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인권은 선험적이고, 절대적이며, 최고선인가?
인권은 갈등적이고 정치적이다. 흔히 인권은 ‘인간이기 때문에 자명하게 주어지는 권리’, ‘천부 인권’, ‘양도하지 못하는 권리’, ‘자연권’, ‘그 어떤 경우에도 침해될 수 없는 인간의 존엄성’ 등으로 설명되곤 한다. 하지만 인권개념을 선험적이고 절대적이며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어떤 최고선으로 단순화해서 기술하게 되면 그것이 주는 장점만큼이나 문제도 많다. 우리 사회에서 요즘 인권이란 말을 부쩍 많이 쓰고 있고 모두가 인권을 잘 아는 것 같이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서로 다른 눈높이와 관점, 방식으로 인권을 제각각 다르게 이해하고 있다. 모두가 인권을 상이하게 이해하면서도 그 차이점을 덮어두고 추상적인 차원에서만 인권에 동의하는 기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이것은 권리의 개념에 대한 본질적 성찰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인권의 본질적 성찰을 위해서는 인권의 갈등적인 구조, 현실의 문제제기들을 받아들이고 논쟁을 벌여나가야 한다.
2. 인권을 비판하라
인권은 저항담론으로 출현했지만 그것 자체가 새로운 저항담론을 낳는다. 이러한 비판담론을 낳은 비판이론들은 각기 다른 관점에서 인권개념에 중요한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마르크스는 ‘권리 운운’식의 요구는 현대 사회를 밑에서부터 썩게 만들며, 공동체의 공동선을 생각지 않는 이기적·사익적 권익은 인권으로 인정하지 말아야 한다는 경고의 메시지를 보낸다. 페미니즘으로부터는 ‘등잔 밑이 어둡다’는 교훈을 배운다. 역사적으로 가장 오래되고 가장 많은 사람이, 가장 광범위하고 조직적으로 억압된 여성의 권리침해 문제를 도외시한 채 인권운동을 했던 역사적 과오를 반성하게 해 준다. 상대주의는 서구중심적으로 발전해 왔던 인권의 역사와, 인권이 헤게모니로 변모되어 갈 수 있는 가능성을 차단할 수 있는 방패막이 된다.
3. 인권은 시대에 따라 변한다: 인권은 정치적 개념이다
인권담론이 현실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인권의 패러다임이 탄압 패러다임에서 웰빙 패러다임으로 변하면서, 대중이 권리를 주장하는 강도, 범위, 속도, 영향력이 모두 급격히 증대했다. 인권담론의 양적·질적 변화로 인해 사적인 권익주장도 대폭 늘었으며, 정치 일반에 대한 기대치와 요구도 대폭 증가했다. 이런 현상은 포스트민주화 시대의 특징이자 전 세계적인 현상이다. 이와 함께 인권이 일종의 ‘패권이념’으로 작동하면서 인권이 한낮 강대국의 정치무기로 전락하고 있는 현실 또한 존재한다.
인권은 정치적 개념이며, 절대주의적으로 표현되곤 하는 인권이 정치적인 토론과 투쟁을 기반으로 하지 않을 경우 민주주의에 큰 악영향을 끼치기 쉽다는 것은 현실 곳곳에서 볼 수 있다. 그간 전통적으로 인권을 이야기할 때 가장 주요했던 방법은 법학을 기초로 한 것이었다. 법학은 국민국가 질서가 지배하는 세계에서 국제법의 성격과 지위, 초국적 법질서의 가능성을 탐구하고, 법적 이성을 통해 법의 내적 의미, 통일성, 적용범위, 허점 등을 연구한다. 일견 과학적으로 보이는 이 방식은, 특정한 사회적·정치적 맥락을 고려치 않고 국제법의 규범과 특정한 행동을 야기하는 사회적·정치적 규범을 혼동하는 한계를 가진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인권의 쟁점과 범주는 변화하며, 이를 파악할 때 사회·정치적 환경을 가장 주요한 변수로 삼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모든 문법은 한시적인 것이고 시대와 함께 변한다. 또한 모든 문법은 언어의 시대적 쓰임새에 따라 새롭게 규정된다. 지금 이 [인권의 문법] 또한 시대가 지나면 새로운 이론을 필요로 할 것이다. 바로 지금 우리의 인권을 깨어 있는 이념으로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회의하고 실험하며, 문법의 이론을 점검해야 한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저자는 인권의 문법이 필요하다고 밝히고 있다.
4. 인권과 정치의 관계설정과 민주주의
한국 사회는 지금,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시대를 거치면서 바람직한 정치이념과 제도의 설정을 놓고 격렬한 논쟁의 고비를 거치고 있다. 인권은 실행 가능한 민주주의를 위해 선결적인 요소인데도 지금까지 주변적으로만 취급되어 왔다. 인권이 전문가 담론 속에 갇혀 하나의 특수 분야로 안주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권이 중심적으로 부각되지 않는 민주주의는 본질적으로 취약한 체제로 전락한다. 또한 인권은 대의민주주의의 제도로 수렴되지 않는 현실 민주주의의 결손을 보완하기 위해 동원되는 직접행동 민주주의에 중요한 이론적·실천적 단초를 제공한다. 인권과 사회정책 간의 연관성도 실행 가능한 민주주의를 위해 중요한 고려사항이다. 마지막으로, 인권은 한국의 현대사를 인권이라는 프리즘으로 일관되게 읽을 수 있는 유용한 해석틀을 제공한다.