 높으면 연봉이 170만 원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보고서는 영어 성적에 따라 임금 프리미엄이 나타났지만, 영어 능력이 업무 생산성으로 연결되었다기보다 다른 자질 덕이라고 분석했다. 중요한 것은 부모 소득의 격차에서 비롯된 불평등한 영어 학습 기회가 또 다른 소득 격차로 대물림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토익 계급사회’」(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